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남도/청양

청양 번외 편: 청양 사람들과 함께 한 찐 청양 답사

Geotopia 2022. 8. 4. 01:30

▣ 2022년 7월28일(목)

▣ 일정

  도림사지(입구) - 왕진 - 미당리 - 넉배 - 구봉광산 터 - 용당리 용곡역 터

  ▶ 청양 시인 신경섭

  7월 2일 답사 이후로 신경섭선생님의 시가 여러 편 태어났다. 청양 사랑이 물씬 풍기는 그의 시는 청양을 소재로 삼았으므로 '청양스럽'지만 지역을 넘어 사람의 보편적인 감수성을 몽근하게 건드리는 매력이 있다. 스물일곱에 청양으로 첫 발령을 받은 뒤 스물일곱 해, 청양에 뿌리를 내린 신경섭선생님은 '고향을 떠나 고향에 살고 있다'는 말로 청양 사랑을 뭉클하게 표현했다. 공부하러 객지에 나갔던 때를 따져보면 신쌤은 이제 고향보다 청양에서 살아 온 기간이 더 긴 '토박이'나 다름이 없다. 앞으로는 '청양 사람' 기간이 점점 더 길어질테니 더욱 '찐 토박이'가 될 것이다. 이 번외편 답사기는 신경섭시인의 시와 함께 써 본다.

 

대티터널 

찬 바람 부는 그리움의 언덕 너머
그대에게 처음 가는 길 

산언저리 앉은 눈꽃에
지난 시절 벗들의 얼굴 떠오른다 

아! 지금은 어머니 편안한 태 속
이 검은 동굴 끝 무엇이 열리는가? 

스물일곱 살 처음 받은 발령 통지서가
내 손 안에서 찬 바람보다 더 울었다 

 

생인손 

고향을 떠났지, 등진 것은 아닌데
먼 하늘 구름만 바라봅니다

고향을 떠나와 고향에 살고 있습니다. 

그곳엔, 생인손을 앓는다고
꼴뚜기에 밀가루 반죽을 해
무명실로 칭칭 동여매 빠진 
검지 손톱이 
장항선 비둘기가 서던 
모시밭골 젤 꼭대기 집 외할머니댁처럼
여적지 있을 거라 믿기 때문입니다.

물구나무서지 않았는데도
머릿속에 도보다
발 위의 길이 더 높습니다.

 

  ▶ 귀재 복권승

  답사를 준비할 때 경섭쌤이 '복권승'이라는 분을 소개해주시고 글도 보내주셨다. '청양군과 금정역(용곡역) 일대의 장소성과 지역이야기 그리고 다산과 금정역의 콘텐츠와 활용에 관한 연구'라는 논문을 읽노라니 문득 '지리 전공자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장소성'이라는 낱말은 이미 지리학을 넘어 일반화된 말이기는 하지만 일단 지리학도의 눈길을 끈다. 그런데 논문에 인용된 지도들이 범상치 않다. 게다가 지루한 내 책(지역정체성과 제도화)이 참고문헌 목록에 들어있어서 반갑다. 그런데 읽다 보니 지리학의 영역에 가둘 분이 아니다. 지리학 뿐만 아니라 역사, 동식물 생태, 문학, 지질을 넘나드는 그는 놀랍게도 전공이 컴퓨터공학이다. 호기심이 발동하여 포털 검색에 '복권승'을 넣어보니 보통 인물이 아니다. '청양군 주민자치 정책 특보'인 그는 청양 마을 하나 하나를 손바닥 보듯 꿰고 있는데, 박학다식함 보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 방대한 지식이 지역 아이덴터티로 수렴이 되어 '마을 만들기', 그리고 '지역 만들기'로 이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방대한 지식과 경험이 지역을 설명하고 해석하는 방향으로 정연하게 링크되어 있다. 그래서 경섭쌤이 '귀재'라는 표현을 했구나! 그리고 그의 링크는 해석을 넘어서 실제 '지역 만들기'로 향하고 있다. 머릿 속의 지식을 땅 위에 현실로 투영할 수 있는 아이디어와 능력을 갖춘 '귀재'!

 

터무니연구소

터무늬는 지역성, 지구의 아름다움을 더하는 무늬, 인류의 문화유산. 나와 지역 정체성, 문화와 생태이야기로 터무니 있는 세상을...

blog.daum.net

 

터 무늬 없는 이야기 

충청도 시군면읍지가 머릿속에 들어있어
이 마실 저 마실의 고랑까지 손금 들여다보고
전설까지 주저리 꿰는
청양의 귀재 복권승 선생을 초청
학교 인문학 마당 강의를 듣는데,
인문지리 생태환경을 한마디로 ‘터 무늬’라 말한다. 

터 무늬라 터무니없는 말을 되새기다가
그 터무니있는 소리에 이 밖으로 나오는 웃음을 
입술을 꾹 다물다 안돼
손바닥으로 막고 입안으로 도로 넣으며
마음의 귀를 세웠다. 

지금 전국 마을 재생 사업으로 돌아가는 꼬라지는 
터 무늬를 버리고 표준화가 대세입니다만
마실의 생김새와 내력을 알고 지키며 특색있게 가꿔가는 것이
마을과 사람이 더 오래 잘 사는 것이란 말에 마음을 포갰다. 

사람을 식별하는 고유의 지문(指紋)이 있듯
마을에도 고유의 터 무늬가 있는 게 당연하구나
산마루에서 내려간 물살과 물결에 의해
절벽과 백사장, 퇴적지가 만들어지고
그 틈을 활용해 전답을 일구고
그 물길을 이용해 나루터가 생겨
저자가 생기고 마실 간의 왕래가 이뤄진 것은 
자연과 인간의 공생, 공간의 활용이었구나 

마을은 여태 지문(地文)을 만들었고
그 안에서 손금과 손길이 닳도록 일한 지역민들에 의해
고유의 문화를 만들어왔는데
그걸 무시하고 표준화된 거리를 만드는 것은
자연에 역행하는 것이구나 

어떤 것은 스치면 결 고운 무늬가 되고
어떤 것은 스치면 할퀴거나 베인 것처럼 자국으로 남는다
무늬는 전통의 양식(樣式)이지만
자국은 회복하기 어려운 오래도록 슬플 아픔이다 

그 터 무늬 없는 이야기로 달려가는 미래를 슬퍼한다.
                                                                                        (2020-08-05)

 

 시인 · 귀재와 함께 한 청양

 

합 장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고 하였던가?
서로의 손바닥을 마주 잡았다.
소리가 날 리 없지만
눈빛만으로 서로의 마음이 통함을 안다.
오래전에 서신으로 알고 있어 초면이었지만,
어느 한 지점에서 교차해야만 할 운명처럼
일문일답으로 대번에 지인이 되어 합장을 했다.
고택은 헐렸지만, 여전히 황토 강은 흘렀고
역사(驛舍)는 추정되지만, 청사에 기록은 남았다.
한 번은 맞대는 게 어렵지 두세 번이 어려울까?

바람이 대숲과 솔숲을 스친다
어떤 대나무는 피리로 곡조를 남길 것이고
어떤 소나무는 겨울 산을 지키는 ‘터 무늬’가 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손바닥을 합쳐야 한다, 더! 

  2022. 07. 28.
임병조•이정숙 선생과 복권승 선생의 청양 회동을 축하하며

 

▣  도림사지

  도림사지에서 만났다. 복 귀재님을 이미 사진으로 여러 번 봤지만 넉넉한 웃음으로 맞아주는 그는 사진보다도 더 인상이 좋다. 시간이 벌써 두시 반이라 왕복 두 시간이 걸리는 도림사지는 패스하기로 했다. 복권승님의 사진으로 답사를 대신한다.

 

도림사지 

칠갑산 아흐니골 비켜
삼형제봉 건너 아래 

길 밖에 수풀이라 했나
숲 안에 절이라 했나 

동안거 끝 길마가지승 꽹한 화엄이
우두커니 선 삼층 석탑의 풍경을 흔드는 산중 

저 아래 절골이 돌고 돌아
적곡이 된 붉은 세월

도림사지 3층석탑과 흩어져 있는 건축재  *사진: 복권승

 

▣  왕진

 

  ▶ 백제 가마터

 

왕진 가마터에서 

슬플 애(哀) 안엔 옷과 밥이
가마 요(窯) 밖엔 집과 물이
사비성 건너 물과 불, 나무와 흙이 들어 있다 

한여름 햇살이 정수리 가운데로 
조각난 기왓장과 이징가미* 위에 쏟아는 강나루 

물불 가리지 않고 나무와 흙을 
굽고 주무른 애환이
사라지고 잊혀가는 거기
윤슬처럼 '즈믄' 햇살에 반짝거렸다 

-
*이징가미: 깨진 질그릇 조각

 

사진 왼쪽 연안이 백제 가마터이다. 강가에 가마가 있었던 이유는 기와와 벽돌을 구워 왕궁으로 가져가기 위해서였다. 왕진 일대가 부여권에 속했던 역사는 아주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감을 알 수 있다.

 

  ▶ 심월대(沈月臺)

달강 

금빛 햇살 띄워
출렁이며 흘러가더니
은은한 달빛 드리고
고요히 속살거리는 강 

태우고 업은 건 
빛인가 물인가
다만 수직 절벽에 오른 참게가
심월대 해서(蟹書)를 드리웠네 

여보게! 한번 가신 그이는 
언제쯤 돌아오신다던가
암만 머리를 긁적여봐도
달강에 비친 바위는 말이 없네

왕진의 바로 위쪽은 하천이 휘돌아 나가는 공격사면이다. 침식으로 드러난 바위에 어느 풍류가객이 글귀를 남겼다. *사진: 복권승

 

  ▶ 몽뢰정(夢賚亭)

몽뢰정(夢賚亭)은 헐리어 사라지고 이렇게 몇 개의 석재들만 남았다.

 

몽뢰정의 자취가 기와 조각으로 남아 있다.

 

                                                         금강 오강 팔정(五江八亭)
                                                                                                   복 권 승


  금강에는 ‘오강 팔정’이라는 이름으로 다섯 강과 여덟 정자가 예로부터 유명하다. 다섯과 여덟이라는 숫자는 전통적으로 우리에게 사랑 받는 숫자다.  복 중에서 으뜸인 다섯을 오복이라 하였고, 경치 중에 으뜸은 팔경으로 수렴했다. 금강을 이루는 다섯 개의 강은 예로부터 오강(吳江-연기현), 초강(楚江-부강), 금강(錦江-공주), 백강(白江-부여), 청강(靑江-강경)으로 이견없이 불리웠다.  그런데 여덟 개의 정자는 연기와 공주 그리고 부여-청양에서 불리우는 정자가 서로 조금씩 달랐다.   

  공주에서는 독락정(獨樂亭,나성리), 한림정(翰林亭,영곡리), 금벽정(錦壁亭,금암리), 벽허정(碧虛亭,소학동), 사송정(四松亭,월송동), 쌍수정(雙樹亭,공산성), 안무정(按舞亭,정지산), 원산정(圓山亭,유하리)을 칭하기도 하고, 청양과 부여 쪽에서는 수북정(水北亭,규암), 백화정(百花亭,낙화암), 몽뢰정(夢賚亭,왕진나루), 일사정(一沙亭,청남)을 넣기도 한다. 세종(연기)에서는 금벽정을 탁금정(濯錦亭)이라 부르며 합강정(合江亭)과 청풍정(淸風亭)을 포함하기도 했다.  이 외에도 사람마다 마을마다 다양한 8정을 일컬어 왔다. 

  8정은 상징성 만큼 기능도 중요했다. 대체로 정자가 위치한 곳이 조망이 좋으니 외적의 침입을 감시하는 파수대와 뱃사람들의 거리계 역할도 했고,  지식 층들이 시를 짓고 학문을 논하는 지역 문화의 심장부였다.  또한 지역의 웃어른이 정자에 계시니 서민들이 찾아와 고충을 이야기하고 들어주는 계층 간 교류의 공간이기도 했다. 바다에서 올라오는 해산물과 소금을 내륙의 쌀과 땔감으로 교환하는 교류의 물길이 또한 이 곳이니 장사를 하는 배들이 각 지역의 정자들을 지날 때 마다 인근의 지방관(고을의 원님)들에게 통행세를 냈다는 이야기가 마을 어르신들의 이야기로 전하기도 한다. 

  8정 가운데 사진 속 주인공은 공주시 탄천면 유하리의 원산정(공주시 향토문화유적 유형 제4호)이다. 원산정에 대해 고전번역가 허경진교수는 함양 박씨 일족인 『박혼이 금산전투에서 순국하자, 아들인 진사 박홍립(朴弘立)과 주부 박의립(朴毅立)이 공주에 돌아와 원산정을 세우고, 사계(沙溪)와 추포(秋浦)문하에서 노닐었다. 현재 있는 정자는 1971년에 후손들이 중건, 지소(所)황일호(1588-1641)의 제영이 시판으로 걸려있다. 이규헌과 황한의 중건기, 이규헌, 황한, 박영준, 이원경, 박길래의 원산정 낙성운이 현판으로 걸려 있다.고 정리했다. (충남지역누정문학연구,허경진,2009) 

  작년 가을 탄천여울의 기자단은 원산정에 함께 올라 유래를 공부하고 사진을 찍었다. 당시 정자 뒷쪽의 문화재 안내판을 보니 황일호(1588~1641)가 노래한 원산정과 금강의 풍광에 대한 싯구가 씌여 있었기에 지면으로 옮겨본다. 

                                                          
백로(白鷺)섬이 가까우니, 
명사(明砂)가 처마에 어른거리네.
은밀히 기약하고 우리들이 돌아왔으니, 
속물(俗物)이 다시 누구를 혐의하랴.
달이 뜨자 가을 물결이 멀고, 
구름이 돌아가자 저녁 산이 뾰죽하다.
만약 아름다운 경치를 평하라 한다면, 
허다한 것을 겸해 얻었다 하리
                                                 황일호(1588~1641)

  
  원산정은 이 싯구를 남긴 지소 황일호 뿐 아니라 노닐었던 이 들의 면면이 화려하다. 사계 김장생과 추포 황신을 비롯해 명재 윤증 등 유학자와 관찰사, 인근 고을 수령들이 즐겨 찾았던 공간으로 알려진다.  정자의 후면에는 ‘공산무인수류화개(空山無人水流花開)’라 쓰인 추사 김정희의 현판이 걸려 있기도 하니,  이러저러한 사실들 만으로도 원산정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겠다.     

  원산정의 건립 연대는 확실하지 않다고 알려진다. 박의립의 생몰년을 감안하여 16~17세기 초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할 따름이다.  언제 훼철되었는지에 대한 언급도 찾기 힘들다.  다만 새로 세운 연도는 1971년 봄으로 후손인 박기운(朴基雲)과 박구식(朴九植)이 발의하여 3년 만에 중건 하였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현재까지도 송학리와 유하리에는 함양박씨 박의립의 후손들이 세거하며 번창하여 살고 있다. 이러한 연고로 시대적으로 넉넉하지 못하던 1970년대 초반에도 지금의 원산정이 정성스럽게 중건 될 수 있었으리라... 

  원산정은 탄천면의 자랑꺼리 중 하나다. 충남지역 누정 문화의 대표 정자 중 하나로써,  전하고 있는 싯구와 이야기 그리고 관련 자료 또한 책으로 남아 있어 소중하다. 또한 이 정자를 중건 한 후손들과 더불어 지역 주민들의 삶이 장소적인 정체성을 이루고 있으니 더 그렇다. 무엇보다 앞으로도 항상 정성들여 관리할 든든한 후손과 지자체의 손길이 있으며, 이제 지역 주민들 뿐 아니라 외지인들도 즐겨 찾는 산책의 명소가 되고 있어 현재 진행형인 정자이니 그렇다.
                                                     40여리 청양 금강변 일곱 나루 이야기 
                                                                                                                     복 권 승

1. 놋점나루 ㅡ 청양 어천 석화동과 공주운암리 놋점 경계...  어천상류 - 모덕사와 최익현선생이야기, 그리고 바둑골마을에서의 1박 - 1980년대 도로가 뚫리기 이전의 금강 뱃길 이용한 이 일대 주민들의 삶 이야기.  그리고 이 지역 고유의 금강 물고기잡이 5종 세트.  붉은 흙길과 미리 농다리 - 래산 이야기 

2. 배숙골주막 ㅡ 신흥리. 작은임장골과 배숙골사이, 새로 도로가 나면서 헐린 금강변 마지막 주막(고 유진복님 댁만도 3대 운영)터와 홀로 남아 지키는 느티나무 한그루. 너우기배와 청양지역 금강변 여덟개의 나루들 그리고 구수동의 열녀 이씨 이야기.  반여울나루 

3.반여울나루 ㅡ 화양리와 천내리 : 가마동마을과 간두문-솔뫼롱이 지석묘, 오살뫼 이야기. 과거 치섬장터,서정리9층석탑, 정산향교와 옥거리, 청양지역 동학농민운동 이야기,  .두률윤성 항전의 왜 원병. 신라, 여말왜구, 왜란의병, 동학, 을사-정미의병, 3.1운동을 관통하는 왜와 정산지역의 아이러니역사  

4.닭밭나루 ㅡ 치성천하구습지와 앵봉산 - 봉황을 위한 배려... 대나무와 오동나무 /   천내리 와헌마을의 고지와 마을공동체.  씨족공동체간의 질서를 이야기하는 안.조.림.전.우.윤의 시제순서 이야기. 일사정과 내포제이야기. 여말 선초 두문불출과 금강의 인과관계 

5.창강나루 ㅡ 동강리 래산(올뫼)과 애업은봉 이야기.  잉화달의 속 뜻, 그리고 미륵뎅이와 미당장터 - 윤남석가옥과 박동진선생, 칠갑산 삭쟁이와 갱갱이 새우젓의 만남 이야기. 원천소류지ㅡ이몽학생가와 이몽학의 난 이야기 

6.왕지나루ㅡ  이름이 뒤바뀌어 버린 왕지진과 사비성을 분홍빛 지붕으로 치장했던, 용울음 앞 와요지.  제산선생의 남유록에 쓰인 나루와 몽뢰정 장터 풍경과 조씨 문중이야기. 잉화달과 왕지진의 말 뜻 관계, 왕진리 용왕제, 1953년 7월 7석의 비극, 왕지진장터와 을축홍수 병술홍수, 사라호이야기... 

7.독쟁이나루 ㅡ 부해평들과 명개냇물 똑다리. 미호종개 이야기 - 칠갑산에서 발원한 모든 물들이 만나는 곳, 장수 신무산과 계룡산, 그리고 칠갑산이 만나던 청남 부해평의 왕지강. 천.정.대 앞 한반도에서 황오리가 남하하는 마지막 종착역이던 구양섬(귀양섬) 하중도 이야기

 

몽뢰정은 한양조씨 재각으로 부활했다. 지금의 몽뢰재각 바로 앞에 왕진 나루가 있었다. *사진: 신경섭
왕진 나루를 굽어보고 있는 모시 *사진: 신경섭

 

미당리: 미륵댕이

  ▶ 미륵댕이

'미당리'라는 이름이 '미륵'에서 왔다. 금강으로 흘러드는 잉화달천 중류에 자리잡은 미당리는 큰 비가 내리면 하천 주변 범람원이 물에 잠기는 일이 잦았다. 미륵불에는 불심으로 재해를 이기고자 하는 마을 사람들의 바램이 담겨있다.

 

미당리 석불과 270년 된 팽나무

 

미륵댕이를 찾아 

삼세가 하나의 끈으로 이어져
과거를 소환하면 현세가 되고 
지금을 살펴보면 미답의 길이 열릴까
칠백년 가까이 서 있는 미륵의 얼굴을 찾아 나섰네 

탑신(塔身)을 잃었다고
수침(水沈)의 염려마저 사라진 것은 아니라서
꿩 대신 닭, 대파(代播)*의 비책이 구전으로 
팽나무 삼백 속살에 배겨 있었네 

삼팔일 오일장에 찾아온 
봇짐 등짐 장돌뱅이 흥정 소리 끊겼어도
해마다 제비와 맹매기가 돌아와
알을 낳아 새끼를 치고 
새까맣게 아득히 날아가는 미륵댕이를 찾았네 

시세 따라 떠올랐다 가라앉고
흩어졌다 다시 모인 길에서 
진정 별신의 치성을 준비하며
끊긴 뭐고 새로 이을 것은 무엇인가? 

-
*대파: 기상 이변으로 심으려는 곡식 대신 다른 곡식 씨앗을 뿌리는 일. 동행한 복권승님의 말에 의하면 모내기 철 오랜 가뭄이 지속될 때 애송이 밤을 따 겨드랑이에 넣고 팔을 오므려 따갑거나, 풋대추를 따 콧구멍에 넣는데 커서 안 들어가면 모대신 메밀을 심은 농경의 슬기가 전해 내려온다고 함.

 

잃어버린 미륵불 몸통의 일부로 추정되는 돌 *사진: 신경섭

 

  ▶ 미당장터

일제 강점기에는 미당리 쌀이 버마전선에까지 보내졌다. 또한 주변에 많은 금광들이 번성해서 일제 강점기 이후 매우 마을이 번성했다.
미당리 주변의 금광 *출처: 청양백제문화체험박물관
미용실이 된 이 건물은 영화관이었다.

 

청양 최초의 백화점(?)

 

옛 영화를 보여주는 장터

 

  ▶ 미당리 제비집

제비 보기 힘든 요즘이지만 미당리에는 많다. 제비도 바뀐 세상에 맞춰 초가집 처마 대신에 새로운 집터를 찾았다.
바뀌지 않은 것은 사람들의 '제비 사랑'이다. 가을에 강남에 갔다가 내년에는 박씨를 물어올지도 모른다.
이 정도면 '이로운 새'는 아닌 것 같다.
하지만 가게집 처마에 있다면 얘기가 다르다. 구경하다가 아이스크림 한 개라도 사먹는다면 제비는 훌륭한 홍보요원일 수도 있다. 미당슈퍼에는 위 아래층에 무려 여덟 채나 되는 제비집과 맹매기집이 있다. 아래층에는 제비네가, 윗층에는 맹매기네가 산다.

 

▣ 넉배 고란초와 황새

 

용배에서 넉배까지 

칠갑산자락 대티에서 발원한 물이
꾸불꾸불 휘돌아
금강으로 합류하는 지천 백릿길 중
용배에서 넉배까지는 오릿길 

용배와 넉배의 뱃속엔
금강 건너 내를 거슬러 와 금정의 우물 떠다
고란초 잎새기 띄우고
나룻배에 뉘엿뉘엿 지는 햇살을 싣고 가던 
백제의 유적이 흔적으로 배어 있다 

별빛 아래 어두움을 헤치며 한 배를 탔건만
하룻밤에 논 세 배미를 간다는 달팽이 걸음으로
닷새면 족할 오릿길! 용배에서 넉배까지 
함께 걸으며 오기까지 이십칠년 

영원 앞에 사랑으로 가약한 백릿길이 
실은 물 한방울에서 시작하여 
가도 가도 먼 길(永) 

격하게 흐르다 때로 느릿느릿 
물길 따라 서로를 물되 물리지 않는
용배에서 넉배까지 길이
지천 백릿길 꼬옥 거기에만 있으랴?

 

백제의 한이 서려 있는 넉배 고란초. 벡제 궁녀가 치마폭에 담아와 심어 놓고 백제가 다시 일어설 날을 기다렸다는 전설은 청양이 사비백제 생활권이었음을 말해준다.

 

넉배 고란초 

비단처럼 고왔던 꽃잎은 
벼랑으로 떨어져 강물 따라 흘러갔건만
꽃 같은 넋 가파른 바위 틈에 뿌리내려
다시는 꽃을 피우지 않겠다 맹세하고
풀잎의 홀씨로 살아가네 

백세제민의 높은 뜻 받들어
금정물 퍼 너락 바위 고란초 잎새 띄워
햇빛 담아 반백리를 흥겹게 갔으나
돌이킬 수 없는 소용없는 통한의 아픔
깎아 서러운 맘 풀어보네

 

여름이 되면 넉배에 황새가 찾아온다. *사진: 복권승

 

넉배 변성암을 관입한 석영맥. 이런 지질구조에 금이 들어 있다. 이 근처에서도 금이 발견된 예가 있다. 심지어는 논 가운데에서 노다지가 발견된 일도 있다고 한다.

 

  구봉광산

 

구봉광산 터에서 

열쇠를 잃어버려
돌아서 지나온 길을 되짚어 나섰다 

금을 캐면 시커먼 손금에 한순간 반짝이던
막장 갱도는 풀섶에 닫혔다 

발 없는 말만 천리를 가겠는가?
찾으려 한 것은 시공의 열쇠 

봉인된 시간을 푸는 지금이
두고와, 스쳐갈 먼 길을 여는 문

 

금광 갱구였지만 지금은 잡초가 우거져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다. *사진: 신경섭

 

  용당리 용곡역터

 

화성의 꿈 

글과 그림은 붓끝을 통해 남고
말은 입과 귀로 이어져 전해온다. 

여기가 금정역사 용곡역이요, 손 짚어 증명할 수 없음은 
건축물이나 그림이 남아 있지 않아서고
금정역지라 함은 말과 글이 그리 전해 내려와
위치로 보아 그 자리를 가늠해 추정할 뿐이다 

중요한 것은 자리터만이 아니라
정치와 군사 정보의 기능을 맡은 요충지 역이
여기였다는 사실이다 

지금이야 
궁벽진 곳이 그런 역할을 했을까 의아함이 생기지만,
짚신발과 말발굽, 봉수대가 주요 통신 수단이었던
예전의 눈으로 들여다봐야 한다 

역은 사통팔달의 중요 거점인 행정조직이자
상명하복의 집중과 하의상달의 분권이 만나는 맥점이며
한양을 중심으로 팔도를 이은 길목이다 

다만 을미(1795)년 정조의 뜻으로  
서학으로 궁지에 몰린 좌천된 정약용이,
채제공의 출생지 화성 금정찰방으로 부임한 기록이 있으니 추정컨대
정조와 번암과 다산, 처지가 다른 셋이
금정도를 꼭짓점으로
이상동몽 화성의 꿈을 품은 건 아닐까? 

성안의 성, 성 밖의 성
그 꿈결 같은 꿈길을 풀며 걷다가 
상의사와 다락골줄무덤성지 방향을 두리번거린다 

물은 골을 따라 천이 되고 강이 되어 
수평의 바다에 다다르는데
이내 발길은 어디에 닿을까? 

길 안의 길, 길 밖의 길에서
무한천변에 돌멩이 하나 던지고
물어보는 것이다 



영원한 것은 무엇인가? 

물 위에 떨어진 한 방울 빗물의 길과
수면에 떨어지려는 순간 돌멩이의 물음
무엇인가? 영원(永遠)한 것은? 

도무지 알 수 없는 질문과 답이
그 안에 있다

보령에서 넘어오던 옛길. 마을은 지금도 집촌(集村)을 이루고 있어서 옛 역취락의 자취를 보여준다.

 

조두순묘와 그의 부인 달성서씨 정려 앞에서  *사진: 신경섭

 

터 무늬 있는 이야기 

끝을 헤아릴 수 없는 긴 가뭄에
땅도 농심도 타들어 갈 때
한편으론 기우제를 지내면서
한편으론 ‘비책’을 세웠다 

모를 심어야 할까, 아니면 메밀을 심어야 할까?
밤골에선 애송이 밤을 따
겨드랑이에 넣고 팔을 오므려
따가우면 모를 포기하고 메밀을 심고
참을만하면 며칠 더 기다렸단다
대추골에선 풋대추를 따
콧구멍에 넣었다
쑥 들어가면 기다리고
커서 안 들어가면 메밀을 심었단다 

그러니 모가 제 힘으로 자라는 것이 아니다
모는 밤과 대추와 더불어 자라는 것이다
메밀이 홀로 자라는 것이 아니다
밤과 대추와 감과 자라는 것이다
터무니없는 말이 아니다
오래도록 살아내려온 지신(地神), 터 무늬의 말씀이시다 

뜬금없는 소리로 들릴지 몰라도
뜬 금으로 금맥을 찾아 광산을 개발했듯 
터 무늬 있는 이야기가 미래의 양식(糧食)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