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읍(邑): 조선시대에 등장한 통치·방어형 취락
▶ 중앙집권의 상징
인간 생활의 기본 토대가 되는 취락(聚落‧settlement)은 다양한 원인으로 발달한다. 인류 초기에는 수렵이나 농경 등 생존에 유리한 환경을 따라 취락이 입지하였으며, 사회 구조가 복잡해지면서 점차 교통·방어· 통치 등 인문적 요소가 중요한 입지 요인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인문적 요인 가운데 통치 및 방어는 중앙집권체제가 확립되면서 중요한 요소가 되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읍취락(邑聚落)이 가장 대표적이다. 즉, 읍취락은 우리나라 전통 취락 가운데 통치 및 방어라는 인문적 요소가 원인이 되어 형성된 취락이라는 의미가 있다.
지방 행정 및 군사 기능을 했던 읍(邑)취락은 조선 초에 등장하였다. 조선 개국 이후 중앙집권체제가 확립되면서 지방 행정 중심지에 중앙에서 관리를 파견하면서 발달하기 시작한 것이다. 지방의 행정 중심지에 관리를 파견하는 것은 조선시대 이전부터 이루어졌지만 토호들의 지역 연고권을 박탈하고 전적으로 중앙에서 관리가 파견되기 시작한 것은 조선시대에 이르러서였다. 따라서 읍취락은 중앙집권의 상징이라고 볼 수 있다.
조선의 지방행정제도는 부(府)‧목(牧)‧군(郡)‧현(縣) 체제였다. 각 행정단위의 수령으로는 각각 府使(종2품)‧牧使(정3품)‧郡守(종4품)‧縣令(종5품), 또는 縣監(종6품)이 파견되었다. 수령의 품계는 달랐지만 이들은 행정 위계 상 상하 관계가 아닌 독립적 행정단위로 기능하였다(오늘날 시·군의 행정 위계가 같은 것과 비슷한 개념이다). 읍취락은 이들 모두를 통칭하는 것이다.
▶ 왜구 퇴치와 읍취락의 성장
읍취락과 종족촌락은 조선시대에 등장한 대표적인 취락이다. 종족촌락은 조선 중기에 태동하여 임진왜란 이후에 확산된다. 종법체제가 완성되고 권력다툼이 심해지면서 일종의 정치적 배후 지지기반으로 성장하였다. 이에 비해 읍취락은 시기로 볼 때 종족촌락에 앞선다. 조선 왕조의 지방 행정 체제가 완성되면서 읍취락이 빠르게 성장하기 시작한 배경은 왜구 퇴치였다. 고려말 왜구가 끼친 폐해는 엄청났다. 최영이나 이성계가 이름을 날린 이유가 바로 왜구 토벌에 공을 세웠기 때문이었다.
고려말 당시 왜구의 발호로 해안지역에 사람이 살 수 없을 지경이었다. 왜와 가까운 남해안은 물론이고, 충청도 서해안까지도 영향을 미쳤다. 상당수의 해안은 사람이 살지 못하고 비어 있었다. 목숨을 보장하기 어려울 만큼 크게 위험을 무릅써야 하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내포는 조운선이 많이 통과하고, 농업이 발달하여 왜구가 군침을 흘리기에 충분했다. 또한 섬이 많아서 왜구가 숨어 있다가 공격을 하기에 유리한 지형적 특징을 하고 있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면서 조정에서는 왜구를 적극적으로 토벌하기 시작했다. 태종때에는 해안 지역의 수령을 무장으로 교체하고 태안반도 등 요충지에 수군진을 설치하였다. 수령들은 성을 쌓고 산지로 달아나 있던 주민들을 모아 둔전을 개간하였다. 농업 생산성이 늘어나고 인구도 증가하였다. 특히 내포는 해안을 따라 모든 군현에 성이 만들어졌다. 서산, 태안, 해미, 결성, 보령, 남포, 비인, 서천, 한산 등의 군현에 모두 성이 쌓아졌다. 행정 중심지 홍주를 비롯하여 삽교천 연안의 덕산, 면천, 대흥에도 성을 쌓았다. 읍성을 쌓은 것은 취락이 확대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해안지역이 거주지로 바뀌었고 인구가 안정되었으며, 통치체제가 자리를 잡아갔다.
▶ 성리학적 입지론
읍취락을 설계하는 데는 성리학적 입지론이 근간이 되었다. 또한 풍수지리 등 전통적 입지관도 배경으로 작용한 경우가 많다. 일반적으로는 풍수적 입지가 중요한 배경이 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 경우가 많지만 실제로는 성리학적 입지론이 중요한 원리가 되었다. 조선 개국의 이론적 배경이었던 성리학은 都城이었던 漢城府를 설계하는 기본 원리가 되었다. 오늘날에 와서는 주로 풍수적 해석이 주로 회자되고 있지만 실제로는 성리학적 원리가 도성의 조성에 기본적 토대가 되었다. 이러한 성리학적 원리는 도성 조성뿐만이 아니라 지방의 읍을 설계하는 데도 기본적 토대가 되었다.
▣ 읍성(邑城) : 변방과 해안에 세워진 성곽 취락
▶ 방어 기능을 강화한 읍성
읍취락 가운데 일부는 둘레를 성곽으로 에워싼 성곽취락으로 만들어졌다. 해안이나 변방에 위치한 읍취락들이다. 이들은 방어 기능이 중요했기 때문으로 왜구의 침입이 잦았던 삼남지역에 특히 성곽을 둘러친 읍성(邑城)취락들이 많았다. 고려말에 극심했던 왜구의 침입으로부터 읍을 방어하기 위한 물리적 시설들을 증축, 개축하거나 신축함으로써 조선초부터 읍성취락들이 발달하게 된 것이다. 충청도 서부 해안 지역도 이러한 이유로 읍성의 분포가 많은 지역이었다.
▶ 조선시대형 계획도시 읍성
읍성취락의 가장 큰 특징은 계획적 취락이라는 점이다. 대부분의 전통 취락들이 자연발생적인 것에 비해 읍성취락은 대부분 가로망과 건물을 계획적으로 설치한 계획적 취락이다. 주변 지형및 지리적 위치에 따라 크기와 모양은 조금씩 다르지만 읍성취락은 일정한 공통점을 갖고 있다. 계획적 취락이기 때문에 나타나는 특징이다. 공통점은 주로 내부 구조에서 나타나는데 조성 과정에 공통적인 원리가 적용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원리를 통하여 조성 당시의 입지관을 추측해 볼 수 있으며 읍성취락의 구조를 일반화하는 것이 가능하다.
▣ 읍성취락의 입지
읍성취락의 입지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방어라는 사회적 조건이었다. 따라서 읍성취락은 주로 해안이나 변경지방에 위치하였다. 이는 역사적으로 고려 말 이후 왜구가 준동했던 역사와 관련이 깊다. 왜구들은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등 삼남지방을 중심으로 약탈을 자행하고 조운을 위협함으로써 많은 피해를 일으켰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면서 중앙집권 체제가 강화되었다. 조정에서는 행정치소의 위치를 변경하고 성곽을 축조하는 등 읍성취락의 기능을 강화함으로써 행정과 방어 기능을 동시에 수행하는 지방 중심지를 발달시켰다.
읍성취락의 입지에는 이와같은 인문적 조건이 주로 작용하였지만 자연적 조건도 고려되었다. 특히 강수량의 변동이 심한 우리나라의 기후 특성은 避水와 함께 用手가 중요한 자연적 배경이 되었다. 즉, 여름철 홍수에 대비하여 적절한 피수 대책이 필요하였으며 동시에 생활용수의 획득이 유리한 입지가 필요하였다.
또한 지형적 조건이 중요하게 작용하였는데 방어에 유리한 지형적 특징과 함께 최악의 상황에서 피신이 가능하도록 산과 연결되는 입지가 선택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입지 특징은 읍성의 입지를 풍수와 관련시켜 설명하는 배경이 되었다.
▣ 읍성취락의 구조
▶일반적 특징
조선의 도성인 한성부는 ‘주례고공기(周禮考工記)’를 기본으로 설계되었다. 주례고공기에서는 도성 건설의 원리를 ‘匠人營國, 方九里, 旁三門. 國中九經九緯, 經涂九軌, 左祖右社, 前朝後市, 市朝一夫’로 제시하였다. 도성을 건설함에 있어(匠人營國) 사방을 9리로 할 것(方九里)이며 각각의 방위에 3개씩의 문을 둔다(旁三門). 도성의 내부에는 각각의 문들을 연결하는 도로를 건설하는데 각 면마다 문이 셋 씩 있으므로 9개의 도로가 가로와 세로로 배치되는 셈이다(國中九經九緯). 도로의 넓이는 9궤((經途九軌)인데 ‘1軌’는 ‘수레의 넓이’로 대체로 8尺이다. 왼쪽에는 태묘를 두고 오른쪽에는 사직단을 두며(左祖右社), 궁성의 앞쪽에 조정을 두고 뒤쪽에 시장을 둔다(前朝後市). 시와 조의 면적은 각 1부로 한다(市朝一夫). 1부(夫)는 전답 100무(畝)이고 100무는 가로 세로 각각 100보(步)로 대략 4,363평의 넓이에 해당된다.
이러한 도성 조성의 원리는 지방의 읍성을 조성하는데도 적용이 되었다. 그러나 도성과는 규모나 내부의 구성요소가 달라야 하고 또한 지형적 장벽 등의 원인으로 주례고공기를 전적으로 따를 수는 없었으므로 지역에 따라 다소 다른 형태의 읍성이 만들어졌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적용되는 원리는 유사했으므로 어느 정도 일반화가 가능하다.
▶ 내부구조
① 가로망
먼저 4대문을 중심으로 간선도로망을 구축하였다. 大路는 직선보다는 서로 어긋나도록 구획하였는데 읍성 내부의 지형적 조건 등으로 4대문이 완전한 정방위를 나타내지는 않았던 것과 관련이 깊다. 또한 계획적 취락이므로 토지 구획이 규칙적이었다. 中路까지는 거의 직선상이었지만 小路는 대부분 미로형인데 공공기관이 밀집한 중앙부는 초기에 계획적으로 설치된 이후 관련 건물들이 자연발생적으로 부가되면서 나타난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② 객사(客舍) 및 관아
객사는 왕의 位牌를 모시는 공간으로 정기적 祭禮를 봉행하고 왕명을 복명하는 신성한 장소이다. 따라서 읍성 내부에서 가장 상징적 위계가 높은 공간이다. 그래서 객사는 읍성의 상징적 심장부에 위치한다. ‘상징적’이라는 의미는 지리적 한가운데와는 다른 의미로 장소에 권위를 부여하고자 하였다. 대표적인 방법은 기본 도로 형태를 많이 왜곡시킴으로써 가려진 공간을 창출하는 것이다. 넓지 않은 읍성 내부에서 일반에게 쉽게 노출되지 않는 가려진 공간은 사실상 만들어지기 어렵기 때문에 나무를 심거나 접근하는 길을 돌아가도록 만듦으로써 장소에 권위를 부여하고자 하였다.
동헌 등 관아 건물은 대부분 객사 앞쪽으로 전면 배치하였다. 객사의 권위를 높이는 것과 함께 접근이 쉬운 위치에 입지시킨 것이다.
③ 기타
성황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성황단과 토지를 관장하는 사신(社神)과 곡식을 주관하는 직신(稷神)에게 제사를 지내는 사직단 등은 ‘左廟右社’, ‘廟東社西’의 원칙에 따라 배치되었는데 이들은 읍성 외부에 설치되었다. 돌림병을 예방하기 위해 주인이 없는 외로운 혼령을 국가에서 제사 지내주던 제단인 厲壇과 교육기관인 鄕校도 모두 읍성 외부에 설치되었다. 향교는 읍성의 동북쪽에 설치되었는데 공자를 비롯한 선현들의 위패를 봉안하는 시설이므로 동쪽에 설치하는 원칙을 따른 것이다. 이들 시설들은 마을 이름으로 남아있는 경우가 많은데 校洞, 校村里, 校城里, 鄕校말, 社稷洞 등이 우리나라에서 많이 발견된다.
봉수대는 읍성 주변에서 시야가 좋은 산에 설치되었으며 시장은 대부분 主門 외곽에 형성되었다.
◈ 참 고 문 헌 ◈
「조선왕조실록」
류제헌, 1994, 한국근대화와 역사지리학-호남평야,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손영식, 1987, 한국 성곽의 연구, 문화공보부 문화재관리국.
오홍석, 1982, 취락지리학, 교학사
전춘근, 1993, 충남서부지역 구읍취락의 형태적 변천과정, 한국교원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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