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남도 108

홍주읍성 답사

▣ 답사 경로 군청주차장 - 홍주성 역사관 - 남문(홍화문) - 옥 - 동문(조양문) - 전영동헌(KT홍성지점) - 토포청(전 홍성경찰서) - 북문(망화문) - (목빙고) - (서문지) - 여하정 - 안회당 - 홍주아문 ▣ 답사지별 내용 ▶홍주성 역사관 -홍주 정체성: 홍주는 왜 충절의 고장이 되었을까? ▶ 남문(洪化門) : 1872지방지도 -남문은 왜 폐쇄되었을까? : 경사가 심하여 다니기가 불편했고, 풍수적으로 백월산에서 내려온 산줄기가 홍주성의 옆구리를 찌르는 형상이어서 문을 막고 裨補林을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 홍주읍성 훑어보기 - 읍취락에 대하여: 기능, 입지 원리, 내부구조 ▶ 옥 : 홍주읍성 복원도 - 조선시대 기관과 식민지 시대 기관 비교 ▶ 동문(朝陽門) : 홍주성의 입지..

충청남도/홍성 2023.09.26

읍성(邑城): 조선시대 계획도시

▣ 읍(邑): 조선시대에 등장한 통치·방어형 취락 ▶ 중앙집권의 상징 인간 생활의 기본 토대가 되는 취락(聚落‧settlement)은 다양한 원인으로 발달한다. 인류 초기에는 수렵이나 농경 등 생존에 유리한 환경을 따라 취락이 입지하였으며, 사회 구조가 복잡해지면서 점차 교통·방어· 통치 등 인문적 요소가 중요한 입지 요인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인문적 요인 가운데 통치 및 방어는 중앙집권체제가 확립되면서 중요한 요소가 되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읍취락(邑聚落)이 가장 대표적이다. 즉, 읍취락은 우리나라 전통 취락 가운데 통치 및 방어라는 인문적 요소가 원인이 되어 형성된 취락이라는 의미가 있다. 지방 행정 및 군사 기능을 했던 읍(邑)취락은 조선 초에 등장하였다. 조선 개국 이후 중앙집권체제가 확립되면서 지..

충청남도/홍성 2023.09.25

홍주읍성

▣ 홍주읍성 본래 모습 알아보기: 훼손된 민족정기 회복하기 홍주읍성은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원형을 상실하였다. 이러한 현실은 비단 홍주읍성 뿐만이 아니라 우리나라 대부분의 읍성들이 가지고 있는 특징이다. 그 결정적 원인은 물론 일제 강점의 역사 때문이다. 일제는 의도적으로 도성뿐만이 아니라 지방의 행정 중심이었던 읍성을 파괴함으로써 치밀한 심리적 침략을 도모하였다. 따라서 읍성의 본래 모습을 알아보는 것은 식민지 역사를 통해 훼손된 민족정기를 회복하는 첫 걸음이다. 홍주는 조선시대 거의 대부분 기간 동안 목(牧)이었으며 목사가 수령이었다. 충청우도에서는 공주와 함께 가장 위계가 높은 행정중심으로 기능을 했던 것이다. 따라서 내부에 많은 청사를 거느린 대표적인 지방 행정 중심지의 면모를 갖추고 있었다...

충청남도/홍성 2023.09.24

홍주(洪州)는 왜 홍성(洪城)이 되었을까?

공식적으로 알려져 있기로는 '홍주'와 당시 충남도청 소재지였던 '공주(公州)'가 일본어 발음(こうしゅう)이 같아서 혼란을 피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이는 당시 일제의 주장으로 그로 인해 '洪州'의 '洪'과 '結城'의 '城'이 합쳐져 '洪城'이 되었다. 일제가 이런 식으로 이름을 바꾼 예는 꽤 많지만 대부분 마을 단위의 이름이고 군 단위에서는 그 예를 찾기가 어렵다. 새로운 이름으로 바뀐 사례(부산, 군산, 대전 등)는 일부 있지만 옛 군현 이름에서 한 글자씩을 따서 조합한 사례는 없다. 충남을 예로 들어보면 대부분 지역이 통폐합 과정에서 조선시대 해당 지역의 목·군·현 이름 중에 한 가지를 선택하였다. 충남 14개 군 가운데 옛 이름을 잃은 곳은 세 지역인데, 홍성을 비롯하여 논산, 대전이다. 특히 위계..

충청남도/홍성 2023.09.21

안흥진, 무너미재, 소근진성 답사

▣ 답사 경로 안흥진성(용굴 - 서문 - (성벽길) - 태국사 - 북문 - 동문 - 남문) - 안흥항 - 안흥나래교 - 태안해양유물전시관 - 신진도항 - 물넘이고개(무너미재) - 소근진성 ▣ 안흥량과 안흥진성 안흥진(安興鎭) - sillokwiki 조선후기 충청도 태안군 근서면에 설치한 수군 거진. 개설 안흥진은 1609년(광해군 1) 충청도 태안군 근서면에 설치한 수군 거진(巨鎭)이다. 안흥진은 방어영으로 승격되거나 충청도 수영의 행영( dh.aks.ac.kr ▶ 끊임없는 해난사고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규모가 큰 조운선 사고를 간추려 보면, 태조 4년(1395) 경기도 조운선 16척이 난파되었고, 태종 3年(1403)의 5月 경상도 조운선 34척의 침몰과, 같은 해 6月에는 경상도 조운선 30척의 ..

충청남도/태안 2023.08.06

조운선 침몰에 관한 「조선왕조실록」의 기록

▣ 「太祖實錄」4년 8월 戊辰 忠淸道漕運船十艘, 慶尙道漕運船十六艘, 遇風摧敗 충청도 조운선(漕運船) 10척과 경상도 조운선 16척이 바람을 만나 파선되었다. ▣ 「太宗實錄」3년 5월 辛巳 慶尙道漕運船三十四隻, 沒于海中, 人死者甚衆。 萬戶使人搜之, 依島而生者一人, 見之而走, 追執之, 問其故, 答曰: "欲遯去薙髮, 離此苦也。" 上聞之, 嘆曰: "責乃在予。 豈非驅萬人就死地乎? 五日, 於陰陽爲受死, 且風氣甚惡, 非行船日也。 知其風惡而發船, 此實驅民而就死地也。" 問左右曰: "人之死者幾, 米之失幾?" 左右不能對。 上曰: "大槪幾何?" 左右對曰: "米則萬餘石, 人則千餘名。" 上曰: "米雖多, 不足惜也, 人之死者, 甚可憫也。 其室家之心, 爲如何也? 漕運之苦如此, 船軍不堪其苦, 而逃散宜矣。" 右代言李膺曰: "陸轉則其難尤..

충청남도/태안 2023.07.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