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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질구조와 지형

▣ 지질구조와 지형 및 식생 청양군은 대부분의 지역이 선캄브리아기 변성암 지대이며 일부는 중생대 퇴적층(대동계)이다. 우리나라의 많은 도시들, 특히 충청남도의 도시들이 선캄브리아기 변성암 지대를 관입한 중생대 화강암 지대에 자리를 잡은 것과는 다른 점이다. 화강암 지대는 남동부 금강 연안에 매우 좁게 분포한다. ▶ 충남의 알프스와 협곡 변성암은 화강암에 비해 풍화에 강한 특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주변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은 고지대가 될 수밖에 없었다. 즉, '충남의 알프스'는 지질구조에서 부터 시작된 셈이다. 또한 심층풍화가 잘 이루어지지 않는 변성암의 속성 상 구조선을 따라 좁고 깊게 풍화가 이루어져서 산지곡류와 협곡이 잘 발달한다. 지천(까치내)은 대표적인 산지곡류로 독특한 경관을 형성하고 있다..

충청남도/청양 2022.06.15

청양: 생활권을 가른 충남의 알프스

▣ 작지만 여러 생활권으로 나뉘는 지역   *사례1: 청남면 사람들은 금강 너머 탄천중학교(공주시 탄천면)를 다녔다.  *사례2: 운곡면 사람들은 신양천(무한천 상류)을 따라 신양중학교(예산군 신양면)를 다녔다.  *사례3: 화성면 사람들은 광천장이나 대천장을 다녔고, 지금도 대천으로 물건을 사러 간다.  *사례4: 정산고등학교 통학생 중에는 청양 학생보다 공주 학생이 더 많다.    작은 군이지만 4개의 서로 다른 생활권이 합쳐진 곳이 청양군이다. 대부분은 금강의 지류(지천, 잉화달천, 치성천) 유역에 속하지만 금북정맥을 경계로 무한천(삽교천의 동쪽 지류) 유역에 속하는 지역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좀 더 자세히 들여다 보면 같은 금강 유역에 속하더라도 지류를 가르는 높은 분수계 때문에 교류가 많지 ..

충청남도/청양 2022.06.15

浦, 津, 渡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 三浦開港: 浦가 港으로 개방되었다 배가 드나드는 곳을 '항구', 또는 '포구'라고 한다. 어감으로 보면 포구에 비해 항구가 좀 더 규모가 큰 느낌이 든다. 또 포구는 현대적이기 보다는 예스런 느낌이 든다. 사실 조선시대까지는 '항', 또는 '항구'라는 개념이 없었고 구한말 부산, 인천, 원산 등 三浦開港 때 비로소 등장한다. '三浦開港'이라는 낱말이 재미있는데 '浦'와 '港'이 함께 쓰였기 때문이다. 굳이 해석을 하자면 '3개의 포를 항으로 열었다'는 뜻이다. 이전부터 있던 '三浦'가 구한말에 이르러 '港'으로 개방되었다는 뜻으로 해석한다면, 규모가 커지고 다른 나라와 교역하는 기능이 강화된 것을 '港'으로 정의할 수 있다. ▣ 浦: 해안의 배가 드나드는 곳은 모두 '浦' 를 보면 조선시대에 바닷가의..

금정(金井): 백제의 유산

▣ 역 이름이 금정(金井)이 된 이유 ▶금이 나는 곳이었다 금정역(金井驛)은 남양면 금정리에 있었다. 지금은 역의 자취가 남아 있지 않지만 '금정'은 마을 이름으로 생생하게 남아 있다. '金井'의 금과 우물, 두 가지가 모두 이 마을과 관련이 있다. 우선 이 일대는 예로부터 사금을 많이 채취하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구봉광산을 비롯하여 청양은 금이 많이 매장되어 있고 많은 금을 생산했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사금은 지표로 노출된 금맥이 풍화침식을 받으면서 떨어져 나와 하천을 따라 이동하다가 퇴적된 것이다. 금정리 위쪽에서 지천과 합류하는 봉암천은 구봉광산이 있던 산줄기에서 시작된다. 지질구조와 하천의 흐름을 볼 때 이 일대에 사금이 많이 퇴적되어 있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 백제시대부터 '당금정'이라는 곳..

충청남도/청양 2022.06.10

신흥종교의 메카 신도안

▣ 신흥종교의 메카가 된 원인 1. 고대 이래로 신성한 산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신라의 주요 기도처였으며 중국에 까지 알려져 있었다. 2. 산태극 수태극의 명당으로 조선 왕도 후보지였다. 3. 「擇里志」의 영향. * '계룡산은 오관산보다 웅장하지 못하고, 삼각산보다 수려하지 못하나 래맥이 멀고 골이 싶어 정기를 함축하였다' 하고 ' 그 서쪽에 있는 용연은 매우 깊고 크며 그 물이 넘쳐서 시내가 되는데 이것은 개성에도, 한양에도 없는 것이다'라고 신도안이 풍수지리상의 길지임을 서술하였다. 그 영향인지 맨처음 신도안에 정착한 사람들은 유림이었다. 4. 「鄭鑑錄」 비결에 따르면 조선 왕조 이후 정씨왕국 800년 역사가 시작될 곳이다. * 「鄭鑑錄」의 계룡산 신도 정씨왕국 개국설: 태조의 꿈에 계룡산 산신..

충청남도/계룡 2022.06.02

新都 '안'과 '팟'거리 두마(豆磨)

▣ 신도를 조성할 때 일꾼들이 팥죽을 먹었다? 계룡시는 독립하기 이전에는 논산시 두마면이었다. '豆磨'는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콩을 간다'는 뜻이다. 콩이 많이 났던 지역일까?, 아니면 콩을 갈아서 두부를 많이 만들어 먹었나? 이름을 보면 누구나 이런 생각을 할 것이다. 계룡시에 가면 의문은 아주 쉽게 풀린다. 호남선 계룡역 옆에 서있는 커다란 돌비석에 유래가 잘 적혀있기 때문이다. '팥을 가는 마을'에서 왔다고 한다. 원래 두계리였던 역 주변은 도로명 주소를 지을 때 아예 '팥거리로'가 되었다. 이에 발맞추어 두계리에는 팥죽집도 생겨서 큰 인기를 끌고 있다. 동짓날이나 먹던 귀신 쫓는 죽 팥죽이 이젠 사시사철 먹을 수 있는 지역 특산 음식이 된 것이다. 동짓날 추위에 살짝 솔은 껍데기를 걷어 내어 먹..

충청남도/계룡 2022.06.01

계룡산 장소성의 변화

▣ 鷄龍의 의미 '닭'과 '용'이 합쳐진 말이기도 하지만 '닭의 벼슬을 가진 용'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닭'과 '용'으로 나누어 봐도 의미는 크다. 즉, 닭은 일찍 일어나서 새벽을 알리는 가축으로 시대를 일깨우는 선지자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신라의 계림(鷄林)이 대표적인 예이다. 용은 상서로운 동물임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 전통적으로 고귀한 자, 왕을 상징하는 동물이었다. 이 둘이 합쳐진 '계룡'은 '닭의 벼슬을 가진 용'으로 해석해볼 수 있다. 일찍이 박혁거세 설화에서 알영(閼英)이 계룡의 왼쪽 갈비에서 태어났다. 그러니까 '계룡산'은 새벽을 알리는 선지자와 고귀함을 상징하는 매우 격이 높은 이름이다. ▣ 장소성의 변화 ▶백제시대 국가적 의미로 격상된 계룡산 백제 시대 왕도 웅진의 배후..

충청남도/계룡 2022.05.30

계룡: 신도안에 자리 잡은 3군 본부

▣ 역사적 맥락이 부족한 도시, 그러나 빠르게 만들어진 독특한 지역성 계룡시는 여러 면에서 독특한 지역이다. 우선 역사적으로 어떤 행정 단위와도 일치하지 않는다. 조선시대에는 연산현, 진잠현, 공주목에 조금씩 걸려 있었고, 일제 강점기 이후에는 충청남도 논산군·대덕군에 속해 있었다. 그러다가 최근(1990년 계룡출장소 설치)들어 독립 행정구역의 기틀을 마련하였고, 약 20년 전인 2003년에 이르러서야 독립 행정구역이 된 전형적인 형식지역이다. 따라서 역사적 배경을 바탕으로 하는 지역성을 갖는 지역이라고 보기가 어렵다. 역사적으로 어떤 행정구역에도 속해 있지는 않았으나 비교적 뚜렷한 지역성을 갖는 내포와 비교할만 하다. 내포는 여러가지 문화요소가 공통적으로 분포하고 지리적 경계도 비교적 뚜렷한 하나의 실..

충청남도/계룡 2022.05.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