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浦, 津, 渡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Geotopia 2022. 6. 11. 09:57

▣  三浦開港: 浦가 港으로 개방되었다

 

  배가 드나드는 곳을 '항구', 또는 '포구'라고 한다. 어감으로 보면 포구에 비해 항구가 좀 더 규모가 큰 느낌이 든다. 또 포구는 현대적이기 보다는 예스런 느낌이 든다. 사실 조선시대까지는 '항', 또는 '항구'라는 개념이 없었고 구한말  부산, 인천, 원산 등 三浦開港 때 비로소 등장한다. '三浦開港'이라는 낱말이 재미있는데 '浦'와 '港'이 함께 쓰였기 때문이다. 굳이 해석을 하자면 '3개의 포를 항으로 열었다'는 뜻이다. 이전부터 있던 '三浦'가 구한말에 이르러 '港'으로 개방되었다는 뜻으로 해석한다면, 규모가 커지고 다른 나라와 교역하는 기능이 강화된 것을 '港'으로 정의할 수 있다.

 

▣  浦: 해안의 배가 드나드는 곳은 모두 '浦'

  <대동여지도>를 보면 조선시대에 바닷가의 항구는 모두 '浦'였다. '港'은 쓰이기 전이었으며 '津'은 찾아볼 수 없다. 그렇다면 '浦'는 바닷가의 항구를 뜻한다고 볼 수 있다. '浦'의 훈은 '개(강이나 내에 조수가 드나드는 곳)', '물가(물이 있는 곳의 가장자리)', '바닷가' 등이다. 직접 바다와 맞닿은 곳 뿐만 아니라 밀물이 영향을 미치는 하천의 하류 지역도 모두 '浦'에 해당하였다.

 

동해안의 '浦'&nbsp; *<동여도>

 

▣  津: 조수가 미치지 않는 하안(河岸)의 나루

 

  <동여도>에서 낙동강 하안의 나루를 찾아보면 양산 위쪽은 모두 '津'으로 표기되어 있다. 감조권 밖에 해당하는 지역이므로 위에서 살펴본 '浦'와는 성격이 완전히 다르다. 그렇다면 '浦'와 '津'을 조수가 닿는가, 그렇지 않은가로 간단히 일반화 하여 정의할 수 있다.

 

낙동강 중류의 나루&nbsp; *<동여도>

 

▶고대사 연구자들의 구분

  1. 浦: 인위적 시설

  2. 津: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나루터

  고대에는 '浦'가 '江'과 비슷한 의미로 쓰였다. 그러다가 고려 초·중기에 이르면 '江'을 포함하여 주변의 마을까지 포함한 개념으로 쓰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고려말·조선초에 이르면 '배가 닿는 곳'으로 좁혀졌고, 일제 강점기에는 '航口'로 구체화되었다. '포구(浦口)'라는 용어는 조선시대에는 거의 쓰이지 않았으며, 일제 강점기(「朝鮮地誌資料」)이후에 널리 쓰이기 시작하였다.
  대체로 浦는 조수가 닿는 곳을, 津은 조수가 미치지 않는 곳을 뜻한다.  

 

▣  하지만 예외가 너무 많다

 

  이 대목에서 동해안의 유명한 항구인 강릉의  '注文津'과 모래시계 마을 '正東津'이 떠오른다. 틀림없이 바닷가인데 '浦'가 아닌 '津'이 붙었다. 그런데 <대동여지도>에는 '정동진'이 표시되어 있지 않고, 주문진은 하항, 즉 육지 안의 나루로 표시되어 있다. <대동여지도> 계열의 지도인 <동여도>, <청구요람> 등도 마찬가지이다. 그렇다면 문제가 해결이 된다. 예외가 많으면 해석이 복잡해지는 데 다행이다.

 

<동여도>의 주문진은 하항으로 표시되어 있다

 

  ▶ 동해안은 대부분 '津'이다!

 

  그렇다면 다른 지도들은 어떨까? 

  <1872 지방지도(강릉부)>에는 '注文津'이 바닷가에 표시되어 있다. 오기일까? 전국적으로 통일된 제작 지침이 있었던 것이 아니므로 각 군현의 제작자나 화공의 정보력과 수준에 따라 오기되었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그런데 이 지도는 주문진 뿐만 아니라 관내 모든 포구를 '津'으로 표기하고 있다. 문제가 복잡해진다. 그렇다면 다른 군현들은 어떨까? 강릉 인근의 간성, 양양, 삼척 지도에도 똑같이 바닷가에 '津'이 표기되어 있다. 더 남쪽으로 내려가서 경상도로 가도 마찬가지다. 가끔 '浦'가 섞여 있기도 하지만 절대적으로 '津'이 많은 특징은 동해가 거의 끝나는 영일현까지 계속된다. 

 

<1872 지방지도>에는 모두 '津'으로 표기되어 있다. *1872지방지도(간성현)

 

  ▶ 남해에서는 '浦'

 

  장기(長䰇)현에 이르면 '浦'와 '津'이 거의 반반이 되다가 기장(機張)현에 이르면 '浦'로 바뀐다. 보통 해운대를 남해와 동해의 경계라 일컫는다. 그렇다면 대략 동해안에서는 '津'이 주로 쓰였고, 남해에서는 '浦'가 주로 쓰였다는 일반화가 가능하다. 서해안 역시 대부분 '浦'가 쓰였다. 

 

<1872 지방지도(장기현)> 에는 '浦'와 '津'이 섞여 있다.

 

<1872지방지도(기장현)> 모두 '浦'로 표기되어 있다.

 

  위에 쓴 '고대사 연구자들의 정의'를 적용해 본다면 동해안은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나루'가 많았고, 남해부터는 '인위적인 시설'이 많았다는 뜻이다. 조차가 작고 바다가 깊은 동해안은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나루'가 많았을 가능성이 크다. 또한 조수의 영향권으로 설명해본다면 동해안은 거의 조차가 없으므로 '浦'와 '津'이 잘 구별되지 않는다. 즉, 하천을 따라 깊숙하게 밀물이 들어올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큰 하천이 없어서 '津'(고대사 연구자들의 정의에 따른)을 붙일 만한 곳이 거의 없다. 그러니까 동해안의 '津'은 일반적 정의의 '浦'인 셈이다.

 

▣  규칙에 잘 맞는 <대동여지도>

 

  ▶ 감조권 밖의 '浦'도 있다

 

  가까스로 봉합을 할 수 있을까 했지만 안타깝게도 반대의 예도 있다. 한강의 梨浦는 감조권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중류의 여주에 있다. 바닷가에 '津'이 많은 것과 비교하면 내륙의 '浦'는 매우 드물지만 어쨌든 있기는 있는 것이다. 오랜 세월 동안 붙여진 이름이므로 통일된 규칙이 적용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회자되는 원칙은 있었겠지만 강제되는 법이 아니었고, 또 어떤 이유로 한 번 잘못 쓰인 이름은 그대로 굳어지기 십상이다. 

 

한강의 '浦'와 '津'&nbsp; *<경조오부도>

 

  <대동여지도>는 비교적 규칙에 잘 맞는다

 

  <대동여지도>의 <경조오부도>를 보면 한강은 여의도를 기준으로 아래쪽에는 '浦', 위쪽에는 '津'이 있다. 마포가 감조권 경계이므로 그 위쪽은 '津'이 되어야 '규칙'에 맞는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동작진'보다 훨씬 상류에 '두모포'가 있다.

  이건 뭐지?

 서해안은 조차가 커서 바닷물이 영향을 미치는 범위가 수시로 바뀌었고 많이 들어올 때와 조금 들어올 때의 거리 차이도 매우 컸다. 그런 식으로 봉합하는 수밖에 별 도리가 없다. 

  그리고 지도 제작자에 따라 원칙이 다르게 적용된 면도 있었던 듯하다. <대동여지도>는 김정호가 편집을 했으므로 전국적으로 통일적인 규칙을 적용할 수 있었다. 반면에 <1872 지방지도> 처럼 군현별로 제작된 지도들은 통일된 규칙이 적용되기 어려웠다. 아래는 <동여도>와 <1872 지방지도>의 '浦'와 '津' 표기를 비교한 것이다. <동여도>는 모두 '浦'로 표기한 반면에 <1872 지방지도>는 모두 '津'으로 표기했다.

 

<동여도>와 <1872 지방지도>의 '浦'와 '津' 표기 차이: 경상도 영해

 

  두 지도의 제작 연대는 큰 차이가 없다. <1872지방지도>는 1872년 이전의 자료를 수록했으며, <동여도>는 <대동여지도> 의 선행지도로 알려져 있으므로 1861년 이전에 만들어졌다. 자료 수집은 그보다 전에 이루어졌다고 하더라도 두 지도 간의 제작 시기 차이는 많아야 30년, 적으면 15년 정도이다. 그 사이에 표기법이 바뀌었다기 보다는 김정호가 '浦'와 '津'을 규칙적으로 구분하여 붙였을 가능성이 크다.

  또한 <동여도>에는 현장성이 떨어지는 지지자료가 활용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두 지도는 '浦'와 '津'이라는 접미사만 다른 것이 아니라 포구의 이름이 모두 다른 것에서 유추해 볼 수 있다. <1872 지방지도>는 조정의 명에 의해 전국적으로 거의 동시에 만들어졌기 때문에 당시에 실제로 쓰이던 지명이 수록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  유일한 '渡' 벽란도

 

  흔히 나루터 취락을 '渡津취락'이라고 한다. '渡'의 훈이 '건너다'라는 뜻이므로 뜻은 잘 통하는데 이상하게도 '渡'를 붙인 나루는 매우 드물다. 내가 알기로는 '벽란도(碧瀾渡)' 하나 뿐이다. 그런데 벽란도는 강을 건너는 기능보다는 다른 지역과 연결하는 기능, 특히 국제무역항으로 이름을 날렸다. 그러니까 '渡'는 강을 건너는 역할(津)과 함께 교역, 교류 기능(浦)도 함께 했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예성강 연안의 나루들을 보면  벽란도를 중심으로 상류와 하류에 여러 개의 포(浦)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예성강 하류의 포구들 *<대동여지도>

 

▣  금강 연안의 나루로 보는 '浦'와 '津'

 

  금강 하류에는 많은 '개(浦)'가 있다. 부여까지 감조권에 속했으므로 부여에서 하구까지 많은 포구가 있었다. 하지만 금강하류에서도 '浦'만 쓰인 것이 아니라 '浦'와 '津'이 함께 쓰였다. '조수의 영향'만으로 '浦'와 '津'을 구별할 수 없다는 뜻이다. 만들어진 배경(자연적인가 인공적인가), 기능(강을 건너는 기능과 교역 기능) 등이 복합적으로 고려되어야 함을 알 수 있다.

  반면에 감조권 밖의 나루는 예외가 거의 없이 '津'이 쓰였다. 부여 규임진을 시작으로 구암진, 석정진, 왕지진, 반탄진, 검상진, 웅진···

 

 

금강변의 포구들

▣ 감조권에 발달한 河港 부여에서 하구에 이르는 금강의 하류 구간에는 많은 河港이 발달했었다. 이 지역은 금강의 감조권으로 포구가 발달할 수 있는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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