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남도/계룡

계룡산 장소성의 변화

Geotopia 2022. 5. 30. 09:39

▣ 鷄龍의 의미

  '닭'과 '용'이 합쳐진 말이기도 하지만 '닭의 벼슬을 가진 용'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닭'과 '용'으로 나누어 봐도 의미는 크다. 즉, 닭은 일찍 일어나서 새벽을 알리는 가축으로 시대를 일깨우는 선지자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신라의 계림(鷄林)이 대표적인 예이다. 용은 상서로운 동물임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 전통적으로 고귀한 자, 왕을 상징하는 동물이었다. 

  이 둘이 합쳐진 '계룡'은 '닭의 벼슬을 가진 용'으로 해석해볼 수 있다. 일찍이 박혁거세 설화에서 알영(閼英)이 계룡의 왼쪽 갈비에서 태어났다. 그러니까 '계룡산'은 새벽을 알리는 선지자와 고귀함을 상징하는 매우 격이 높은 이름이다. 

 

▣ 장소성의 변화

 

▶백제시대 국가적 의미로 격상된 계룡산

  백제 시대 왕도 웅진의 배후 산지로서 금강과 함께 고구려의 압박으로부터 백제를 지켜주는 방어선이었다. 사비 천도 후에는 신라와의 갈등 관계에서 역시 방어선으로서 의미를 갖게 되었다. 이에 따라 계룡산은 점차 군사적 의미를 넘어 정신적 안식처로서 위상이 높아졌다. 또한 지방에 있던 산에서 수도를 배경으로 하는 국가적 의미의 산으로 격이 올라가게 되었다. 당나라 張楚金의 「翰苑」에 '國(백제)東有鷄藍山'이라는 기록이 있는데 '鷄藍山'은 바로 '鷄龍山'으로 당시 중국에 까지 알려져 있던 명산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통일신라 시대 국가 기도처

  신라가 백제를 점령하고 당나라를 몰아낸 뒤 실질적으로 옛 백제 영역을 통치하게 되었다. 백제 백성들을 위로하여 자신의 통치권에 편입시키기 위해 신라는 백제의 상징이었던 계룡산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였다. 신라는 전국 명산, 대천을 지정하여 大祀, 中祀, 小祀로 나누어 제를 올렸다. 대사는 경주를 비롯한 3곳에서, 중사는 전국의 5개 명산에서, 그리고 소사는 24개의 산에서 이루어졌다. 계룡산은 이중에서 중사를 올리는 5악에 속했다. 5악은 東岳土唅山(大城郡), 南岳智異山(菁州), 西岳鷄龍山(熊川州), 北岳太白山(奈己郡), 父岳公山(押督郡) 등이었다.

 

▶ 고려, 조선시대의 계룡산

  고려시대에도 신라시대의 전통이 유지되었다. 조선초에는 주요 명산대천에 작호를 내렸다. 鎭國公 松嶽서낭, 啓國伯 和寧·安邊·完山서낭, 護國伯 智異山·無等山·錦城山·鷄龍山·紺岳山·三角山·白岳山·晉州서낭 등이었다. 즉, 계룡산은 호국백으로 봉해졌던 산 가운데 하나이다. 호국백으로 계룡산에서 제를 올리던 곳을 中岳壇이라고 하는데 지금의 신원사 경내에 있는 중악단이 조선시대 제를 올리던 그 중악단과 같은 것으로 보고 있다. 新元寺는 조선 후기까지 神院寺였다. 즉, '산신에 제를 올리는 곳'이라는 뜻을 담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신원사 가람 배치를 보면 전체적으로 남향으로 배치되어 있지만 중악단만은 남서향으로 자리를 잡고 있다. 동북쪽에 있는 계룡산 천황봉을 중심으로 볼 때 제를 올리는 정확한 방향이다. 

 

신원사 *카카오맵

 

▶불교문화의 성지

  계룡산은 백제 시대 이후로 불사가 만들어지기 시작하여 신라 시대에 들어서면서 불교적 장소로 부각되기 시작하였다. 동서남북에 큰 절이 하나씩 있는데 남쪽에 신원사, 북쪽에 구룡사, 동쪽에 동학사, 서쪽에 갑사이다. 신원사는 651년(의자왕11), 갑사는 420년(전지왕16), 동학사는 724년(성덕왕 23)에 각각 창건되었다고 전한다. 북쪽의 구룡사는 조선 초기에 폐사되어 터만 남아 있는데 창건된 시기는 대략 백제말에서 통일신라 초기로 보고 있다. 이들은 수많은 암자들을 거느리고 있는데 그 수가 16개에 이른다. 

 

계룡산 4대 절  *Google earth

 

▶ 신흥종교의 메카

  조선 왕조의 신도로 정해졌다가 갑자기 취소된 경험은 신도안을 특별한 장소로 만들었다. 단지 성리학적 가치관에 바탕을 둔 통치행위였다면 아마도 다른 결과가 나왔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수도로 정해지고, 또 취소되는 과정에 풍수 사상이 개입하면서 구구한 추측과 해석이 난무하게 되었다. 본시 풍수라는 것이 논리체계상 모순이 적지 않기 때문에 나올 수 밖에 없는 현상이었다. 예를 들면 '5백년 도읍지'라는 규정은 地氣가 변하지 않음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그러나 裨補는 지기가 변할 수 있음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같은 땅을 두고도 이런 반대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에 신도를 놓고 다양한 해석이 이루어진 것은 당연한 현상이다. 

  조선 시대 내내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오던 '신도 전설'이 난세를 만나고, 또 「정감록」과 결합이 되면서 확대 재생산되었고, 시천교의 입주라는 실행 사례를 만나면서 촉발되었다. 1984년 강제적인 제재로 신흥종교들이 신도안을 쫓겨나기 전까지 신도안은 수많은 신흥종교의 메카가 되기 충분했다.

 

▶ 군사 중심

  '6.20작전'으로 알려진 신도안 철거 계획은 당시 반 비밀리에 진행되었다. 철거 계획은 공개된 계획이었지만 철거 이후에 그 땅에 무엇을 할 것인지는 알려지지 않았었기 때문이다(탁명환, 1984). 당연히 어떤 배경으로 3군 본부가 신도안으로 이동하게 되었는지 정확한 이유를 알기는 쉽지 않다. 멀리 떨어져 있던 3군 본부를 한데 모아서 작전의 효율성을 높이고자 했다는 당국의 발표가 우리가 알 수 있는 전부이다. 어쨌든 그로 인해서 계룡시라는 독특한 도시가 탄생했고, 우리 나라의 어떤 지역과도 비교할 수 없는 독자적인 발전을 해왔다. 

 

지역으로서의 계룡시

 

   그러나 아쉬움도 있다. 이유야 어쨌든 3군 본부가 신도안으로 이전함으로써 독특한 우리 문화의 한 토막이 완전히 사라졌다는 아쉬움이다. 1984년 당시 소위 '유사종교' 문제가 사회적으로 심각한 문제였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역사적 현장이 통째로 사라졌음은 물론, 시간이 지난 오늘날 답사 조차도 마음대로 할 수가 없게 되었다. 문화역사지리에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으로서 답사가 불가능하다는 점은 치명적이다. 당국의 허락을 받고서야 겨우 볼 수 있는 주초석도 사실 보나마나다. 도수희교수의 지적처럼(도수희, 2009) 흩어져 있던 주초석을 한 곳에 모아놓은 것에 지나지 않으므로 역사를 되돌아 보는 의미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룡시와 신도안은 여전히 의미있는 장소이다. 또한 하나의 지역으로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다른 지역과 구별되는 독특한 특성'을 지역성이라고 하고, 지역성을 갖는 공간을 우리는 '지역'이라고 하므로, 계룡시는 군사 중심이 됨으로써 하나의 독특한 지역을 이루게 되었다. 지리학도로서 충분히 관심을 가질만한 지역이 된 것이다. 

 

*참고자료: 도수희, 2009, 신도안과 팟거리에 대하여, 지명학(15), 한국지명학회.

              이영숙, 2001, 계룡산 신도안 지역의 문화역사지리적 성격, 공주대학교 석사학위논문.

              탁명환, 1984, 계룡산 신도안의 변천과 신흥종교, 향연(1), 전북대학교 철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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