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남도/청양

금정도(金井道): 정약용이 찰방이었던 적이 있다

Geotopia 2022. 6. 22. 17:57

 

 

▣ 충청도의 역도

 

  조선의 역로 체계는 고려시대 제도를 이어받았으나 1462년(세조 8)에 이르러 역의 신설과 이설 및 통합에 따라 재정비 되었다. 1462년 8월에 병조의 건의로 충청도는 연원도(連原道/찰방역 충주 단원역), 율봉도(栗峯道/찰방역 청주 율봉역), 성환도(成歡道/찰방역 직산 성환역), 이인도(利仁道/찰방역 공주 이인역), 시흥도(時興道/역승역 온양 시흥역), 금정도(金井道/찰방역 청양 금정역→홍주 용곡역)로 개편되었다.

 

  1457년(세조 3) 7월에 최초로 전국의 역승 일체를 혁파하고 찰방으로 대치하였다. 이러한 조처는 서리거관자(書吏去官者)로 임명된 역승이 사사로이 이익을 도모하고 백성(吏民)을 침해할 뿐만 아니라, 역승의 관품이 높지 않다 하여 사신왕래자의 작폐가 심하다고 거론되었기 때문이다.
  찰방은 역리(驛吏)를 포함한 역민의 관리, 역마 보급, 사신 접대 등을 총괄하는 역정(驛政)의 최고책임자였다. 또한 유사시에 북방지역에서는 합배(合排 : 함경·평안도 연안에 설치한 군사적 성격의 역촌)를 순행하면서 부방(赴防)의 임무도 수행하였다.
  행정면에서는 대간(臺諫)이나 정랑직(正郎職)에 있는 명망 있는 문신을 차출해 지방 주현에 파견하여, 수령의 탐학과 민간의 질병까지도 상세히 고찰하게 함으로써 민생 안정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察訪)]

 

▣ 금정도:  내포를 관할하던 역도

 

  충청도 6개의 역도 가운데 금정도는 충청도의 서북부지역, 곧 내포 일대의 역을 관장하였다. 그리하여 금정도 속역은 금정역(金井驛, 청양)·광시역(光時驛, 대흥)·용곡역(龍谷驛, 홍주)·세천역(世川驛, 홍주)·몽웅역(夢熊驛, 해미)·해문역(海門驛, 결성)·청연역(靑淵驛, 보령)·풍전역(豐田驛, 서산)·하천역(下川驛, 태안) 등 9개의 속역으로 편성되었다. 금정도의 관할권은 충청도 홍주를 중심으로 청양, 보령, 대흥, 결성, 해미, 서산, 태안 등 내포 전 지역을 아울렀다.

  17세기 무렵에는 시흥도를 통합하였다(정확한 통합 시기는 알 수 없으나 <호서읍지>에 따르면 1614년(광해군6년)으로 추정한다.). 시흥도에 속한 역은 신창의 창덕(昌德), 예산의 일흥(日興), 덕산의 급천(汲泉), 면천의 순성(順城), 당진의 흥세(興世), 아산의 장시(長時), 평택의 화천(花川) 등 7개 역이었다.

금정도(연두색은 시흥도에서 편입된 역) *<동여도> **태안의 하천역은 <동여도>에 수록되어 있지 않다.
금정도 속역 현황 *「여지도서」

 

 용곡역에서 일하는 역리와 노비가 317명이나 되었다

 

  금정도 찰방역이 된 후 용곡역에는 많은 사람들이 근무했었다. 「여지도서(1757년∼1765」에 따르면 역리 121명, 역노 175명, 역비 21명 등 모두 317명이나 되는 관리와 노비가 역에서 근무를 했다. 그에 딸린 식구들과 관련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근처 마을에 살았을 것이므로 마을에는 적어도 수백 명에서 천 명 가까운 인구가 살고 있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1930년 지형도에서 그 자취를 찾아볼 수 있다. 지금은 작은 마을로 쇠락했지만 1930년대 당시까지 용당리 일대는 제법 큰 시가지가 발달하고 있었다. 새길(지금의 619번 지방도로)이 놓여 있었지만 옛길이 여전히 쓰이고 있었고 마을은 옛길을 따라 발달한 옛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1930년까지 용당리 일대는 상당히 큰 시가지가 유지되고 있었다.&nbsp; *조선총독부(1930)

 

찰방 주재 역이 옮겨진 이유는?

 

  금정도를 관장하던 찰방은 원래 청양의 금정역에 주재했으나 후에 홍주의 용곡역으로 이전하였다. 이전한 시기도 정확히 알려진 것이 없지만 시흥도를 통합하면서 옮겼을 것으로 추정된다. 「여지도서」(1757~1765)에 청양의 금정역이 '고 금정역'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전한 뒤에는 새로 이름을 짓지 않고 구금정, 또는 고금정으로 부른 듯하다.

  이전한 이유 역시 명확하게 알려진 것이 없다. 그러나 구 금정역은 금정도 관할 범위의 남동쪽 끝에 있어서 전체 속역들을 관장하기에 효율적이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더욱이 내포의 중심 도시인 홍주와는 금북정맥을 경계로 생활권이 나뉘어 있기 때문에 더욱 접근성이 떨어진다. 반면에 용곡역은 금북정맥 북쪽 무한천 상류에 자리를 잡고 있었기 때문에 홍주목이나 한성부와 접근성이 훨씬 좋았다.

 

금정도의 자취는 사라졌고 마을 어귀에 벽화가 역말의 자취를 대신하고 있다.

 

 찰방 치소가 옮겨지면서 이름도 바뀌었지만 오랫동안 옛 이름과 바뀐 이름을 섞어서 썼다. <동여도>와 <대동여지도>에는 예전 이름인 '용곡역'으로 표시되어 있으나, <청구요람>과 <1872지방지도(홍주목)> 에는 '금정역'으로 바뀌어 표시되어 있다. 청양의 옛 금정역은 '舊 金井(<동여도>, <대동여지도>, <청구요람>), 또는 '古 金井(<1872지방지도(청양현)> )'으로 표시되어 있다. 이전 이후에도 오랫 동안 옛 이름과 새 이름이 섞여 쓰였던 것으로 보인다. 

  금정역(용곡역)의 자취는 거의 사라졌고 '용곡'은 화성면 용당리 안의 자연 마을 이름으로 남아 있다. 그리고 마을 앞에 서 있는 몇 개의 찰방 송덕비와 정약용 유적임을 표시한 비석이 이 마을이 금정역이 있던 곳임을 말해주고 있다.

 

  ▶ 찰방역이 역도의 중심에 있지 않은 이유

  역의 역할은 왕의 거동, 공문서 이동, 사신왕래, 관리 출장, 공물 수납 등을 돕는 것이었다. 이런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길 옆에 있는 것이 유리하다. 하지만 모든 역이 길 옆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또한 찰방역은 각 역도의 중심에 있지 않았다. 예를 들어 충청남도에 있었던 4개의 역도(금정도, 이인도, 성환도, 시흥도)를 보면 찰방역(또는 역승역)은 모두 역도의 한쪽에 치우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역도를 관리한다는 측면에서 보면 매우 불합리한 위치이다. 금정역은 청양현에 위치하여 금정도의 동남쪽 모퉁이에 있었고, 용곡역으로 찰방역이 옮겨갔지만 여전히 금정도의 중심부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 이는 이인역이나 시흥역, 성환역 등 충청남도의 모든 역에서 비슷한 경향을 보인다. 

  왜 그랬을까?

  가장 큰 이유는 한성과의 연결을 가장 먼저 고려했기 때문이다. 이는 방어체제와도 관련이 있다. 즉, 수도와의 연결성이 좋은 곳에 찰방역을 두는 경향이 있어서 한성을 중심으로 원형으로 분포하는 경향이 있었다. 금정역과 용곡역은 금정도에 속하는 내포의 다른 역과는 접근성이 좋지 않은 편이지만 한성과의 연결에서는 금정도 내에서는 다른 역에 비해 뒤지지 않는다. 특히 용곡역은 무한천을 따라 대흥-예산-신창으로 빠르게 연결되었으며, 금정역은 한성과의 연결뿐만 아니라 남쪽의 이인도와의 연결에도 유리하였다.

 

금정도 찰방 정약용

 

  용당리 마을 들머리에 '다산 정약용 선생 사적비'라는 비석이 서 있다. 나란히 서 있는 선정비들에 비해 아직 세월의 때가 묻지 않은 새 비석은 약간 이질감을 준다.

 

정약용 사적비

 

  '다산 정약용이라니!'

  그 유명한 다산이 이 작은 마을과 어떤 관계가 있다는 것일까?

  사연인 즉, 정약용이 1795년(정조19년)에  다섯 달 남짓 이곳 금정역의 찰방으로 근무했던 적이 있었다. 여러 가지가 의외다. '찰방'이라는, 왠지 정약용과 어울리지 않는 직책과 5개월 정도의 짧은 근무 기간이 그렇다. 사연이 있음직 하다. 

  그해 6월 중국인 신부 주문모(周文謨)를 체포하려다 놓친 을묘실포사건(乙卯失捕事件)이 일어났다. 이와 관련해서 이승훈(李承薰)·이가환(李家煥)·정약용(丁若鏞)을 성토하는 상소를 노론측이 계속해서 올리자 마침내 이승훈은 예산으로 유배시켰고, 이가환은 충주목사로, 정약용은 금정찰방으로 각각 좌천시켰다(乙卯迫害). 당상관(정3품 우부승지)이 일거에 종7품직으로 좌천된 사연이다. 찰방은 본래 종6품직이지만 「금정일록」에서 정약용 스스로 7품직이라고 기록하였다.

  정조와 채제공(당시 화성유수. 채제공은 1793년 영의정에 올랐다가 화성유수로 임명되었다)의 강력한 지지를 받고 있던 정약용이었으나 둘째 형 정약전이 이 사건에 연루되었기 때문에 사실상 유배를 당했다고 볼 수 있다. 이곳에서 정약용은 천주교도 색출 업무와 함께, 성호 이익의 유고를 정리하고, 자신의 일상과 사상 및 근무지 주변의 동향 등을 기록한 「금정일록」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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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가환, 이승훈, 정약용

  이들은 1795년 을묘실포사건, 또는 을묘박해 때 치죄를 당한 인물 3인방이다. 이가환은 그해 공조판서로 제수되었다. 남인의 영수였던 채제공이 좌의정에 제수되었던 것과 같은 때였다. 남인의 대거 진출에 대한 노론(벽파)의 반발은 거셌다. 이가환은 성호 이익의 종손자로 실학 가문, 즉 정통 남인 가문 출신이었다. 
  이때 주문모신부를 놓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이가환이 이 사건의 관련자로 집중 공격 대상이 되었다. 이가환은 스스로 천주교도가 아니라 부인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이가환의 아킬레스건은 바로 이승훈이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영세교인이었던 이승훈은 이가환의 누이의 아들 즉, 이가환은 이승훈의 외삼촌이었다. 
  이승훈은 정약용의 누이와 혼인하였다. 즉, 정약용은 이승훈의 손아래 처남이다. 
  그러니까 을묘박해 3인방은 모두 인척 관계로 연결되었던 사이였다. 이가환과 이승훈은 삼촌-조카 사이이며, 이승훈과 정약용은 처남-매제 사이다. 이가환과 정약용은 이승훈을 매개로 이어진 사돈 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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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정역에 얽힌 이야기들: 내포, 천주교, 다산, 채제공···

 

  정약용의 후견인이나 다름없던 채재공이 정약용을 이곳으로 보냈다는 증거는 없지만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여러가지가 얽힌다. 그런 추측을 하게 하는 가장 큰 이유는 번암 채제공의 고향이 금정역에서 멀지 않은 곳이라는 점이다. 용곡역에서 채제공의 고향인 구재리까지는 직선거리로 불과 4km 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또한 사사롭게는 정약용의 서매가 채제공 서자와 혼인하여 정약용 가문과 채제공 가문은 사돈이었다. 

  정약용은 부임하자 마자 충청도 관찰사와 홍주목사에게 천주교도 색출과 교화를 권고하는 편지를 보낸다. 품계상으로 범접할 수 조차 없는 차이임에도 불구하고 내용이 자못 위협적이다. 정치적 좌천이었던 점을 감안 하더라도 정3품 승지와 종2품의 관찰사는 위계 차이가 난다. 목사는 정3품으로 같은 품계이다. 임금과 재상이라는 든든한 뒷배를 배경으로 돌아갈 날을 가까이에 기정사실화 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홍주목사, 다산 정약용을 꾸짖다 - 홍주일보

홍주천주교회사4 1795년 7월 25일 정조는 이가환을 충주목사(정3품), 정약용을 금정찰방(종6품)으로 좌천시켰다. 당시 충주와 홍주는 사학(천주학)이 심했던 곳으로 왕의 총애를 받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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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양 도성과 멀면서도 가까운 곳', 바로 내포다.

  어쩔 수 없이 유배성 좌천을 시키기에는 딱 좋은 곳이다. 게다가 내포는 '천주교의 못자리'였으니 정약용이 천주교도들을 색출하여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기에 더없이 좋은 곳이었다. 일례로 근처에 있던 다락골은 천주교도들이 모여사는 교우촌으로 최양업신부의 고향이다. 용당리에서 농암리(다락골)까지는 직선 거리로 약 4.5km 정도 떨어져 있다.

 

▣ 정약용에게 잡힌 내포의 사도 이존창

 

  1795년 말, 정약용은 성주산에 숨어있던 내포의 사도 이존창을 체포한다. 그 공이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12월에 정약용은 5개월여의 금정도찰방직을 벗어나 용양위부사직(종5품)으로 한성으로 돌아갔다. 내포의 사도 이존창을 정약용이 체포했다는 사실은 매우 충격적이다. 그는 내내 자신이 천주교도임을 부인했지만 여러 정황들을 볼 때 그가 적어도 천주교에 호의적이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이존창 체포와 관련해서 정약용과 이존창, 둘 사이에는 밖으로 알려지지 않은 어떤 약속 같은 것이 있었을 수도 있다는 추측이 있다. 여러 가지 정황들이 이러한 추측에 무게를 실어준다. 

  우선 체포 당시 상황이다. 알려져 있기로는 정약용은 금정역의 역리 2명(포교1, 포졸1)과 함께 이존창이 숨어있던 곳을 찾아가 그를 체포했다고 한다. 이존창이 숨어있던 곳을 정확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할 수 있었던 일일 것이다. 또한 겨우 역리 2명을 대동했다고 하는데, 만약 이존창이 마음 먹고 달아 나려고 했다면 2명 정도는 얼마든지 뿌리치고 달아 날 수도 있는 숫자이다. 

  이러한 추측을 하게 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체포를 당한 이존창이 처형을 당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체포된 이존창은 고향인 여사울로 옮겨져 가택 연금을 당한다. 이존창은 1801년 신유박해로 결국 목숨을 잃지만  그것은 정약용에게 체포된 뒤 무려 6년이 지난 다음이었다. 신유박해는 정조가 죽고 순조가 즉위하자 마자 불어닥친 천주교 탄압의 피바람으로 정약용 역시 이후 유배의 가시밭길을 가게 된다. 이존창을 보호해줄 수 없는 처지가 되었던 것이다. 

 

☞다산에 순순히 잡힌 이존창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201902261854723913

 

▣ 채제공: 전형적인 내포 사대부

 

  정조의 든든한 동반자였던 채제공,  충청도 출신이었으나 노론에 속하지 않았고, 오히려 실학에 관심을 보였으며, 스스로 남인을 자처하며 노론 틈바구니에서 꼿꼿하게 한 평생을 살다 간 인물이다.

  채제공의 고향 화성면 구재리는 무한천의 상류지역으로 내포의 영역에 속한다. 조선시대에는 내포의 핵심지역이라고 할 수 있는 홍주목에 속했다. 한양과 '가깝고도 먼 곳' 이었으며, 당색이 일정하지 않았고, 성호 이익의 후학들이 세거하면서 실학 사상을 펼쳤던 곳이 내포이다. 또한 '한양에 사는 사대부로 이곳에 근거를 마련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고 했던 이중환의 기록처럼 구재리에 근거를 두고 있었으면서 한양을 왕래하였다.

  이러한 내포의 특징이 잘 반영된 인물이 채제공이다. 

 

 

‘채제공 선생을 청양 대표인물로’

                                                     ‘채제공 선생을 청양 대표인물로’ [800호] 2009년 04월 27일 (월) 10:29:09 청양신문 기자 webm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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