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 이름이 금정(金井)이 된 이유
▶금이 나는 곳이었다
금정역(金井驛)은 남양면 금정리에 있었다. 지금은 역의 자취가 남아 있지 않지만 '금정'은 마을 이름으로 생생하게 남아 있다. '金井'의 금과 우물, 두 가지가 모두 이 마을과 관련이 있다.
우선 이 일대는 예로부터 사금을 많이 채취하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구봉광산을 비롯하여 청양은 금이 많이 매장되어 있고 많은 금을 생산했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사금은 지표로 노출된 금맥이 풍화침식을 받으면서 떨어져 나와 하천을 따라 이동하다가 퇴적된 것이다. 금정리 위쪽에서 지천과 합류하는 봉암천은 구봉광산이 있던 산줄기에서 시작된다. 지질구조와 하천의 흐름을 볼 때 이 일대에 사금이 많이 퇴적되어 있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 백제시대부터 '당금정'이라는 곳에서 사금을 채취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이러한 조건들을 볼 때 백제시대에 이 일대는 왕실에 필요한 금을 공급하는 곳이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그곳에 있던 우물에서 물을 길어서 의자왕에게 바쳤다
한편, 의자왕은 재위 15년이 지나면서 위장병을 얻어 큰 고생을 했다고 한다. 왕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좋은 물을 떠다 바쳤는데 바로 이곳의 우물이 이름난 우물 가운데 하나였다. 금이 나는 곳에 있는 우물이어서 '금정'이라고 불렀다. 「호서읍지」에 따르면 '옛 금정역에서 금이 나는 샘이 있는데 깊고, 맑고, 차가워서 왕에게 바쳐졌고, 이로 인해 우관(郵館)이 설치되었다. 금정은 여기에서 비롯된 이름이며 노인들이 말하기를 옛 금정역은 청양에서 부여에 이르는 별천(鱉川)의 오른쪽, 鱉山 아래에 있었다고 전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별천과 별산은 옛 지도에서 확인할 수는 없다. 하지만 별천은 마을 앞의 지천을 뜻할 것이고, 금정으로 내려오는 산줄기를 추적해 올라가면 구봉산이 나온다.
<1872 지방지도(청양현)>에도 '금정의 물을 의자왕에게 바쳤다고 전해 내려온다'고 쓰여있다.
▣ 금정 우물에서 물을 길어서 나르던 길은 어디였을까?
왕궁의 관리와 동네 사람들이 매일 금정의 물을 떠서 사비성까지 날랐다고 한다. 아침에 물을 길어서 사비성까지 갔다가 돌아오려면 꼬박 하루가 걸렸다. 큰 고개를 하나 넘어야 하는데 그 고개를 넘다보면 뉘엿뉘엿 해가 저물었다고 하여 해가 저무는 고개, 곧 사양(斜陽)고개라고 불렀다. 사양고개는 부여 은산에서 청양 남양으로 넘는 여러 고개 가운데 하나이다. 일제 강점기 이후 1987년까지 남양면은 사양면이었는데 그 이름도 이 사양티에서 왔을 것이다.
그렇다면 사양티는 어디였을까?
<대동여지도>에는 부여에서 청양에 이르는 길에는 유일하게 '나팔치(羅叭峙)'가 표시되어 있다. <1872지방지도(청양현)>, <해동지도>, <팔도지도> 등에도 나팔치가 표시되어 있다. 그렇다면 '나팔치'가 '사양치'일까? 오늘날 지형도에는 청양 남양과 부여 은산을 잇는 29번 국도에 '나발티'가 표시되어 있다.
그리고 남양면 온암리에서 은산면 나령리를 넘는 고개도 있다. 동네 사람들은 이 고개를 원태비고개라고 하는데 지도에는 매치고개로 나와 있다.
'나발티, 또는 매치, 원태비고개가 사양티다'라고 결론을 지어버리면 좋으련만 안타깝게도 모두 '사양티'와는 어감이 너무 멀다. 다행스럽게도 일제강점기 지형도(1918)에는 사양티가 따로 표시되어 있다. 지천 연안인 은산면 거전리와 남양면 온직리가 연결되는 길이다. 해발고도가 250m에 다달아 다른 고개보다 높다. 그래서 근대 교통로가 지나지 못하고 쇠퇴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에는 사람들이 넘나들던 고개였던 모양이다. 왜냐하면 사비성에서 금강을 건넌 다음 지천을 따라 올라오다가 지천이 크게 곡류하기 시작할 무렵에 하천 연안을 떠나 산을 가로지르면 거리가 셋 중에서 가장 가깝기 때문이다.
▣ 지금도 쓰이고 있는 금정
지금도 금정은 동네 사람들의 식수와 농업용수로 쓰이고 있다. 그런데 이 유서깊은 우물이 여느 집 뒤란에 숨겨져 있다. 남의 집 안으로 들어가는 것만 같아서 영 신경이 쓰인다. 꽁꽁 보호 시설로 둘러싸놓고 구경만 하는 것 보다는 마시고, 농사짓는 데 쓰는 것이 1500여년의 역사를 더 실감하는 방법일 수도 있다. 그래도 좀더 주변 경관과 위생에 신경을 쓰면 좋겠다.
▣ 군량리 넉배의 고란초
금정리에서 북쪽으로 3.5km, 지천 상류에 넉배라는 바위가 있다. 군량리 마을앞에 있는 이 넉배바위 위에는 백제의 한이 서린 고란초가 무성하게 자라고 있다. 백제가 멸망한 뒤 한 궁녀가 이곳으로 피난을 오면서 고란초를 치마폭에 싸 가지고 와서 넉배에 심고 나라를 되찾을 날을 기다리며 살다가 꿈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는 전설이 전한다. 금정 우물과 넉배의 고란초는 묘하게 서로 어울리며 이 일대가 사비성의 영향권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넉배'와 '용배'는 청양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바위로 용배는 청양읍의 북쪽 끝인 우산성 기슭에 있고, 넉배는 청양읍의 남쪽 끝 구봉산 자락에 있다.
▣ 지천 유역은 백제권
청양의 진산인 우산에는 백제시대 때 만들어진 우산성이 있다. 사비성을 방어하는 데 중요한 북쪽 방어선이었을 것이다. 청양군에는 우산성 뿐만 아니라 백제시대에 만들어진 성이 여러 곳에 있다.
청양읍 남쪽에 있는 넉배에 고란초가 자라는 것도 예사롭지 않다. 전설은 전설일 뿐이지만 백제와 직접 연결된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있다. 금정 일대가 백제의 금 공급처였던 점이나, 의자왕에게 매일같이 물을 바쳤다는 사실도 이 일대가 사비의 직접적인 영향권이었음을 나타낸다.
금강 연안에서는 많은 백제시대 가마터가 발견되었다. 기와, 벽돌, 그릇 등을 만들어 금강을 이용하여 사비, 또는 웅진으로 운반했다는 뜻이다.
오늘날 부여 생활권에 포함되는 지역은 청남, 장평 등 금강 연안 지역뿐이지만 백제시대에는 지천의 중상류 지역까지 그 직접적인 영향권에 들어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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