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남도/홍성

홍주읍성

Geotopia 2023. 9. 24. 22:59

▣ 홍주읍성 본래 모습 알아보기: 훼손된 민족정기 회복하기

  홍주읍성은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원형을 상실하였다. 이러한 현실은 비단 홍주읍성 뿐만이 아니라 우리나라 대부분의 읍성들이 가지고 있는 특징이다. 그 결정적 원인은 물론 일제 강점의 역사 때문이다. 일제는 의도적으로 도성뿐만이 아니라 지방의 행정 중심이었던 읍성을 파괴함으로써 치밀한 심리적 침략을 도모하였다. 따라서 읍성의 본래 모습을 알아보는 것은 식민지 역사를 통해 훼손된 민족정기를 회복하는 첫 걸음이다.

  홍주는 조선시대 거의 대부분 기간 동안 목()이었으며 목사가 수령이었다. 충청우도에서는 공주와 함께 가장 위계가 높은 행정중심으로 기능을 했던 것이다. 따라서 내부에 많은 청사를 거느린 대표적인 지방 행정 중심지의 면모를 갖추고 있었다. 이러한 특징은 역설적으로 일제에 의한 의도적 훼손을 더욱 가속화하는 원인이 된 측면도 있다. 일제는 홍주읍성 내부의 청사들을 일제식 관공서로 대체함으로써 빠르게 식민지 지배 전략을 강화해 갔다. 식민지 시대 홍주읍성의 변화 과정을 알아봄으로써 일제의 지배 전략의 단면을 엿볼 수 있다.

  홍주읍성은 東門이 성의 정문 역할을 한 것이 특징이다. 일반적으로 남문이 정문인 것이 읍성의 일반적 특징인 것에 비해 홍주읍성은 독특한 구조를 갖고 있는 것이다. 그 원인은 지형적 특징 때문이다. 그러나 일반적인 읍성의 조성 원리는 우리나라의 다른 읍성과 큰 차이가 없이 적용되었다. 이처럼 홍주읍성이 가지고 있는 특수성과 함께 다른 읍성들에도 적용될 수 있는 보편성을 탐구함으로써 읍성 취락의 일반적 특징을 알아볼 수 있다.

  홍주읍성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는 역사적 맥락을 기본으로 하여 성리학과 풍수지리라는 철학적 배경이 탐구되어야 한다. 또한 성곽 및 성문들에서 나타나고 있는 미학적 특징들도 함께 고려되면 좋을 것이다. 홍주읍성 답사를 통하여 다양한 인문학적 요소들을 탐구함으로써 천 년 도시 홍주의 면모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 홍주읍성 훑어보기

홍주읍성(1872지방지도) *규장각 소장

 

  홍주성이 처음 축조된 시대는 명확하지 않다. 홍주는 고려시대부터 서해안권의 행정교통의 중심지 역할을 했으므로 최초 건립 시기는 빠른 편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초기 행정구역 개편으로 전국의 읍성을 새로운 규격에 맞추어 수축할 때 홍주성도 새롭게 수축되었다(1451 문종16). 당시 성의 규모는 둘레 4,856, 높이 11척이었으며 성첩(성 위에 낮게 쌓은 담) 608, 敵臺(성문과 옹성에 접근하는 적을 막기 위해 성문의 좌우 옆에 있는 雉城 위에 설치한 방어시설물) 6개가 설치되었고 우물이 2개가 있었다고 한다.

  이후 현종, 순조 때 각각 중수되었고, 1870(고종 7)년에 조양문, 경의문, 망화문, 관영을 지었다. 이 때 동문인 조양문의 현판으로 흥선대원군이 친필을 하사하였다.

  홍주성은 성벽의 길이가 약 1,772m이며 읍성 내부에 여러 시설들이 들어서 있었는데 지금은 북문 양쪽 성벽이 아직 복원되지 못하고 있으며, 동문인 朝陽門을 비롯하여 아문(洪州衙門), 동헌인 安懷堂과 연못, 정자(余何亭) 등이 남아있다.

 

입지 특성

  충청도의 서부 해안 지역은 조선시대 읍성의 분포가 많았던 지역으로 서해안을 따라 한산‧서천‧비인‧남포‧보령‧결성‧홍주‧해미‧서산‧태안 등의 읍성이 집중적으로 분포하였다. 이들은 대부분 해안에 인접한 군현들인데 비해 홍주는 해안에 직접 면하고 있지는 않았음에도 읍성이 설치되었다. 홍주는 목사가 수령인 위계가 높은 행정 단위로서 방어 상의 의미도 컸기 때문이다.

  홍주읍성은 배후산지인 백월산에서 동쪽으로 뻗어 나온 완사면 상에 입지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동쪽이 터진 화강암 침식지여서 남문이 아닌 동문이 主門이다. 삽교천의 상류에 해당하는 금마천이 읍성의 좌우, 즉 남쪽과 북쪽으로 흘러 배후산지와 함께 외부와의 직접적 연결을 차단하여 방어에 유리한 입지를 보인다.

홍주읍성의 지리적 위치 *전춘근, 1993
 

형태 및 경관상의 특징

  홍주는 위계가 높은 행정치소였다. 진관체제 상 홍주진관의 홍주목사 예하에 서천, 남포, 비인, 결성, 보령 등 여러 현들이 포함되었다. , 홍주는 충청도 서부지역을 관할하는 위치로 행정, 군사 기능이 집중하고 있었으므로 읍성의 규모가 이 일대에서 가장 크다. 성벽의 길이가 5,850척으로 주변의 다른 현들(보령 2,109, 남포 2,476, 비인 3,505, 결성 3,325, 서천 2,265)에 비해 월등하게 크다. 군사적 위계가 높을 뿐만이 아니라 충청도 서부 지역의 교통 결절점에 해당하여 취락의 규모가 컸다.

  대부분의 읍성들이 지형적 장벽 때문에 원형이나 사각형을 변형한 형태인데 비하여 거의 평지에 가까운 구릉 말단부에 위치한 홍주읍성은 직사각형에 가깝다. 남북방향의 길이가 동서방향보다 긴 형태인데 남벽과 서벽이 만나는 부분이 남쪽으로 돌출한 형태를 보인다. 남북 길이가 약 550m, 동서 길이가 약 325m인데 남서쪽은 구릉성 산지여서 서문, 동문이 모두 북쪽으로 치우쳐 있으며 가옥들도 대부분 읍성의 동북쪽에 밀집하였다. 특히 낮고 평평한 지형이 분포하는 동문(조양문)을 중심으로 시가지와 도로가 발달하였다.

  성 내부의 간선도로는 동문과 서문을 연결하는 도로와 서문의 동쪽 140m 지점에서 북문으로 이어지는 도로이다. 이 간선도로는 거의 직선상으로 뻗어 있어 전체적으로 형을 이루고 있다. 그 외의 도로들은 불규칙한 미로형에 가깝다.

홍주읍성 복원도 *최상식, 2001

  주요 관아 건물들은 동문과 서문을 연결하는 간선도로의 남쪽에 위치하였다. 동헌(안회당)은 서쪽 성벽에 인접하여 남북 축의 중간에 자리를 잡았고 동헌 앞으로 작청과 부속 건물들이 동문 방향으로 위치하였다. 간선도로의 북쪽으로는 객사와 향청, 사창고, 군기고 등이 위치하였고 객사 주변에는 민가가 주로 분포하였다.

  시장은 주로 사람의 출입이 가장 많은 성문의 안팎에 위치했는데 홍주는 동문인 조양문을 중심으로 성 밖에 시장이 있었다.

 

역사적 변화

  ▶ 식민지 침탈과 읍성 파괴

  근대화 과정에서 많은 도시들은 여러 가지 원인으로 전통적 경관을 상실한다. 특히 식민지 역사를 겪은 나라들의 도시에서 이러한 현상이 더욱 심하게 나타나며, 전쟁이 있었던 경우에는 더더욱 경관의 변화가 심하다. 읍성취락은 조선시대 당시 방어가 주요 기능이었다. 그런데 식민지시대가 되면서 방어 기능이 필요하지 않게 되었으므로 성곽의 의미가 사라지게 되었다. 따라서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대부분의 읍성취락들은 내부구조와 경관이 급속도로 변화하게 된다. 또한 일제의 의도적인 훼손으로 전통 경관이 파괴된 경우도 많았다. 홍주 역시 일반적인 변화과정을 겪었다.

  ▶ 행정구역 변화

  홍주의 행정구역은 조선시대 이래로 몇 차례 변화를 거쳤다. 1895년 이전까지는 洪州牧이었다가 1895洪州郡이 되었다. 식민지 시대였던 1914년 군현 통폐합으로 결성과 통합되어 洪城郡 洪州面이 되었으며 1941년에 홍주면이 洪州邑으로 승격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통폐합 과정에서 군청 소재지가 아닌 읍취락은 쇠퇴한 경우가 많았다. 결성이 그런 사례로 홍성군이 되면서 행정 기능을 상실하고 홍성군 산하의 면으로 전락하였다. 하지만 홍주는 통폐합과 함께 홍성군청의 소재지가 되면서 기능이 더욱 강화된 경우이다.

  ▶ 근대 교통로의 영향을 받지 않은 읍성 

  일제 강점기에는 철도와 신작로 등 새로운 근대 교통로가 발달하면서 근대 교통로에서 멀어진 읍취락들이 쇠퇴의 길로 접어든 경우가 많았다. 충청남도에서 1914행정구역 개편 때 옛 이름을 잃은 지역은 홍성, 대전, 논산 세 지역이다. 대전과 논산의 공통점은 철도교통이 등장하면서 중심이 이동했다는 점이다. 대전역은 회덕현 관아에서 9km 정도 떨어진 외곽에 자리를 잡았는데 이 일대는 이후 교통의 요충지가 되었으며, 논산역은 은진현 관아에서 4km정도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았는데 수로교통의 요충지였던 강경을 쇠퇴시키는 결정적 원인이 되었다. 대전군청은 1910년에, 논산군청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과 함께 대전역과 논산역 가까운 곳에 각각 자리를 잡음으로써 과거 중심지들이 빠르게 쇠퇴하게 되었다.

  이에 비해 홍성은 중심이 이동하지 않았다. 기차역이 홍성읍의 외곽에 들어섰지만 행정중심은 과거 홍주목 치소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홍성군의 행정관서들은 홍주읍성 내부에 자리를 잡고 기존의 관아 시설들을 변형하여 활용하게 되었다.

  홍주의 기존 중심지는 철도(장항선)로부터 제법 떨어진 거리에 있었지만 중심지가 역 주변으로 이동하지 않고 유지되었다. 기존의 중심지를 중심으로 발달했던 과거의 도로망이 크게 변동되지 않고 유지되었기 때문이다. 다만 장항선의 개통 이후 시가지가 홍주역사 방향으로 확대되었다.

홍주읍성 성벽의 해체 과정 *최상식, 2001
 

  ▶ 식민지식 기능으로 대체된 읍성 내부 기능

  홍주는 식민지 시대를 거치면서 내부 기능들이 일제식 기능으로 대체되는 독특한 변화를 겪었다.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면서 읍성 내부에 있던 조선시대 관청들이 일부 없어지기도 했지만 개축되면서 그 형태와 기능이 변화되었다. 동헌의 앞에 군 청사가 세워졌으며 전영 자리는 우편국으로 바뀌었다. 이 있던 자리에는 재판소가 들어섰으며 討捕廳은 경찰서로 이용되었다. 오관리 일대는 행정, 사법, 문화, 신문, 방송, 금융, 통신, 의료 등 주요 기능들이 강화되고 집중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경찰서(1994년 이전), 우체국(2002년 이전), 법원(2005년 이전) 등 읍성 내부의 일부 기능들이 성 밖으로 이전하면서 다소의 변동이 일어나고는 있지만 지금까지 기본 틀이 크게 변동하지 않고 유지되고 있다.

1930년대 홍성 *전춘근, 1993

1940년대 관공서 관련 건축물 *최상식, 2001

 
  ▶ 간선도로를 따라 확대된 성밖 시가지

  일제 강점기 이후 건물이 늘어나면서 시가지가 점차 확대되었는데 주로 동문-서문을 연결하는 간선도로를 중심으로 동북 방향으로 확대되었다. 이 과정에서 읍성의 북쪽 벽이 거의 훼손되었다. 또한 읍성 내부의 도로를 읍성 외부와 연결하는 과정에서 성벽의 훼손이 가속화되었다. 북문에서 덕산 방향으로 이어지는 도로, 동문 남쪽에서 홍동으로 이어지는 도로 등이 대표적이다.

1937년 홍성 시장 *최상식, 2001

  동문 안팎에 발달했던 시장은 1936년 읍사무소가 지금의 위치로 이전하면서 그 앞쪽으로 더욱 발달하여 상설시장으로 성장하기 시작하였다. 1943년에는 동문에서 홍성역으로 이어지는 대로의 북쪽(대교리)으로 새로운 시장이 발달하기 시작하여 지금까지 정기시장의 역할을 하고 있다.

 

홍주읍성: 전통 읍성의 모습과 식민지 역사를 함축하고 있는 홍주읍성

  읍성은 조선시대에 등장한 취락으로 우리나라에 널리 일반화되어 있는 취락형태이다. 자연발생적인 측면보다는 계획적으로 설치된 행정군사 기능을 중심으로 발달했기 때문에 역사적 과정을 고려할 때 그 특징을 정확히 파악할 수 있다.

  전국의 읍성 가운데 조선시대의 형태와 비교하여 完形에 가깝게 보존된 것이나 자료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동래읍성, 수원성, 홍주성, 해미읍성, 고창읍성, 낙안읍성, 남도석성, 경주읍성, 전주읍성 등 9개 정도이다(손영식, 1987). 현재 홍주 읍성은 성벽이 일부 복원되었고 동헌(안회당), 홍주아문, 여하정 등이 남아있는 상태이다. 그러나 고지도를 비롯한 자료를 통해 과거의 모습을 거의 완형에 가깝게 알 수 있다. 또한 근대화 과정에서 일어난 변화를 거의 정확하게 알 수 있으며 일제 강점기의 흔적들도 일부 잔존하고 있다. 따라서 홍주읍성을 매개로 지역사 뿐만이 아니라 우리나라 역사 전반에 대한 이해를 하는 것이 가능하다. 남문 주변에는 홍주성역사공원이 조성되어 과거의 모습을 공부할 수 있는 장이 마련되어 있다. 홍주의 유장한 역사는  천 년 도시 홍주를 이해하는 훌륭한 배경이 되며, 홍주읍성은 그러한 목적을 달성하는 데 매우 효과적인 요소가 될 수 있다.

  조선시대의 관청들이 근대적 행정 기관으로 대체된 것이 홍주읍성의 특징이다. 이러한 특징을 잘 활용하면 좋은 기회가 될 수도 있다. 성 내부에 위치한 민간인 소유지들을 이전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쉽지 않겠지만 군청, 읍사무소 등 관공서들을 중심으로 옛 모습을 복원하는 것이 어느 정도는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전통 건축물, 건물의 배치, 읍성 내부의 가로망 등은 우리 고유의 특징으로 미학적, 철학적 의미를 갖는다

 

◈   참  고  문  헌   

「조선왕조실록」

<1872지방지도 홍주목 지도>,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류제헌, 1994, 한국근대화와 역사지리학-호남평야,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손영식, 1987, 한국 성곽의 연구, 문화공보부 문화재관리국.

오홍석, 1982, 취락지리학, 교학사

전종한, 2006, 내포지역 읍성 원형과 읍치 경관의 근대적 변형, 근대 이행기 지역 엘리트 연구, 충남대학교 내포지역연구단.

전춘근, 1993, 충남서부지역 구읍취락의 형태적 변천과정, 한국교원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최상식, 2001, 일제시대 홍주읍성의 토이이용 변화에 관한 연구-필지체계 및 소유권 변화를 중심으로, 울산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홍성고 60년사, 2001, 홍성고등학교동창회.

홍성군지, 1991, 홍성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