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남도/청양

정산은 금강유역권

Geotopia 2022. 6. 30. 22:54

 

▣ 세 개의 하천 유역이 합쳐진 정산현

 

  조선시대 정산현은 지금의 정산면, 목면, 청남면, 장평면을 포괄했다. 이 범위는 잉화달천, 치성천, 본의천 등 세개의 하천 유역으로 다시 나뉜다(행정 경계가 하천 유역권과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는다). 청양읍이 모두 하나의 하천(지천) 유역으로 묶이는 것과는 많이 다른 모양이다. 이 세 개의 하천은 모두 금강과 수직 방향으로 흐른다. 따라서 서로 평행한 형태를 보인다. 그러나 유역을 나누는 산지가 높지 않아서 교류의 장벽으로 작용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하천 유역권으로 묶이지 않기 때문에 각 하천 유역들은 소규모 생활권으로 나뉠 수 있다. 예를 들면 잉화달천 유역은 부여생활권으로 연결되는 반면, 치성천과 본의천 유역은 공주생활권에 포함된다. 

 

잉화달천, 치성천, 본의천 유역권

 

▣  금강유역권 정산

 

  정산현에 딸린 역은 유양(楡楊)역이다. 지금도 역촌리라는 이름으로 그 자취가 남아있다. 그런데 유양역은 이인도(利仁道)에 속한다. 청양의 금정역과 정산의 유양역은 거리로 보면 가까이 있었지만 관할 역도가 다르다. 금정역은 금정도에 속하고, 유양역은 이인도에 속한다. 금정도는 홍주목을 중심으로 충청도 서부지역의 대로(大路)를 관할했던 반면에 이인도는 공주 이남 금강유역과 남포 이남 서해안을 연결하는 소로(小路)를 관할하였다.

  내포를 포괄하는 금정도와 인접하고 있으나 금강 건너 이인역의 관할권에 들어 있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즉, 전통적으로 금강유역권에 속해왔던 지역이라는 하나의 증거다. 청양을 내포문화권에 포함시키기도 하지만 수계, 또는 문화권으로 본다면 무리가 있다. 특히 정산은 내포문화권으로 보기 어렵다. 행정구역상 청양군으로 묶여 있지만 내포가 성립하던 시기에 엄연히 다른 문화권이었기 때문이다. 

 

  ▶이인도(利仁道)

  조선시대 충청도 공주의 이인역(利仁驛)을 중심으로 한 역도(驛道).중심역은 역이 처음 설치될 당시에는 역승이 주재하였으나 뒤에 찰방으로 승격되었다. 관할범위는 공주를 중심으로 부여-홍산-한산, 서천, 비인∼남포 등에 이어지는 역로와 공주∼정산을 잇는 역로이다.
  이에 속하는 역은 부여의 용전(龍田)·은산(恩山), 정산의 유양(楡楊), 홍산의 숙홍(宿鴻), 남포의 남전(藍田), 비인의 청화(靑化), 서천의 두곡(豆谷), 한산의 신곡(新谷), 임천의 영유(靈楡) 등 9개 역이다. 이인도에 속하는 역은 모두 소로(小路) 또는 소역(小驛)에 속하는 역이었다. 1894년 갑오경장 때 폐지되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정산의 유양역은 금강 건너 이인역에서 관할하는 이인도에 속했다; *<동여도>

 

  1914행정구역 개편 때 산간지역을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은 조선시대 군현이 합쳐져 영역이 넓어졌다. 이 과정에서 인접했으나 전혀 문화권이 다른 두 지역이 합쳐진 경우가 적지 않다. 정산현과 청양현이 합쳐진 것도 대표적인 예라고 볼 수 있다. 청양이 내포문화권에 포함되기도 하지만 전형적인 '內浦性'은 잘 드러나지 않는다. '내포성'의 기본적인 배경이라고 볼 수 있는 '안개'가 없다. 즉, 밀물이 영향을 미치는 육지 안으로 깊숙이 들어와 있는 '안개'가 있을 수 없다. 

  더욱이 정산은 금강유역권에 속하여 서해안과 접하고 있는 내포의 여러 지역과는 근본적으로 성격이 다르다. 북쪽의 무한천 유역이 내포문화권에 속하기 때문에 청양을 내포문화권에 포함시킬 수도 있지만, 그때의 청양은 조선시대의 청양이지 지금의 청양은 분명히 아니다.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정산 때문이다. 

 

▣  정체를 알 수 없어서 유명한 정산 9층석탑

 

  정산면 서정리에는 9층석탑이 있다. 논 한가운데에 뜬금없이 서 있어서 딱 봐도 굉장히 특이하다. 평지에 절이 있었다는 뜻이니 고려시대로 짐작 정도는 할 수 있다. 전문가들도 이 탑은 신라말-고려초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한다. 조형미가 떨어지는 거친 만듦새는 이 시기 지방의 호족들이 만든 탑이나 불상들의 공통점이다. 거칠게 일반화를 해본다면 이 탑도 당시 이 지역에 할거하던 호족 세력이 만들지 않았을까 추정해 볼 뿐이다.

  하지만 탑 외에는 단서가 될만한 어떤 것도 주변에서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았다. 아무리 세월이 흘렀다 하더라도 이렇게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경우도 흔치 않을 것이다. 논으로 개간되다보니 더 자취가 많이 사라졌을 것이다. 늘 물을 써야 하고 바닥을 고운 흙으로 객토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아니면 다른 곳에서 탑만 옮겨왔을까?

  이렇게 정체불명이다 보니 오히려 연구자들이나 역사학도들이 많이 찾는다고 한다. 정체를 알 수 없으므로 정체를 밝힐 여지가 남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서정리 9층석탑

 

▣  9층 석탑을 소재로 한 시 한 수

비  련 

                                           신 경 섭

구질구질 비는 내리는데
사십릿길을 가서
식어 굳은 9층 돌탑을 돌고선
비련 두 글자를 겨우 새겨
돌아선 사람의 마음 

어떤 사랑은 천년을 버텨도 제자리
바람을 빌어 빗방울로
연잎에 겨우 몇 점 속내를 비칠 뿐,
직성을 푼 건 그 사람의 사랑이 아니라
석탑의 간절함일까? 

연꽃은 피었다 지는데
실타래를 풀어보지만
묶은 적도 없으니 풀 수도 없고
헝클어진 마음만
빗물을 빌어 눈물을 쏟는 둥근 조각이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