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남도 108

왕진(汪津): 부여와 정산을 연결하던 나루

▣ 금강 연안은 부여권 청양군에서 금강과 닿아 있는 지역은 청남면, 목면이다. 하천 유역으로는 지천, 잉화달천, 치성천, 어천의 하류 지역으로 조선시대에 모두 정산현에 속했다. 이 일대는 전통적 생활권으로 볼 때 부여권으로 분류할 수 있다. 금강이라는 큰 지형 장벽이 있지만 직선 거리로 보면 부여읍이 청양읍 보다 훨씬 가깝다. 강을 건너야 하는 장벽은 그다지 큰 어려움이 되지 못했다. 어려움이 아니었다기 보다는 육로 20여km, 그것도 기복이 만만치 않은 칠갑산 자락을 걷는 것은 배를 타는 것보다 더 큰 장벽이었다고 보는 것이 옳겠다. 강을 건너면 부여읍까지 꽤 먼 거리를 걸어야 했지만 전반적으로 평탄해서 칠갑산 자락에 비해서는 훨씬 쉬운 길이었다. ▣ 금강 연안의 나루들 따라서 이 일대가 부여생활권에 ..

충청남도/청양 2022.06.21

구봉광산: 선캄브리아기 변성암 지대에 매장된 금

▣ 구봉광산: 한 때는 전국 제1의 금 생산지였다. 구봉광산은 일제 강점기인 1911년부터 금을 캐기 시작하여 1926∼1937년 금 2만 5838g, 은 28만 5867g을 생산했다. 해방후인 1949∼1970년에는 금 1,113만 6,100g, 은 33만 1,203g을 생산하면서 번성하였다. 그러나 1967년 매몰 사고 이후 생산이 급격히 줄어 결국 1971년 문을 닫았다. 광산의 영향으로 1970년대에는 남양면 인구가 13,700여명에 이르기도 했다. 구봉광산의 금 매장량은 총 28t 정도로 추정되는데 이전에 생산된 11t을 제외하더라도 17t 정도가 남아 있다는 뜻이다. 실제로 2017년 금광을 다시 개발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있었으나 환경문제 등으로 진행이 멈춘 상태이다. ▶구봉광산 지질은 흑운모..

충청남도/청양 2022.06.16

지질구조와 지형

▣ 지질구조와 지형 및 식생 청양군은 대부분의 지역이 선캄브리아기 변성암 지대이며 일부는 중생대 퇴적층(대동계)이다. 우리나라의 많은 도시들, 특히 충청남도의 도시들이 선캄브리아기 변성암 지대를 관입한 중생대 화강암 지대에 자리를 잡은 것과는 다른 점이다. 화강암 지대는 남동부 금강 연안에 매우 좁게 분포한다. ▶ 충남의 알프스와 협곡 변성암은 화강암에 비해 풍화에 강한 특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주변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은 고지대가 될 수밖에 없었다. 즉, '충남의 알프스'는 지질구조에서 부터 시작된 셈이다. 또한 심층풍화가 잘 이루어지지 않는 변성암의 속성 상 구조선을 따라 좁고 깊게 풍화가 이루어져서 산지곡류와 협곡이 잘 발달한다. 지천(까치내)은 대표적인 산지곡류로 독특한 경관을 형성하고 있다..

충청남도/청양 2022.06.15

청양: 생활권을 가른 충남의 알프스

▣ 작지만 여러 생활권으로 나뉘는 지역 *사례1: 청남면 사람들은 금강 너머 탄천중학교(공주시 탄천면)를 다녔다. *사례2: 운곡면 사람들은 신양천(무한천 상류)을 따라 신양중학교(예산군 신양면)를 다녔다. *사례3: 화성면 사람들은 광천장이나 대천장을 다녔고, 지금도 대천으로 물건을 사러 간다. *사례4: 정산고등학교 통학생 중에는 청양 학생보다 공주 학생이 더 많다. 작은 군이지만 4개의 서로 다른 생활권이 합쳐진 곳이 청양군이다. 대부분은 금강의 지류(지천, 잉화달천, 치성천) 유역에 속하지만 금북정맥을 경계로 무한천(삽교천의 동쪽 지류) 유역에 속하는 지역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좀 더 자세히 들여다 보면 같은 금강 유역에 속하더라도 지류를 가르는 높은 분수계 때문에 교류가 많지 않았던 지역도 ..

충청남도/청양 2022.06.15

금정(金井): 백제의 유산

▣ 역 이름이 금정(金井)이 된 이유 ▶금이 나는 곳이었다 금정역(金井驛)은 남양면 금정리에 있었다. 지금은 역의 자취가 남아 있지 않지만 '금정'은 마을 이름으로 생생하게 남아 있다. '金井'의 금과 우물, 두 가지가 모두 이 마을과 관련이 있다. 우선 이 일대는 예로부터 사금을 많이 채취하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구봉광산을 비롯하여 청양은 금이 많이 매장되어 있고 많은 금을 생산했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사금은 지표로 노출된 금맥이 풍화침식을 받으면서 떨어져 나와 하천을 따라 이동하다가 퇴적된 것이다. 금정리 위쪽에서 지천과 합류하는 봉암천은 구봉광산이 있던 산줄기에서 시작된다. 지질구조와 하천의 흐름을 볼 때 이 일대에 사금이 많이 퇴적되어 있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 백제시대부터 '당금정'이라는 곳..

충청남도/청양 2022.06.10

신흥종교의 메카 신도안

▣ 신흥종교의 메카가 된 원인 1. 고대 이래로 신성한 산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신라의 주요 기도처였으며 중국에 까지 알려져 있었다. 2. 산태극 수태극의 명당으로 조선 왕도 후보지였다. 3. 「擇里志」의 영향. * '계룡산은 오관산보다 웅장하지 못하고, 삼각산보다 수려하지 못하나 래맥이 멀고 골이 싶어 정기를 함축하였다' 하고 ' 그 서쪽에 있는 용연은 매우 깊고 크며 그 물이 넘쳐서 시내가 되는데 이것은 개성에도, 한양에도 없는 것이다'라고 신도안이 풍수지리상의 길지임을 서술하였다. 그 영향인지 맨처음 신도안에 정착한 사람들은 유림이었다. 4. 「鄭鑑錄」 비결에 따르면 조선 왕조 이후 정씨왕국 800년 역사가 시작될 곳이다. * 「鄭鑑錄」의 계룡산 신도 정씨왕국 개국설: 태조의 꿈에 계룡산 산신..

충청남도/계룡 2022.06.02

新都 '안'과 '팟'거리 두마(豆磨)

▣ 신도를 조성할 때 일꾼들이 팥죽을 먹었다? 계룡시는 독립하기 이전에는 논산시 두마면이었다. '豆磨'는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콩을 간다'는 뜻이다. 콩이 많이 났던 지역일까?, 아니면 콩을 갈아서 두부를 많이 만들어 먹었나? 이름을 보면 누구나 이런 생각을 할 것이다. 계룡시에 가면 의문은 아주 쉽게 풀린다. 호남선 계룡역 옆에 서있는 커다란 돌비석에 유래가 잘 적혀있기 때문이다. '팥을 가는 마을'에서 왔다고 한다. 원래 두계리였던 역 주변은 도로명 주소를 지을 때 아예 '팥거리로'가 되었다. 이에 발맞추어 두계리에는 팥죽집도 생겨서 큰 인기를 끌고 있다. 동짓날이나 먹던 귀신 쫓는 죽 팥죽이 이젠 사시사철 먹을 수 있는 지역 특산 음식이 된 것이다. 동짓날 추위에 살짝 솔은 껍데기를 걷어 내어 먹..

충청남도/계룡 2022.06.01

계룡산 장소성의 변화

▣ 鷄龍의 의미 '닭'과 '용'이 합쳐진 말이기도 하지만 '닭의 벼슬을 가진 용'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닭'과 '용'으로 나누어 봐도 의미는 크다. 즉, 닭은 일찍 일어나서 새벽을 알리는 가축으로 시대를 일깨우는 선지자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신라의 계림(鷄林)이 대표적인 예이다. 용은 상서로운 동물임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 전통적으로 고귀한 자, 왕을 상징하는 동물이었다. 이 둘이 합쳐진 '계룡'은 '닭의 벼슬을 가진 용'으로 해석해볼 수 있다. 일찍이 박혁거세 설화에서 알영(閼英)이 계룡의 왼쪽 갈비에서 태어났다. 그러니까 '계룡산'은 새벽을 알리는 선지자와 고귀함을 상징하는 매우 격이 높은 이름이다. ▣ 장소성의 변화 ▶백제시대 국가적 의미로 격상된 계룡산 백제 시대 왕도 웅진의 배후..

충청남도/계룡 2022.05.30

계룡: 신도안에 자리 잡은 3군 본부

▣ 역사적 맥락이 부족한 도시, 그러나 빠르게 만들어진 독특한 지역성 계룡시는 여러 면에서 독특한 지역이다. 우선 역사적으로 어떤 행정 단위와도 일치하지 않는다. 조선시대에는 연산현, 진잠현, 공주목에 조금씩 걸려 있었고, 일제 강점기 이후에는 충청남도 논산군·대덕군에 속해 있었다. 그러다가 최근(1990년 계룡출장소 설치)들어 독립 행정구역의 기틀을 마련하였고, 약 20년 전인 2003년에 이르러서야 독립 행정구역이 된 전형적인 형식지역이다. 따라서 역사적 배경을 바탕으로 하는 지역성을 갖는 지역이라고 보기가 어렵다. 역사적으로 어떤 행정구역에도 속해 있지는 않았으나 비교적 뚜렷한 지역성을 갖는 내포와 비교할만 하다. 내포는 여러가지 문화요소가 공통적으로 분포하고 지리적 경계도 비교적 뚜렷한 하나의 실..

충청남도/계룡 2022.05.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