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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봉광산: 선캄브리아기 변성암 지대에 매장된 금

▣ 구봉광산: 한 때는 전국 제1의 금 생산지였다. 구봉광산은 일제 강점기인 1911년부터 금을 캐기 시작하여 1926∼1937년 금 2만 5838g, 은 28만 5867g을 생산했다. 해방후인 1949∼1970년에는 금 1,113만 6,100g, 은 33만 1,203g을 생산하면서 번성하였다. 그러나 1967년 매몰 사고 이후 생산이 급격히 줄어 결국 1971년 문을 닫았다. 광산의 영향으로 1970년대에는 남양면 인구가 13,700여명에 이르기도 했다. 구봉광산의 금 매장량은 총 28t 정도로 추정되는데 이전에 생산된 11t을 제외하더라도 17t 정도가 남아 있다는 뜻이다. 실제로 2017년 금광을 다시 개발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있었으나 환경문제 등으로 진행이 멈춘 상태이다. ▶구봉광산 지질은 흑운모..

충청남도/청양 2022.06.16

지질구조와 지형

▣ 지질구조와 지형 및 식생 청양군은 대부분의 지역이 선캄브리아기 변성암 지대이며 일부는 중생대 퇴적층(대동계)이다. 우리나라의 많은 도시들, 특히 충청남도의 도시들이 선캄브리아기 변성암 지대를 관입한 중생대 화강암 지대에 자리를 잡은 것과는 다른 점이다. 화강암 지대는 남동부 금강 연안에 매우 좁게 분포한다. ▶ 충남의 알프스와 협곡 변성암은 화강암에 비해 풍화에 강한 특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주변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은 고지대가 될 수밖에 없었다. 즉, '충남의 알프스'는 지질구조에서 부터 시작된 셈이다. 또한 심층풍화가 잘 이루어지지 않는 변성암의 속성 상 구조선을 따라 좁고 깊게 풍화가 이루어져서 산지곡류와 협곡이 잘 발달한다. 지천(까치내)은 대표적인 산지곡류로 독특한 경관을 형성하고 있다..

충청남도/청양 2022.06.15

청양: 생활권을 가른 충남의 알프스

▣ 작지만 여러 생활권으로 나뉘는 지역 *사례1: 청남면 사람들은 금강 너머 탄천중학교(공주시 탄천면)를 다녔다. *사례2: 운곡면 사람들은 신양천(무한천 상류)을 따라 신양중학교(예산군 신양면)를 다녔다. *사례3: 화성면 사람들은 광천장이나 대천장을 다녔고, 지금도 대천으로 물건을 사러 간다. *사례4: 정산고등학교 통학생 중에는 청양 학생보다 공주 학생이 더 많다. 작은 군이지만 4개의 서로 다른 생활권이 합쳐진 곳이 청양군이다. 대부분은 금강의 지류(지천, 잉화달천, 치성천) 유역에 속하지만 금북정맥을 경계로 무한천(삽교천의 동쪽 지류) 유역에 속하는 지역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좀 더 자세히 들여다 보면 같은 금강 유역에 속하더라도 지류를 가르는 높은 분수계 때문에 교류가 많지 않았던 지역도 ..

충청남도/청양 2022.06.15

浦, 津, 渡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 三浦開港: 浦가 港으로 개방되었다 배가 드나드는 곳을 '항구', 또는 '포구'라고 한다. 어감으로 보면 포구에 비해 항구가 좀 더 규모가 큰 느낌이 든다. 또 포구는 현대적이기 보다는 예스런 느낌이 든다. 사실 조선시대까지는 '항', 또는 '항구'라는 개념이 없었고 구한말 부산, 인천, 원산 등 三浦開港 때 비로소 등장한다. '三浦開港'이라는 낱말이 재미있는데 '浦'와 '港'이 함께 쓰였기 때문이다. 굳이 해석을 하자면 '3개의 포를 항으로 열었다'는 뜻이다. 이전부터 있던 '三浦'가 구한말에 이르러 '港'으로 개방되었다는 뜻으로 해석한다면, 규모가 커지고 다른 나라와 교역하는 기능이 강화된 것을 '港'으로 정의할 수 있다. ▣ 浦: 해안의 배가 드나드는 곳은 모두 '浦' 를 보면 조선시대에 바닷가의..

금정(金井): 백제의 유산

▣ 역 이름이 금정(金井)이 된 이유 ▶금이 나는 곳이었다 금정역(金井驛)은 남양면 금정리에 있었다. 지금은 역의 자취가 남아 있지 않지만 '금정'은 마을 이름으로 생생하게 남아 있다. '金井'의 금과 우물, 두 가지가 모두 이 마을과 관련이 있다. 우선 이 일대는 예로부터 사금을 많이 채취하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구봉광산을 비롯하여 청양은 금이 많이 매장되어 있고 많은 금을 생산했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사금은 지표로 노출된 금맥이 풍화침식을 받으면서 떨어져 나와 하천을 따라 이동하다가 퇴적된 것이다. 금정리 위쪽에서 지천과 합류하는 봉암천은 구봉광산이 있던 산줄기에서 시작된다. 지질구조와 하천의 흐름을 볼 때 이 일대에 사금이 많이 퇴적되어 있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 백제시대부터 '당금정'이라는 곳..

충청남도/청양 2022.06.10

신흥종교의 메카 신도안

▣ 신흥종교의 메카가 된 원인 1. 고대 이래로 신성한 산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신라의 주요 기도처였으며 중국에 까지 알려져 있었다. 2. 산태극 수태극의 명당으로 조선 왕도 후보지였다. 3. 「擇里志」의 영향. * '계룡산은 오관산보다 웅장하지 못하고, 삼각산보다 수려하지 못하나 래맥이 멀고 골이 싶어 정기를 함축하였다' 하고 ' 그 서쪽에 있는 용연은 매우 깊고 크며 그 물이 넘쳐서 시내가 되는데 이것은 개성에도, 한양에도 없는 것이다'라고 신도안이 풍수지리상의 길지임을 서술하였다. 그 영향인지 맨처음 신도안에 정착한 사람들은 유림이었다. 4. 「鄭鑑錄」 비결에 따르면 조선 왕조 이후 정씨왕국 800년 역사가 시작될 곳이다. * 「鄭鑑錄」의 계룡산 신도 정씨왕국 개국설: 태조의 꿈에 계룡산 산신..

충청남도/계룡 2022.06.02

新都 '안'과 '팟'거리 두마(豆磨)

▣ 신도를 조성할 때 일꾼들이 팥죽을 먹었다? 계룡시는 독립하기 이전에는 논산시 두마면이었다. '豆磨'는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콩을 간다'는 뜻이다. 콩이 많이 났던 지역일까?, 아니면 콩을 갈아서 두부를 많이 만들어 먹었나? 이름을 보면 누구나 이런 생각을 할 것이다. 계룡시에 가면 의문은 아주 쉽게 풀린다. 호남선 계룡역 옆에 서있는 커다란 돌비석에 유래가 잘 적혀있기 때문이다. '팥을 가는 마을'에서 왔다고 한다. 원래 두계리였던 역 주변은 도로명 주소를 지을 때 아예 '팥거리로'가 되었다. 이에 발맞추어 두계리에는 팥죽집도 생겨서 큰 인기를 끌고 있다. 동짓날이나 먹던 귀신 쫓는 죽 팥죽이 이젠 사시사철 먹을 수 있는 지역 특산 음식이 된 것이다. 동짓날 추위에 살짝 솔은 껍데기를 걷어 내어 먹..

충청남도/계룡 2022.06.01

계룡산 장소성의 변화

▣ 鷄龍의 의미 '닭'과 '용'이 합쳐진 말이기도 하지만 '닭의 벼슬을 가진 용'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닭'과 '용'으로 나누어 봐도 의미는 크다. 즉, 닭은 일찍 일어나서 새벽을 알리는 가축으로 시대를 일깨우는 선지자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신라의 계림(鷄林)이 대표적인 예이다. 용은 상서로운 동물임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 전통적으로 고귀한 자, 왕을 상징하는 동물이었다. 이 둘이 합쳐진 '계룡'은 '닭의 벼슬을 가진 용'으로 해석해볼 수 있다. 일찍이 박혁거세 설화에서 알영(閼英)이 계룡의 왼쪽 갈비에서 태어났다. 그러니까 '계룡산'은 새벽을 알리는 선지자와 고귀함을 상징하는 매우 격이 높은 이름이다. ▣ 장소성의 변화 ▶백제시대 국가적 의미로 격상된 계룡산 백제 시대 왕도 웅진의 배후..

충청남도/계룡 2022.05.30

계룡: 신도안에 자리 잡은 3군 본부

▣ 역사적 맥락이 부족한 도시, 그러나 빠르게 만들어진 독특한 지역성 계룡시는 여러 면에서 독특한 지역이다. 우선 역사적으로 어떤 행정 단위와도 일치하지 않는다. 조선시대에는 연산현, 진잠현, 공주목에 조금씩 걸려 있었고, 일제 강점기 이후에는 충청남도 논산군·대덕군에 속해 있었다. 그러다가 최근(1990년 계룡출장소 설치)들어 독립 행정구역의 기틀을 마련하였고, 약 20년 전인 2003년에 이르러서야 독립 행정구역이 된 전형적인 형식지역이다. 따라서 역사적 배경을 바탕으로 하는 지역성을 갖는 지역이라고 보기가 어렵다. 역사적으로 어떤 행정구역에도 속해 있지는 않았으나 비교적 뚜렷한 지역성을 갖는 내포와 비교할만 하다. 내포는 여러가지 문화요소가 공통적으로 분포하고 지리적 경계도 비교적 뚜렷한 하나의 실..

충청남도/계룡 2022.05.29

신도안: 지형 및 풍수

▣ 지질구조로 풀어보는 지형 신도안 일대의 지질구조는 단순한 편이다. 대부분 화강암 계열의 암석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 보면 북쪽 배후산지인 계룡산은 시대 미상의 편마상화강암, 또는 홍색장석화강암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신도안 분지 일대는 대부분 쥬라기에 관입한 화강섬록암으로 이루어져 있다. 분지 동쪽과 분지 바깥쪽 금암동, 두마면 일대는 쥬라기 흑운모 화강암이 대부분이다. 특이하게 쥬라기 화강암을 백악기 석영반암이나 산성암맥류가 다시 관입한 곳도 있다. 관입한 방향은 뚜렷한 남북 방향이며 분지의 서쪽과 동쪽, 그리고 남쪽에 있다. 이러한 지질구조는 지형에 잘 반영되고 있다. 북쪽의 편마상화강암, 또는 홍색장석화강암은 천황봉을 비롯한 높은 산지를 이루고 있다. 편마상 구조이므로 상대적으로..

충청남도/계룡 2022.05.26

신도(新都) 천도 계획

▣ 천도계획: 기득권 세력과의 헤게모니 싸움 1392년 7월17일 왕위에 오른 태조 이성계는 한달 후인 8월13일 한양으로 천도를 발표한다. 즉위 하자마자 천도를 단행하고자 했던 가장 큰 이유는 개경을 기반으로 하는 기득권 세력들을 견제하기 위해서였지만, 예로부터 전해 내려오던 풍수도참설의 영향도 적지 않았다. 도선기, 도선답산가로 전해 내려오던 개경 지기쇠왕설이 그것이다. 그러나 중신들의 반대로 바로 실행하지 못하고 미뤄두게 된다. 이 와중에 갑자기 계룡산 천도설이 대두가 된다. 태조2년 1월 왕가의 태실지를 찾던 권중화가 계룡산 일대를 도읍지로 천거하였기 때문이다. 이에 태조는 김사형, 이지란, 남은, 무학대사를 대동하여 그해 2월 계룡산을 둘러보게 되며, 3월부터 12월까지 10개월간 조감도를 만들..

충청남도/계룡 2022.05.26

왜군의 호남 침략을 저지한 금산 전투

▣ 호남과 충청우도를 우회한 왜군: 보급로 및 퇴로를 확보하지 못하다 임진왜란 때 충절 관련 인물과 유적이 많은 것이 금산의 큰 특징이다. 표충사(조헌 사당), 이치 대첩비(권율장군), 고경명선생비, 칠백의총, 충민공순절비(권종), 의병승장비(영규대사 추모비) 등 임진왜란 관련 인물과 유적이 금산에는 눈에 띄게 많다.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었다는 뜻이다. 영남로, 호남로 등 주요 도로에서 벗어나 있는 오지에 불과했던 금산이 이처럼 주요 전장이 되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 나라를 구한 이순신: 왜군의 보급로와 퇴로를 끊어 당초 敵은 수륙 양면으로 합세하여 서쪽 방면을 공격하려고 했다. 그러나 수군이 한산도에서 이순신의 수군에게 크게 패함으로써 완전히 위세가 꺾이고 말았다. 이 때문에 고니시가 비록 평양성을 ..

블루베리 2022: 새 가지는 1년에 한 개씩

블루베리 분갈이 ▣ 5년 만의 분갈이: 2021.2.13(토) 옥상에서 산지 어언 5년째 접어드는 블루베리, 2년 전에 한 그루의 한 ... blog.naver.com ▣ 2년생 가지부터 열매가 맺히는 블루베리 작년에 뿌리를 갈라서 다이어트를 한 블루베리. 작년에는 몸살을 하더니 올해는 꽃이 만발했다. 오래된 가지와 작년에 새로 난 가지가 섞여 있는데 작년에 새로 난 가지는 모두 자르고 하나만 남겼다. ​ ​ ▣ 새 가지는 1년에 한 개씩만 키우고, 전체 가지는 5~6개 정도가 적당하다 神農 남필우선생의 말을 따라 묵은 가지를 자르지 않고 그냥 두고, 대신 작년에 새로 난 가지를 몽땅 자르고 하나만 남겼다. '블루베리는 2년생 가지에서 연다'고 잘못 알고 묵은 가지를 몽땅 자를 뻔 했었다. 브루베리는 '..

충청과 호남의 점이 지대: 행정 구역 변천

▣ 전라도에서 충청도로 금산의 원 지명은 ‘내〔川〕가 길다’는 뜻의 ‘진내’였다가 진예, 금계, 금주 등을 거쳐 금산이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금산군과 진산군 2개 군의 영역이었으며, 일제 강점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통합되었다. 조선시대 전라도에 속했으나 대한제국 때인 1895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잠시 충청도에 속했다가 이듬 해인 1896년 금산군·진산군이 모두 전라도로 환원되었다. 일제 강점기 내내 전라도에 속했다가 해방 후인 1963년 충청남도로 다시 환원되었다. 무주, 진안, 완주 등 전라북도와 인접하고 있으며 충청남도의 동남쪽 끝에 위치하여 충청도와 전라도의 점이적 성격을 띠기 때문에 겪었던 역사적 사건이었다. ▣ 삼국시대 군사적 요충 삼국시대에 금산군 일대는 영호남을 잇는 길목이었던 까닭..

금산 인삼

▣ 언제부터 금산에서 인삼이 재배되었을까? ▶ 1500년 전? 설화에 따르면 1500년 전부터 인삼이 재배되었다고 한다. 실제로 중국의 陶弘景(452~536)이 집주한 「신농본초경(神農本草經)」에는 1500여년 전 백제에서 인삼이 재배되었음을 기록하고 있다(김순기, 1992). 인삼통 금산군청 인삼통 홈페이지입니다. www.geumsan.go.kr ▶ 예로부터 품질을 인정받았던 금산인삼 인삼에 대한 우리나라 최초의 기록은 로 알려져 있다. 에는 당시 '중국에서는 삼이 난 지역에 따라 고(구)려 삼, 백제삼, 신라삼으로 구별하였다'고 적었다. 또한 '북쪽의 고려삼은 크고 물렁하여 백제나 신라삼에 미치지 못한다'고 하였다. 명나라 이시진(李時珍)이 지은 에도 비슷한 기록이 있는데 '인삼 중에서 백제의 것을 ..

금산: 위치와 자연환경

▣ 위치 충청남도의 동남부에 있는 금산군은 동쪽으로 충북 영동군, 서쪽으로는 충남 논산시‧전북 완주군, 남으로는 전북 무주군·진안군, 북쪽으로는 대전광역시‧충북 옥천군과 맞닿아 있다. 수리적 위치는 동경 127°38′~127°19′, 북위 35°58′~36°16′에 걸쳐있어 동서 폭 24km, 남북 길이 23km의 범위이다. 금산군청을 기준으로 서천-금산-구미-포항과 동일 위도대, 흥남-안변-가평-이천-진천-청주-금산-진안-남원-구례-순천과 동일 경도대를 이룬다. ▣ 지질구조: 화강암, 퇴적암, 변성암, 심지어 화산암도 있다. 중생대 쥬라기 화강암류와 백악기 화강암류가 가장 많다. 금강유역에 속하는 지역들은 거의 대부분 화강암 지대이다. 화강암은 금산읍 일대에서는 저지대를 이루고 있는 반면, 동북부의 군..

금산: 인삼과 임진왜란 순절

▣ 인삼과 임진왜란 격전지는 연결 고리가 있을까? '금산' 하면 떠오르는 것을 물으면 열 중 아홉은 '인삼', 또는 '칠백의총'이라고 답할 것이다. 금산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인삼 생산지이며 임진왜란 때 의병들의 순절지이다. 초등학교 교과서에서 시작하여 수도 없이 들어온 '대한민국의 상식'이다. 그렇다면 '인삼'과 '임진왜란 의병'은 연관성이 있을까? '금산'이라는 같은 공간에서 두 가지 상징이 발생했으므로 최소한 비슷한 지리적 배경 정도는 가지고 있을 것이다. 둘 사이의 역사적 맥락을 찾기는 쉽지 않지만 상상력을 좀 동원한다면 둘을 하나로 묶을 수 있다. 다름 아닌 '산간 오지'라는 지리적 특성이다. 주요 도로에서 떨어져 있는 오지성, 산지가 대부분인 지형 특징이 두 가지 사실을 하나로 엮는 연결 고리..

[링크] 천안시에 기적 같은 일 일어났지만...

'합성 아니냐'... 천안시에 기적 같은 일 일어났지만... [최병성 리포트] 환경과 개발이 조화를 이루면 도시의 자랑이 된다 www.ohmynews.com ▲ 많은 독자들이 합성이 아니냐고 믿기 어려워했던 장면이다. 노랑부리저어새와 외가리와 고라니를 사진 한장에 담는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 최병성(오마이뉴스, 2022.4.21)

[펌] 2년 연속 인구 자연 감소: 합계출산율 0.81

2021년 인구 통계 * 출생아 수 26만500명: 역대 최소. * 사망자 수 31만7800명: 역대 최대. * 합계 출산율 0.81명 * 자연 감소 5만7300명 * 혼인 19만2509건, 2020년보다 2만993건이 줄어 2년 연속 인구 자연감소 통계청 ‘2021년 출생·사망 통계’2020년보다 감소폭 커져합계출산율 0.81명, 또 하락 www.hani.co.kr ☞ 2021년 장래 인구 추계를 반영한 내외국인 인구 전망: 2020 ~ 20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