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흥종교의 메카가 된 원인
1. 고대 이래로 신성한 산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신라의 주요 기도처였으며 중국에 까지 알려져 있었다.
2. 산태극 수태극의 명당으로 조선 왕도 후보지였다.
3. 「擇里志」의 영향.
* '계룡산은 오관산보다 웅장하지 못하고, 삼각산보다 수려하지 못하나 래맥이 멀고 골이 싶어 정기를 함축하였다' 하고 ' 그 서쪽에 있는 용연은 매우 깊고 크며 그 물이 넘쳐서 시내가 되는데 이것은 개성에도, 한양에도 없는 것이다'라고 신도안이 풍수지리상의 길지임을 서술하였다. 그 영향인지 맨처음 신도안에 정착한 사람들은 유림이었다.
4. 「鄭鑑錄」 비결에 따르면 조선 왕조 이후 정씨왕국 800년 역사가 시작될 곳이다.
* 「鄭鑑錄」의 계룡산 신도 정씨왕국 개국설: 태조의 꿈에 계룡산 산신이 나타나서 '계룡산은 정씨 후손의 도읍지고, 이씨의 도읍지는 한양이며, 한양 5백 년 후에는 정씨가 계룡산에 도읍을 한다' 하였다.
5. 정감록의 十勝之地 가운데 하나로 19세기 외세 침입, 일제 강점, 동학전쟁, 탐관오리의 횡포 등 피난, 피세지로 인식되었다.
6. 한국전쟁의 참화를 입지 않았다: 세계일가공회, 새일수도원 등
7. 시천교(1923)가 교당 본부를 세우고 서울에서 옮겨왔다.
8. 정감록의 정도령을 동경하여 자신과 동일시 하는 신흥종교 교주들이 출현하였다.
9. 6.20계획: 위의 사실들과는 성격이 다르지만 관심의 대상이 되게 한 측면으로 보면 영향력이 매우 크다.
▣ 역사적 과정
▶ 儒佛仙三道合一之地
: 帝字峰, 장군봉, 국사봉, 流林里(儒林洞), 南仙里, 佛巖里
▶ 조선 중기 이후 유림 유입
: 풍수 길지를 차지하기 위해 유림들이 들어옴.
▶ 「鄭鑑錄」과 동학
: 양란 이후 도탄에 빠진 백성들 사이에 「鄭鑑錄」이 빠르게 확산되었고 「鄭鑑錄」의 십승지 사상과 신도안 왕도설이 자연스럽게 결합하면서 신도안에 대한 관심이 늘어났다. 조선 후기에 이르면 외세의 침입과 정정 불안으로 더욱 혼란에 빠진 백성들 사이에 동학이 파급되었다. 동학은 조선의 지배 사상이었던 성리학에 대한 실망에서 비롯되었으며, 민중 신앙이었던 불교 역시 희망이 되지 못했고 서학은 낯설었으므로 민중들 사이에 동학에 대한 관심이 늘어났다.
▶ 시천교도의 이주와 신흥종교의 유입
1920년대 시천교(동학)도가 신도안에 들어오면서 점차 신흥종교의 메카가 되기 시작했다. 시천교도가 대거 유입함으로써 작은 신흥 종교들이 정당성을 얻었고 이후 신도안으로 들어오는 흐름이 빠르게 늘어났다. 인구 추계는 기록에 따라 다르나 가장 크게 추정한 인구는 1924년 1,575호, 6,949명이었다(충남남도계룡출장소, 1999).
* 시천교 창시자 이용구. 최시형의 제자로 천도교 발전에 공헌했으나 일진회 등 친일행위로 출교당함. 그후 박형채, 권병덕, 송병준 등과 함께 시천교 창립. 이용구 사망 후 김연국이 이어받아 서울 가회동에서 신도안으로 교당을 옮김. |
▶ 해방 이후
해방 이후에도 이러한 조류는 계속 이어졌다. 1950년대에는 한국전쟁의 영향으로 많은 사람들이 난을 피해 승지를 찾아 흘러 들어와서 1,086호, 5,600명에 달했다. 1970년대에 전성기를 이루어 1975년 현재 124개의 신흥종교가 들어와 있었다(충청남도 계룡출장소, 1992). 신도안에 들어와 있던 신흥 종교 중에는 신도 수가 몇 만 명에 이르는 큰 종교에서부터 열 명이 못되는 아주 작은 종교까지 있었다. 철거 직전이었던 1983년 11월에는 903가구, 인구 4,583명이었다.
▣ 1920년대 신도안 종교촌
가장 먼저 들어온 시천교가 대궐평을 비롯한 신도안의 주요 지역을 장악했기 때문에 시천교 관련 시설이 신도안 종교 경관의 핵심을 이루게 되었고 신도안은 시천교 경관과 비 시천교 경관으로 나뉘게 되었다. 시천교는 대궐터, 중봉, 금계동 등 신도안 전체 범위에 본당·본부, 지부, 전교실, 숙실, 별장 등 많은 수의 시설을 세웠다.
시천교는 신도안의 도참적 성격을 가장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신도안에 들어오자 마자 종교 이름을 상제교로 바꾸었는데 이는 천황봉의 또다른 이름인 상제봉(上帝峰)을 종교 이름으로 활용한 것이다.
시천교는 이후로도 신도안 종교 경관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데 예를 들면 상제교주(동학 3대교주) 김연국은 上帝(天皇)에게 제를 올리는 제단인 천단을 1941년에 천황봉에 세웠으며, 천진교주(동학 4대교주) 김덕경은 계룡산 산신(山神)에게 제를 지내는 제단인 산제단을 1960년에 계룡산에 세웠다.
* 일제 강점기의 미신 타파 운동 1924 동아일보. '주저할 戰전기념일에 평화의 왕을 차져서 정도령은 잇는가 업는가 가을에 싸인 고찰 동학사' 당시 세상에 은밀하게 떠돌던 새 세상에 대한 소문의 진원지, 종교라는 이름으로 온갖 못된 짓을 일삼는 무리들과 그들에게 속아 삶이 파탄지경에 이른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 등으로 묘사됨(조동길, 2004). |
▣ 1960년대 신도안 종교촌 내부 구조
▣ 1970년대 신도안 종교촌
종교촌 발달의 중핵지는 대궐평과 종로터였다. 조선 천도 계획에서 가장 핵심적인 위치였기 때문에 이후 신흥 종교들이 이 지점에 가장 크게 의미를 부여하고 모여들었다.
▣ 1970년대 미신타파 정화운동과 6.20 철거 작전
신도안의 종교적 이미지는 조선 천도 실패 직후부터 시작되었으므로 오랜 역사성을 갖는다. 그러나 1980년대 국가정책에 의해 갑자기 철거되어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교주나 교단에 의한 재산 착취 문제 등을 부각시키면서 유사종교를 단속해야 한다는 것이 철거의 명분 가운데 하나였다. 철거 당시(6.20재개발계획)까지 철거 후 이용 계획이 비밀이었고 '군용지라는 말이 있다'는 정도로 풍문이 돌았다(주경식,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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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 자료
계룡시, 2005, 충청남도 계룡출장소 14년사.
금강문화유산연구원(편), 2018, 이야기로 만나는 계룡산국립공원 문화자원, 국립공원관리공단.
이경호, 1964, 계룡산 신도안과 유사종교, 공주사범대학.
이길구, 1996, 계룡산, 대문사.
이영숙, 2000, 계룡산 신도안 지역의 문화역사지리적 성격, 공주대학교 석사학위논문.
국립공주박물관, 2007, 2007 특별 기획전, 계룡산.
정종수, 2008, 풍수지리로 보는 계룡과 두마, 두마면지, 두마면지편찬위원회
정종수·서헌강, 2003, 계룡산, 대원사.
조동길, 2004, 1920년대 계룡산(4): 계룡산기의 내용과 의미, 웅진문화17.
주경식, 1984, 계룡산 신도안의 지리적 현황, 지리학 29, 대한지리학회.
최원회·성정락, 2019, 계룡산 신도안 종교촌의 내부구조 및 경관 연구, 한국지리학회지 8-2, 한국지리학회.
충청남도계룡출장소, 1992, 계룡소고.
충남남도계룡출장소, 1999, 계룡의 어제와 오늘.
탁명환, 1984, 계룡산 신도안의 변천과 신흥종교: 신도안 일대 전면철거를 중심으로, 향연(1), 전북대학교 철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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