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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산은 금강유역권

▣ 세 개의 하천 유역이 합쳐진 정산현 조선시대 정산현은 지금의 정산면, 목면, 청남면, 장평면을 포괄했다. 이 범위는 잉화달천, 치성천, 본의천 등 세개의 하천 유역으로 다시 나뉜다(행정 경계가 하천 유역권과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는다). 청양읍이 모두 하나의 하천(지천) 유역으로 묶이는 것과는 많이 다른 모양이다. 이 세 개의 하천은 모두 금강과 수직 방향으로 흐른다. 따라서 서로 평행한 형태를 보인다. 그러나 유역을 나누는 산지가 높지 않아서 교류의 장벽으로 작용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하천 유역권으로 묶이지 않기 때문에 각 하천 유역들은 소규모 생활권으로 나뉠 수 있다. 예를 들면 잉화달천 유역은 부여생활권으로 연결되는 반면, 치성천과 본의천 유역은 공주생활권에 포함된다. ▣ 금강유..

충청남도/청양 2022.06.30

천진교 대성전

청양군 장평면 낙지리 1984년 '신도안 재개발사업'으로 신도안에서 이전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20년대 신도안으로 이주한 뒤 교세를 안정되게 유지했으나 6.20작전으로 일컬어지는 신도안 재개발 사업으로 강제 이주를 당한 이후로 교세가 계속 축소되고 있다. 당시 청양에 천진교 교도가 많이 살고 있었기 때문에 청양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낙지리로 30여 가구가 이주, 정착했으나 지금은 2가구만이 남았다. 전국적으로도 교세가 많이 축소되어 30여 가구만이 남아서 겨우 명맥만 유지하고 있는 형편이라고 한다. 대성전에는 1명이 상주하면서 대성전을 관리하고 있다. 회당 건축 등을 추진하고 있지만 자금이 부족하여 신도의 노력 봉사로 근근히 진행하고 있는 형편이라고 전한다. 일요일에는 정기 예배를 보지만 10여 ..

인문지리/종교 2022.06.30

까치내(鵲川)와 지천(之川)

▣ 까치내, 지천, 금강천 ▶ 군내 대부분의 지역을 아우르는 하천 청양군을 대표하는 냇물은 '지천(之川)'이다. 칠갑산지 서쪽에서 발원하여 청양 읍내를 지나 남양면-대치면-장평면을 두루 지나서 하류에서는 부여군 은산면과 경계를 이루며 흐르다가 청남면 인양리에서 금강과 만난다. 그러니까 지천은 금북정맥 북쪽의 화성면, 비봉면, 운곡면 일부, 그리고 치성천 유역의 정산면과 어천 유역의 목면을 제외하고는 청양읍, 남양면, 대치면, 장평면, 청남면(일부) 등을 아우르는 청양의 대표 하천이다. ▶ 칠갑산지 서쪽에서 시작되는 지천 지천은 금북정맥에서 갈라진 칠갑산 줄기의 서쪽 사면(대치면 형산리)에서 발원하여 서쪽으로 흐르면서 횡천, 농소천과 만나고 이어 위라천을 만나면서 남쪽으로 흐르다가 청양읍에 도달한다. ▶ ..

충청남도/청양 2022.06.29

금정도(金井道): 정약용이 찰방이었던 적이 있다

▣ 충청도의 역도 조선의 역로 체계는 고려시대 제도를 이어받았으나 1462년(세조 8)에 이르러 역의 신설과 이설 및 통합에 따라 재정비 되었다. 1462년 8월에 병조의 건의로 충청도는 연원도(連原道/찰방역 충주 단원역), 율봉도(栗峯道/찰방역 청주 율봉역), 성환도(成歡道/찰방역 직산 성환역), 이인도(利仁道/찰방역 공주 이인역), 시흥도(時興道/역승역 온양 시흥역), 금정도(金井道/찰방역 청양 금정역→홍주 용곡역)로 개편되었다. 1457년(세조 3) 7월에 최초로 전국의 역승 일체를 혁파하고 찰방으로 대치하였다. 이러한 조처는 서리거관자(書吏去官者)로 임명된 역승이 사사로이 이익을 도모하고 백성(吏民)을 침해할 뿐만 아니라, 역승의 관품이 높지 않다 하여 사신왕래자의 작폐가 심하다고 거론되었기 때문..

충청남도/청양 2022.06.22

왕진(汪津): 부여와 정산을 연결하던 나루

▣ 금강 연안은 부여권 청양군에서 금강과 닿아 있는 지역은 청남면, 목면이다. 하천 유역으로는 지천, 잉화달천, 치성천, 어천의 하류 지역으로 조선시대에 모두 정산현에 속했다. 이 일대는 전통적 생활권으로 볼 때 부여권으로 분류할 수 있다. 금강이라는 큰 지형 장벽이 있지만 직선 거리로 보면 부여읍이 청양읍 보다 훨씬 가깝다. 강을 건너야 하는 장벽은 그다지 큰 어려움이 되지 못했다. 어려움이 아니었다기 보다는 육로 20여km, 그것도 기복이 만만치 않은 칠갑산 자락을 걷는 것은 배를 타는 것보다 더 큰 장벽이었다고 보는 것이 옳겠다. 강을 건너면 부여읍까지 꽤 먼 거리를 걸어야 했지만 전반적으로 평탄해서 칠갑산 자락에 비해서는 훨씬 쉬운 길이었다. ▣ 금강 연안의 나루들 따라서 이 일대가 부여생활권에 ..

충청남도/청양 2022.06.21

등산로가 산을 깎는다

▣ 공간감각과 개척정신이 뛰어난 오랫만에 광덕산에 올랐다. 1월에 올랐으니 꽤 오랫만이다. 정상을 찍고 이마당으로 내려오려고 가다보니 옆으로 새 길이 생겼다. 까만 흙이 드러난 것이 얼마 안 된 길이다. 능선길은 봉우리가 있고, 봉우리 다음에는 급경사가 이어지므로 옆으로 돌아가면 봉우리를 올라가지 않아도 된다. 올라가지 않으니 그만큼 내려가는 거리도 짧다. 숲으로 이런 길을 낸 사람은 누구일까? 개척정신이 뛰어나고 해발고도 감각도 남다른 사람이겠지? ▣ 등산로가 불편한 이유 능선 등산로에는 돌이 많이 드러나있다.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이 다녔기 때문에 식생이 사라지고, 흙이 다져졌다. 그러다 보니 비가 내리면 물이 몰려들고, 그 결과로 침식이 주변보다 많이 진행되므로 바위나 돌이 점점 더 드러나게 된다. ..

발암 물질 없는 시멘트는 우리나라에 단 하나 뿐!

아파트를 쓰레기로 짓는다? 발암물질 없는 시멘트는 단 하나? 충격적 자료 공개합니다 [최병성 리포트] [최병성 기자] ▲ 산봉우리가 사라지고 급경사면에 특이한 문양이 만들어졌다. ⓒ 최병성 외계인이 다녀간 것일까? 높은 산봉우리에 독특한 문양이 그려져 있다. 이곳은 강원도 영월에 있는 news.v.daum.net

구봉광산: 선캄브리아기 변성암 지대에 매장된 금

▣ 구봉광산:  한 때는 전국 제1의 금 생산지였다.   구봉광산은 일제 강점기인 1911년부터 금을 캐기 시작하여 1926∼1937년 금 2만 5838g, 은 28만 5867g을 생산했다. 해방후인 1949∼1970년에는 금 1,113만 6,100g, 은 33만 1,203g을 생산하면서 번성하였다. 그러나 1967년 매몰 사고 이후 생산이 급격히 줄어 결국 1971년 문을 닫았다. 광산의 영향으로 1970년대에는 남양면 인구가 13,700여명에 이르기도 했다.  구봉광산의 금 매장량은 총 28t 정도로 추정되는데 이전에 생산된 11t을 제외하더라도 17t 정도가 남아 있다는 뜻이다. 실제로 2017년 금광을 다시 개발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있었으나 환경문제 등으로 진행이 멈춘 상태이다.    ▶구봉광산 ..

충청남도/청양 2022.06.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