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남도/청양

왕진(汪津): 부여와 정산을 연결하던 나루

Geotopia 2022. 6. 21. 12:40

 

▣  금강 연안은 부여권

 

  청양군에서 금강과 닿아 있는 지역은 청남면, 목면이다. 하천 유역으로는 지천, 잉화달천, 치성천, 어천의 하류 지역으로 조선시대에 모두 정산현에 속했다. 이 일대는 전통적 생활권으로 볼 때 부여권으로 분류할 수 있다. 금강이라는 큰 지형 장벽이 있지만 직선 거리로 보면 부여읍이 청양읍 보다 훨씬 가깝다. 강을 건너야 하는 장벽은 그다지 큰 어려움이 되지 못했다. 어려움이 아니었다기 보다는 육로 20여km, 그것도 기복이 만만치 않은 칠갑산 자락을 걷는 것은 배를 타는 것보다 더 큰 장벽이었다고 보는 것이 옳겠다. 강을 건너면 부여읍까지 꽤 먼 거리를 걸어야 했지만 전반적으로 평탄해서 칠갑산 자락에 비해서는 훨씬 쉬운 길이었다.

 

왕진의 위치  *카카오맵

 

▣  금강 연안의 나루들

 

  따라서 이 일대가 부여생활권에 속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인프라는 나루였다. <1872 지방지도(정산현)>에 따르면 이곳에는 반탄진(半灘津), 왕진(汪津), 석정진(石亭津) 등 3개의 나루가 있었다. 멀지 않은 거리에 나루가 3개나 있었던 것을 보면 인구와 물자의 유통이 활발했던 곳임을 알 수 있다.

  이 가운데 가장 큰 나루는 왕진이었다. '汪'의 훈이 '넓다'는 뜻이므로 꽤 큰 나루가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강쪽으로 튀어나온 곶부리 형태의 지형이어서 자연적으로 나루가 발달하기에 유리한 지형 조건을 잘 갖추고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오갔으므로 나루 주변에는 마을이 발달하고 있었다. 마을과 나루는 20세기 후반까지 유지되었다.

 

반탄친, 왕진, 석정진 등 3개의 나루가 수록되어 있다 *<1872 지방지도(정산현)>

 

  그러나 오랫동안 부여와 청양을 잇는 역할을 했던 왕진을 비롯한 나루들은 근대 교통로가 등장하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1970년대 중반 625번 지방도로가 개설되고 부여와 정산을 오고 가는 시내버스 노선이 만들어지면서다. 창강나루(반탄진)는 주로 탄천중학교(공주시) 통학생들이 이용하던 나루였으므로 청남중학교가 개교(1983년)하면서 빠르게 기능을 잃었다. 특히 2002년 금강을 건너는 왕진교가 준공되면서 나루 기능이 완전히 쇠퇴하였다.

 

625번 지방도로(사진 오른쪽)와 왕진리 입구

 

 

  교통 수단은 바뀌었지만 주민들은 여전히 부여로 장을 보러 간다. 정산을 거쳐 공주로 가거나, 청양으로 가는 경우도 없지 않지만 대부분의 주민들은 부여로 간다. 생활권은 크게 변함이 없는 것이다. 

 

  ▶ 汪津이 아니라 王之津이었다.


  백제 때 왕이 도림사(장평면 도림리)를 가끔 찾았다고 한다. 사비성에서 도림사를 가기 위해서는 이곳 나루를 건너야 했으므로 임금이 건넌 나루라는 뜻으로 王之津이라 불렀다. <동여도>에도 王之津으로 표기되어 있다.


  그런데 한말에서 일제 강점기 사이에 汪津으로 바뀌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위의 <1872 지방지도(정산현)>에는 汪津으로 표기되어 있고, 일제강점기였던 1915년 지형도에는 汪津里라는 지명이 등장한다. 일설에는 마을 이름도 왕의 마을이라는 뜻의 王之마을이었다고 한다.
 

▣  몽뢰정(夢賚亭)

 

  정산에 살던 한양조씨 조지안(조사우라고도 함)이 석성 현감으로 발령을 받아 석성으로 가는 도중 비를 만나 이곳 왕진나루에서 하루를 머물게 되었다. 그런데 꿈에 노인이 나타나 이곳은 만고승지이니 이곳에 살라하여 정자를 짓고 꿈이 준 정자라는 뜻의 '몽뢰정'으로 이름하였다고 전해온다.

  <1872 지방지도(정산현)>에도 몽뢰정이 표시되어 있다. <1872 지방지도>가 조정의 명에 의해 그려졌고, 그래서 군현 치소를 중심으로 그려졌던 지도라는 사실을 상기하면 몽뢰정이 당시 매우 유명한 정자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1954년 항공사진을 보면 몽뢰정으로 추정되는 건물이 아주 크다. 주변의 초가집 민가들과 비교해 보면 정자라기 보다는 대가집 같은 크기다. 실제로 주민의 증언에 따르면 커다란 민가가 있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에는 청남면 일대 일본인 토지를 관리하던 사람이 살았다는 얘기도 전한다.

  이 정자(집)는 안타깝게도 1960년대 중반에 헐리어 지금은 축대,주춧돌과 돌 한 총계만 남아 있다. 해체되어 강 건너편의  창강서원(부여읍 저석리)과 황일호 사당(부여읍 가증리)을 짓는데 사용되었다고 한다. 지금은 몽뢰정 대신에 한양조씨 재실(몽뢰재각)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몽뢰정과 왕진 항공사진(1954)&nbsp; &nbsp;*국토지리정보원
몽뢰정 대신 자리를 지키고 있는 몽뢰재각

 

 

▣  역사적 뿌리는 백제

 

  왕지진 일대가 부여권에 속했던 것은 백제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사비 시대는 물론이고 웅진 시대에도 왕지진 일대에는 많은 가마가 있었다. 이들 가마에서는 왕궁이나 절, 관공서, 교육시설 등에 사용되는 기와, 벽돌, 토기 등이 생산되었다. 장평면 관현리·분향리, 정산면 학암리, 청남면 왕진리 등에서 그 가마터가 발견되고 있다. 

 

 

浦, 津, 渡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  三浦開港: 浦가 港으로 개방되었다 배가 드나드는 곳을 '항구', 또는 '포구'라고 한다. 어감으로 보면 포구에 비해 항구가 좀 더 규모가 큰 느낌이 든다. 또 포구는 현대적이기 보다는 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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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진 답사 후

 

강 바 람 
                                         신 경 섭


수천 년 스스로 닦은 강이 유유히 흘렀다
사람들은 그 유역(流域)에 모여
집안을 일궈 마실을 이루고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맘은 모른다는
인정 속에 그리 살아갔다 

청남을 떠나 객지에 둥지를 틀고 사는 우장식형이
창강나루 아래 왕진나룻터에 앉아
그윽이 강물을 바라보다가 
한 번 빠지면 한 사람의 힘으론 좀체 나올 수 없는 
고향 금강 모래톱 이야길 꺼내며
까까머리 시절에 잠긴다 

나를 이끌었던 두둑에 서면
몸을 누이던 강아지풀과 지랑풀 사이로 
경단을 굴려 가던 쇠똥구리가,
금빛으로 반짝이던 모래가 한눈이었다 

삶은 여울처럼 굽이굽이 돌아 소용돌이치는 강을 닮았다
큰물 뒤 황톳빛은 그대론데
한 해에 쌀 반 가마를 주고 통통배에 자전거를 싣고
강 건너 탄천(灘川)중학교로 통학하던 
금강은 4대강 사업에 1자로 반듯해졌고
강물 위로 큰 다리를 놓아
부여와 청양의 경계를 허물고
맘만 먹으면 하루에 열댓 번도 오간다 

이제 와 생각하니
야산은 구절양장은 아니더라도
마실의 풍습과 살강의 음식을 나눴으나
강은 배움의 뜻을 가르진 못했다 

대처에 살다 보니
차창 밖으로 들어오는 산들바람이 때로 좋지만
내 마음속엔 강바람이 분다 

강바람 그 바람에 내가 이리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