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남도/계룡

新都 '안'과 '팟'거리 두마(豆磨)

Geotopia 2022. 6. 1. 20:19

▣ 신도를 조성할 때 일꾼들이 팥죽을 먹었다?

 

  계룡시는 독립하기 이전에는 논산시 두마면이었다. '豆磨'는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콩을 간다'는 뜻이다. 콩이 많이 났던 지역일까?, 아니면 콩을 갈아서 두부를 많이 만들어 먹었나? 이름을 보면 누구나 이런 생각을 할 것이다. 계룡시에 가면 의문은 아주 쉽게 풀린다. 호남선 계룡역 옆에 서있는 커다란 돌비석에 유래가 잘 적혀있기 때문이다. '팥을 가는 마을'에서 왔다고 한다. 원래 두계리였던 역 주변은 도로명 주소를 지을 때 아예 '팥거리로'가 되었다. 이에 발맞추어 두계리에는 팥죽집도 생겨서 큰 인기를 끌고 있다. 동짓날이나 먹던 귀신 쫓는 죽 팥죽이 이젠 사시사철 먹을 수 있는 지역 특산 음식이 된 것이다. 동짓날 추위에 살짝 솔은 껍데기를 걷어 내어 먹고, 숨어있는 새알심을 찾아 먹던 그 맛은 생각만 해도 입에 침이 가득 고인다. 

 

팥거리 유래비

  팥거리는 조선초 태조 이성계가 신도안에 궁궐을 축조할 때 공사에 동원된 인부들에게 팥죽을 팔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곳 두계리 일원이 콩, 팥, 녹두 재배가 잘 되어 팥두(豆), 마을촌(村)을 써서 팥거리(豆溪)로 이 지역 전체를 팥갈이(豆磨)라 부르고 있으며, 현재 행정 구역으로는 계룡시 두마면 두계리에 속한다. 오늘날 새마을운동 계룡시지회가 중심이 되어 매년 10월 팥거리의 뜻을 기리기 위해 팥죽을 나눠 먹으며 축제를 개최하고 있으며 이 지역에 대한 유래를 모두에게 알리고자 한다.

 

콩쥐팥쥐의 팥죽

  논리가 그럴싸하다. 신도를 건설하기 위한 공사를 별였던 역사가 분명히 있었으므로 거기서 시작되는 이야기는 꽤 튼튼한 역사적 근거도 있어 보인다. '공사에 동원된 수많은 인부들에게 팥죽을 쑤어 먹이기 위해서 온 마을이 팥을 갈았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집집마다 맷돌 돌리는 소리가 온 동네에 가득한 것만 같은 상상이 떠오른다. 

 

  하지만 전혀 다른 분석도 있다. 동네에서 전해지는 이야기가 아니고 지명연구학자 도수희교수의 주장이다(도수희, 2009). 도수희교수의 주장을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 공식명칭은 신도(新都)

 

  '豆磨'를 풀기 위해서는 먼저 '신도안'을 풀어야 한다.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초기 기록들은 한결같이 '新都'로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지금 전하는 이름은 '신도안'이다. 그렇다면 언제, 무슨 이유로 '신도'가 '신도안'이라는 지명으로 바뀌었을까?  

  「조선왕조실록」뿐만 아니라 「동국여지승람」(1481년)에서도 이곳의 공식 명칭은 '新都(섀셔블)'였고 이는 조선 후기까지도 변함이 없었다. 즉, 조선시대 내내 공식 기록에는 '新都'로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신도안'이라는 이름은 공식 명칭이 아니라 세간에서 쓰이던 비공식 명칭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언제부터 '신도안'이 쓰였을까? 이 문제를 푸는 것은 곧 '팥거리'에 대한 올바른 해석과 연결된다.

  그런데 그것에 앞서서 '신도안'의 '안'이 어떤 의미인지를 먼저 알아볼 필요가 있다. 긴 세월이 지나면서 '신도안'이라는 이름에 대한 여러가지 해석이 이뤄졌고, 그 과정에서 풍수도참적 해석이 덧씌워졌다. 

 

▣ '신도안'에서 '안'의 뜻

 

▶ '안'에 대한 잘못된 해석 사례(정종수,  1994)
 1.新都안 : 아니다(否)
   -새 도읍이 되려다 말았다.
   -정감록에서 예언한 그 도읍이 아니다.
 2.神都案: 신흥 종교의 중심
   -장차 지상천국의 수도 예정지이다.

 

  신도안의 '안'의 뜻으로 위의 두 가지가 널리 퍼진 대표적인 예이다. 그러나 이는 옳지 못한 해석이다. 신도안이 풍수도참적으로 해석되면서 의미가 덧씌워진 결과이다. '안'은 새로 만든 도읍지, 즉, 성의 안쪽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굳이 한자로 표기하자면 '新都內'로 표기하는 것이다. 

 

▣ 팥거리

 

  '팥거리'는 '신도안'과 대를 이루는 낱말이다. 즉, 새로 만들어진 도읍(新都)의 '안팎'의 개념으로, "신도'안' - 신도'밖'거리"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원래 두마면 일대는 고려시대 廣炤部曲이었다. 이 지명은 조선초기까지 유지되었다(「세종실록지리지」1424). 그런데 60여 년이 지난 후 '豆磨'로 바뀌었다(「동국여지승람」1481). 신도가 조성될 무렵에 등장한 '안팎'의 개념이 지명으로 바뀌지 않은 채 세간에 널리 쓰이고 있다가 부곡이 면으로 바뀌는 대목에서 '성문밖 거리'라는 뜻으로 바뀐 것이다.

  이때 한글이 한자로 표기되는 과정에서 훈음차 되어 표기되었다. '팟거리(>팎거리/밖거리)'의 '팟'은 훈차되어 '豆'가 되었고 '거리'는 훈음차 되어 '磨'가 되었다.

  따라서 신도안의 '안'도 '성 안', 또는 '문 안'이라는 뜻으로 '두마(성 밖/문 밖)'와 대조를 이루면서 정착되었다고 추정해 볼 수 있다. 즉, 신도안이 정착된 시기도 두마가 정착된 시기와 마찬가지로 15세기 경이라고 볼 수 있다.

  '豆溪'는 '팥 마을'로 해석하기도 하지만 단순히 '두마계(豆磨)'를 줄인 말이다. 

  이와같은 사실로 비춰본다면 '두마 팥죽'은 역사적 근거가 없는 문화로 한자를 도식적으로 해석하면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일대가 팥이 많이 날 수 있는 조건을 특별히 가지고 있었다는 증거는 없다. 팥은 환경 적응력이 강한 작물이어서 특별히 잘 자라는 토질이나 기후조건을 꼽기 어렵다. 이 일대는 하천에 가깝고 산지가 높지 않기 때문에 벼를 비롯한 곡물 농사가 잘 되는 곳이므로 구황작물로 팥을 많이 키울 이유도 없었다. 귀신을 쫓는 의미가 있으므로 후에 신도안에 신흥종교가 밀려 들어오면서 혹시 수요가 늘어났을 수도 있다. 따라서 그 시기를 신도 조성 당시로 끌어올리는 것은 논리성이 떨어진다. 

 

 

*참고 자료

도수희, 2009, '신도안'(新都內)와 '팟거리'(豆磨)에 대하여, 지명학15, 한국지명학회.

정종수, 1994, 계룡산의 도참·풍수지리적 고찰, 계룡산지, 충청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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