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답사일정: 2022.10.15(토)
10:30 - 옛 금정역터/ 남양면 금정리 - 11:30 까치내 입구(쇠편교) - 12:00 까치내유원지 / 대치면 작천리 - 13:00 점심 / 농부밥상 - 14:00 강연: 청양 마을 만들기/복권승(청양군 주민자치특보) / 청양혁신플랫폼 와유 - 16:00 마무리
▣ 옛 금정역터
▣ 사양(斜陽)이 남양(南陽)이 된 사연
때는 1987년 1월1일 공식적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사양'이라는 어감이 좋지 않아서였다고 한다. 그런데 왜 어감이 좋지 않은 '사양'이라는 이름을 옛사람들은 썼을까? 그 이름은 '사양고개'에서 비롯되었다. 위 사진 설명에 있는 것처럼 위장병을 앓던 의자왕에게 매일같이 금정의 물을 길어서 바쳤는데, 아침에 물을 떠서 산 넘고 강 건너 사비궁에 바치고, 다시 돌아오는 길에 사양고개쯤에서 석양을 만났다고 한다. 그래서 붙여진 이름이 사양고개다.
하지만 행정구역 이름으로는 쓰이지 않다가 일제 강점기 행정구역 개편 때(1914) 면(面) 이름으로 처음 쓰게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청양현의 남쪽에 있어서 '남상면(南上面)과 남하면( 南下面)으로 불렀다. 조선시대 지명의 '남(南)'을 되살리기는 했지만 그때의 '南'은 '南陽'에 들어있는 '햇볕'과는 직접 관련이 없고 단순히 방향만을 뜻했다.
그렇다면 어느쪽이 더 지역의 성격을 잘 반영한 이름일까?
당연히 '사양'이다. 남양이란 이름은 단순히 어감이 좋을 뿐 역사성을 담지는 못한다.
▣ 斜陽의 의미
▶ 백제문화권 청양
'사양'은 먼저 백제 문화권으로서 청양을 이야기할 수 있는 소재이다. 청양에는 고란초가 자라고 백제의 방어선이었던 우산성이 있었다. 지천 하류의 금강 연안은 사비성에 기와 등을 공급하는 가마들이 즐비했고, 왕실의 절이 있어 왕이 이따금 행차를 하기도 했다. '사양'의 근원을 이야기 하다 보면 이 모든 것들이 연결되어 나온다. 사양고개는 백제시대에 매우 중요한 교통로에 있었으며, 사비성의 세력권에 청양이 포함되었음을 알 수 있는 역사적 장소이다.
▶ 산지곡류가 발달한 청양
'사양'에는 청양의 자연 환경이 담겨 있다. 보통 길은 하천을 따라 난다. 기복이 적어서 걷기 좋기 때문이다. 하지만 청양은 다르다. 구불구불 지천을 따라 길이 나기가 어렵다. 금강으로 이어지는 길이 지천을 따라 났다면 아주 먼 길을 돌아가야 한다. 차라리 높은 고개를 넘어 질러 가는 편이 훨씬 낫다. 사양고개가 바로 그런 고개다. 금강으로 흘러드는 지천을 따라 들어 오던 '청양-부여' 길이 사양고개 아래(부여군 은산면 거전리)에 이르면 하천을 버리고 산을 넘는다. '충남의 알프스', 청양다운 길이다. 청양은 산줄기 연속성이 강하고 산지곡류가 발달한다. 아래 지도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거전리-사양치-온직리 길은 산을 넘기는 하지만 거리는 지천을 따라 길이 났을 때보다 훨씬 짧다.
▶ 금이 나는 청양
금으로 유명했던 청양의 독특한 지질구조 이야기로 이어갈 수 있다. 청양의 금은 금정(金井)이라는 이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금정은 의자왕의 위장병을 치료하는 데만 쓰인 것이 아니라 주변에서 많은 금이 났음을 알 수 있는 이름이다. 백제시대 유명한 사금 생산지였으며 그 명성은 내내 끊이지 않았다.
이 일대 사금의 근원은 구봉광산 주변이다. 금 매장지가 금정의 상류에 몰려 있으므로 오래전부터 사금이 냇물을 따라 흘러 내렸을 것이다.
▣ 지천 입구: 쇠편교
▣ 까치내
▣ 까치내 전원마을
▣ 복권승특보 강연
'충청남도 > 청양' 카테고리의 다른 글
드론 영상: 까치내 (0) | 2022.10.19 |
---|---|
청양 번외 편: 청양 사람들과 함께 한 찐 청양 답사 (0) | 2022.08.04 |
정산은 금강유역권 (0) | 2022.06.30 |
까치내(鵲川)와 지천(之川) (0) | 2022.06.29 |
금정도(金井道): 정약용이 찰방이었던 적이 있다 (0) | 2022.06.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