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남도/태안

안흥진, 무너미재, 소근진성 답사

Geotopia 2023. 8. 6. 16:31

▣ 답사 경로

안흥진성(용굴 - 서문 - (성벽길) - 태국사 - 북문 - 동문 - 남문) - 안흥항 - 안흥나래교 - 태안해양유물전시관 - 신진도항 - 물넘이고개(무너미재) - 소근진성

답사 경로 *조선총독부(1919)

 

▣ 안흥량과 안흥진성

 

안흥진(安興鎭) - sillokwiki

조선후기 충청도 태안군 근서면에 설치한 수군 거진. 개설 안흥진은 1609년(광해군 1) 충청도 태안군 근서면에 설치한 수군 거진(巨鎭)이다. 안흥진은 방어영으로 승격되거나 충청도 수영의 행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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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끊임없는 해난사고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규모가 큰 조운선 사고를 간추려 보면, 태조 4년(1395) 경기도 조운선 16척이 난파되었고, 태종 3年(1403)의 5月 경상도 조운선 34척의 침몰과, 같은 해 6月에는 경상도 조운선 30척의 침몰과 함께 1천명이 사망하고 1만석이 손실되었다. 태종 14년(1414) 8月에는 전라도 조운선 66척이 침몰하여 200여명이 익사하고, 미곡 5,800여석이 수장되었다. 세조 1년(1455)에는 전라도 조운선 54척이 수장되었다.

 

 

조운선 침몰에 관한 「조선왕조실록」의 기록

▣ 「太祖實錄」4년 8월 戊辰 忠淸道漕運船十艘, 慶尙道漕運船十六艘, 遇風摧敗 충청도 조운선(漕運船) 10척과 경상도 조운선 16척이 바람을 만나 파선되었다. ▣ 「太宗實錄」3년 5월 辛巳 慶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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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래 이름은 '難行梁'이었다

  얼마나 험했으면 난행량이라 했을까?

  안흥량은 조류가 빠른데다 가운데에 사주가 발달하여 사주가 있는 곳은 수심이 얕다. 물이 빠지면 겉으로 드러나므로 피할 수 있지만 오히려 물밖으로 드러나지 않는 물때에는 암초가 된다. 그러므로 물때를 잘 맞춰야 하고, 물길을 잘 모르면 배가 좌초될 수도 있다. 안흥량 인근에는 안파사(安波寺), 징미산(拯米山) 등의 지명이 전하는데 이들은 조운선 침몰에서 비롯된 지명으로 짐작된다.

  조선시대 일어났던 사고 규모가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상식을 넘어선다. 34척의 배가 침몰하여 1,000여명의 병사가 죽고, 10,000석의 양곡이 가라앉았다고 한다면 조정의 재정에도 큰 영향을 미칠 정도이다. 그러니 안흥량에 대한 대책을 세우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굴포운하, 의항운하, 안면운하 등은 이런 맥락을 이해 해야 한다.

안흥진성 남쪽 성벽에서 바라본 안흥량과 관장목(사진에서 멀리 보이는 곶과 섬 사이의 해협). 썰물이 되면 안흥량에 사주가 겉으로 드러난다. 이런 지형 조건이 배가 드나드는 데 방해가 된다.
안흥진성 남문에서 바라본 안흥나래교(안흥량을 건너는 다리)
안흥나래교에서 바라본 안흥항과 안흥진성

 

 

"사람이 계수나무꽃 떨어지듯"…태안 안흥량에 무슨 일이 - 굿모닝충청

[굿모닝충청 태안=김갑수 기자] 지난 6월 조선시대 수군의 명단이 적힌 군적부(軍籍簿)와 한시(漢詩)가 발견된 충남 태안군 신진도 한 고가에서 수군진촌(水軍鎭村)의 역사를 느낄 수 있는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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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더 큰 장애물은 관장목이었다

   당시의 항해술로는 시속 4노트의 조류를 헤치고, 폭 830m의 좁은 수로를 암초에 부딪치지 않고 항해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위 사진에서 볼 수 있듯이 안흥량은 썰물때가 되면 물길 한가운데에 사주가 드러나는데 뱃길을 잘 알지 못하면 이런 지형들이 배가 다니는데 큰 위험 요소였다. 

  그런데 사실 더 위험한 곳은 안흥량보다는 관장목이었다. 안흥량 동쪽에 있는 안흥진은 조운선이 꼭 들러야 하는 곳이었다. 이 항로에서 가장 위험한 곳은 관장목이었기 때문이다. 관장목은 소원반도의 끝인 所遠面波濤里 남단에 있는 좁은 해협으로 冠丈項(『萬機要覽』재용편 漕轉條), 關障項(『東國名山記』湖中山水安興鎭條), 灌頂巖(『한국지명총람』4, 충남편(하)), 官首角(『1/50,00 地圖』, 삼능공업사), 꼬챙이뿌리(자연지명)로도 불리우며, 꼬챙이뿌리의 서쪽 수면 아래에 꼬챙이섬이 있다.

  관장목은 파도리와 섬 사이의 좁은 해협으로 빙하기에는 이어진 산줄기였다. 후빙기 해수면이 올라오면서 물에 잠겼지만 원래 산줄기였으므로 수면 아래에 높고 낮은 기복이 있을 수밖에 없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암초들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지질도에서 구조선의 방향을 보면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물길이 낯선 외부인들(아마도 조선초기 조운체제가 정비되어가던 무렵에는 수군들이 가지고 있던 정보가 많이 부족했을 것이다)이 낭패를 당하기 십상이었을 것이다. 

북동-남서방향의 지질구조선이 뚜렷한 관장목 일대

  관장목을 통과하기 위해 조운선은 모두 안흥진에 들러 관장목을 통과할 수 있는 물때를 기다렸다. 썰물때가 되면 물이 북쪽에서 남쪽으로 흐르기 때문에 배가 물살을 거슬러 올라 가야만 했다. 그래서 밀물을 이용해야 하는데 수심이 사주와 암초를 덮을 만큼 올라와야 하므로 그 시간이 아주 짧았다. 조곡을 가득 실은 배를 몰고 안흥진을 출발하여 관장목을 통과하려면 바람도 때맞춰 불어줘야 했으므로 매우 힘든 여정이었다.

관장목 일대는 수심이 얕고 기복이 심하다 *국토지리정보원(2015)

 

  ▶ 관장목을 통과하기 위해 워밍업을 하던 곳 안흥진

  워낙 뱃길이 멀어서(2월에 시작하면 먼 곳(경상도)의 세미는 5월에나 한양에 도착했다) 중간에 배를 점검 받아야 했는데 30척 1綜으로 선단을 꾸려 도착과 출발할 때 점검을 받았다. 특히 태안반도는 밖으로 튀어나와 있어서 조류와 파도가 거세고 운항거리가 길었으므로 태안반도에 들어서기 전에 원산도에 들러 점검을 받았다. 원산도를 떠나 안흥진에 이르면 조운선들은 또 안흥진에 들러 숨고르기를 했다. 안흥진은 조운로 3대 난코스(울돌목, 안흥량, 손돌목)에 속하는 관장목 바로 앞에 있었으므로 반드시 들러서 점검을 받아야 하는 곳이었다.

 

안흥진성(해동지도). 안흥량에 '삼남세선래박처'라고 표시되어 있다.

  ▶ 안흥진성 내부구조

김경옥, 「조선후기 태안 안흥진의 설치와 성안마을의 공간구조」, 『역사학연구』32, 2008.
태국사
안흥진성 안 마을(정죽리)
남문에서 바라본 안흥진성 안 마을. 사진 왼쪽 누각이 서문이고, 오른쪽 산등성이 낮은 부분이 북문이다.
僉使鎭이었던 安興鎭에는 성곽과 관아 건물이 상세히 그려져 있는데 해안 방어의 요충지로서 중시되었던 지역이다. 안흥진의 서쪽 小島의 전면에 關障項이 있는데 서해안 해로 가운데 험하기로 이름났던 곳이다. 삼남의 漕運船이 이곳에서 난파되는 사례가 빈번하게 발생하자 태안의 동쪽 지역에 운하 착굴 공사를 고려시대부터 시도했으나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조선시대에서도 세조와 현종 때 논의가 있었으나 지반이 견고하여 착굴이 불가능하자 대신에 남북에 창고를 설치하여 조운에 이용하였다. 남창에 호남, 영남의 세곡을 모아 육로로 북창에 운반하여 다시 조운선으로 서울까지 운반하였으나 폐단이 심하여 중간에 폐지한 사실을 지도의 상단에 기술해 놓았다.*1872지방지도 태안지도 해제(서울대학교 규장각)

 

국립태안해양유물전시관: 마도해역에서 발굴된 유물을 전시

 

태안해양유물전시관 -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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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진도에는 석회암이 있다

 

신진도(新津島)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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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서읍지(1871)」에는 '新鎭'으로 표시되어 있다
선캄브리아기 석회암이 많은 신진도 *한국지질자원연구원
신진도 남쪽의 석회암

 

무넘이재와 소근진성 

  ▶ 굴포를 뚫어서 안흥량을 피해가라 : 「世祖實錄」1년 윤6월 癸酉

護軍鄭有臨輪對, 上曰: "常行公事, 一遵條章, 固無可議, 今之輪對, 欲聞律令外遺弊耳, 如有所言, 悉陳無隱。" 有臨曰: "全羅道漕船, 皆敗於安興梁, 未及安興有古蓴城之基, 纔隔七八里亦有永豐倉古基。 若令全羅漕船, 泊於古蓴城基, 陸輸永豐倉, 載船而來, 萬無覆沒之理。 且於蓴城永豐之基, 俱置倉庫以備雨。" 上曰: "爾言良是。 予當議行。"

호군(護軍) 정유림(鄭有臨)이 윤대(輪對)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상례로 행하는 공사(公事)는 한결같이 조장(條章)대로 준행하고 있으므로 본시 의논할 것이 없지만, 지금의 윤대는 율령(律令) 외의 끼치는 폐단을 듣고자 함이니, 만일 말할 것이 있거든 숨김없이 다 진달하라."

하니, 정유림이 아뢰기를,

"전라도(全羅道)의 조선(漕船) 이 모두 안흥량(安興梁)에서 실패하는데, 안흥(安興)에 못 미쳐서 옛 순성(蓴城)의 기지가 있고, 이에서 겨우 7, 8리를 격해 또한 영풍창(永豐倉) 고기(古基)가 있습니다. 만약 전라도 조선으로 하여금 옛 순성 기지에 정박(定泊)케 하고는 육로로 영풍창까지 수송하고 이에서 다시 선박에 적재해 오게 하면 전복하여 빠질 이치가 없으니, 또 순성과 영풍 기지에 모두 창고를 설치하여 우습(雨濕)에 대비하면 됩니다."

하니, 임금이,

"네 말이 진실로 옳다. 내 마땅히 이를 의논하여 시행하겠다."

하였다.

 

  ▶ 굴포운하가 안 된다면 관장목이라도 : 「中宗實錄」17년 1월 丙辰

 

三道體察使高荊山啓曰: "若鑿泰安 安恒 蟻項, 以通漕船, 則可免覆沒之禍, 而萬世蒙利, 請以水軍鑿之。" 戶曹請依啓, 允之。

삼도 제찰사(三道體察使) 고형산이 아뢰기를,

"태안(泰安)의 안항량(安恒梁)·의항(蟻項)을 굴착하여 조운선(漕運船)이 통행하도록 한다면 침몰하는 화를 면할 수 있어 만세토록 이(利)를 누리게 될 것이니, 수군(水軍)을 동원하여 굴착하기 바랍니다."

하고, 호조가 아뢴 대로 하기를 청하였으므로 윤허하였다.

 

 

조선판 4대강…태안운하 공사의 전말

“암초 때문에 격렬한 파도와 세찬 여울이 휘몰아친다. 안흥정 아래 물길이 열 물과 충돌하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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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안반도 조운로 *곽호제(2004)

 

  ▶의항(蟻項) 운하

  의항운하는 관장목을 피하고자 기획했던 운하다. 희대의 사기극으로 끝나고 말았지만 지도를 보면 관장목을 피할 수 있는 수로를 뚫음직한 위치인 것은 틀림이 없다. 위 그림에서 볼 수 있듯이 의항운하는 근소만과 소근진성 앞 바다를 잇고자 했던 운하다. 소원면 송현 2구에서 의항(蛾項)의 '개목'으로 가는 중간쯤인 송현 3구의 '구먹마을' 에서 '수유동(水踰洞)'으로 넘는 나즈막한 고개가 하나있다. 이 고개가 바로 '무너미재' 고개인데 계획대로 되었다면 이곳으로 조운선이 넘나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고개 이름이 '무너미재'이다. 하지만 이곳을 운하로 바꾸기 위한 시도가 있었는지는 확인이 되지 않는다. 기록(『중종실록』) 에만 전할 뿐 판 흔적이라고는 하나도 찾을 수가 없다. 그런데도 '무너미재'라는 이름을 얻은 것은 참 알 수 없는 일이다. '무너미재' 뿐만 아니라 인근에는 '곳집재', '水踰洞' 등 운하와 관련이 있음직한 이름들이 전한다. 운하는 뚫지 못했지만 사람들을 동원하여 요란하게 공사를 벌이기는 했던 모양이다.

 

[ 지명 및 전설 > 태안의문화 > ]

[소원면] 물이 넘어온다는"무너미재" 소원면 송현 2구에서 의항(蛾項)의 『개목』으로 가는 중간쯤인 송현 3구의 『구먹마을』 에서 『수유동(水踰洞)』으로 넘는 나 즈막한 고개가 하나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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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흥량(安興梁)의 위치와 운하(運河) - 서산시대

취허당(聚虛堂) 한기홍의 서산갯마을 조운선의 대표적 난행처로 알려진 곳인 안흥량(安興梁)은 좁게는 안흥 앞바다를 일컫는 말이지만 넓게는 태안군에 접한 바다 전체를 의미한다. 『조선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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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담양 부사 이현을 파출시키고 삭직시키다 : 「中宗實錄」34년 6월 丙午

  憲府啓曰: "潭陽府使李俔, 兇險狂悖, 自恃外戚, 內交宦官, 外結兇黨, 假威肆毒, 人畏之如豺虎, 莫敢議其是非。 犬項蟻項之役, 【俔爲都廳。】 多受僧人之賂, 專不趁役者, 多給號牌。 又將蟻項役所器物, 私築海澤, 其縱恣無忌如此, 而反受賞賜, 人莫不痛憤。 當初兇黨之誅, 欲幷治此人, 而朝廷要務安靜, 姑置不問。 若在都下, 則慮有生事, 人反以出外爲幸, 今者猶不畏戢, 貪縱殘虐, 托稱私獻, 駄載輸京, 至爲汎濫。 請罷黜削職。" 答曰: "如啓。"

  헌부가 아뢰기를,

  "담양 부사(潭陽府使) 이현(李俔)은 음흉하고 막되어 자신이 외척(外戚)임을 믿고 안으로는 환관(宦官)과 교결하고 밖으로는 흉당(凶黨)과 결탁, 위엄을 빌어 흉독을 부리므로 사람들이 호랑이 보듯 두려워하여 아무도 감히 시비(是非)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견항(犬項)과 의항(蟻項)의 역사(役事) 【이현이 도청(都廳)이었음.】 때 많은 뇌물을 받고 전혀 역사에 나오지 않은 중들에게도 호패를 발급한 일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의항의 역사 때에 나오지 않은 중들에게도 호패를 발급한 일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의항의 역사 때에 쓰던 기물(器物)을 가져다가 사적으로 간석지(干潟地)를 막는 데 썼습니다. 이처럼 아무 거리낌없이 방자히 구는데도 도리어 상을 받으니 통분해 하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당초 흉당들을 주벌(誅罰)할 적에 이 사람도 아울러 다스리려 하였으나 조정이 안정되기에 힘썼으므로 우선 불문에 붙여두었습니다. 만약 도하(都下)에 있었다면 일을 만들까 우려했을 것이지만, 외임으로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두려워 조심하지 않고 탐오하고 잔폭한 짓을 멋대로 하여 봉헌(奉獻)을 칭탁하면서 짐바리를 서울로 실어나르고 있으니, 매우 외람된 짓입니다. 파출시키고 삭직(削職)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 소근진성

  의항운하가 완공되었다면 소근진성의 역할이 매우 컸을 것이다. 그렇지 못했음에도 이곳에 진성(鎭城)이 있는 것은 운하가 없는 상태에서도 방어상 쓸모가 컸었다는 뜻이다. 소근진성은 고려말 이후 준동하던 왜구를 막기 위해 설치되었으며, 조선시대에는 이곳부터 당진까지 해안을 지키면서 조운선을 보호하는 역할을 겸하였다. 수군첨절제사(종3품)가 관할했던 것으로 보아 방어상 중요한 곳이었음을 알 수 있다. 

소근진성 *1872지방지도(태안)

 

소근진(所斤鎭) - sillokwiki

조선시대 충청도 태안군에 설치한 수군의 거진(巨鎭). 개설 소근진은 1467년(세조 13) 충청도 태안군 원서면에 있는 좌도도만호(左道都萬戶)의 진 오근이포가 첨절제사진이 되면서 명칭도 변경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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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근진성 앞 만과 수망산(140.2m). 사진에서 만의 왼쪽이 의항운하터와 이어진다.
소근진성 동문
소근진성
종3품의 수군첨절제사가 파견되었던 수군기지인 소근진(所斤鎭)이 짙고 큰 물방울 모양으로, 안흥진(安興鎭)이 흰색의 큰 원으로 표시되어 있다. 안흥진은 근흥면 서쪽 절반의 독자적인 관할 영역을 갖고 있던 독진(獨鎭)이었기 때문에 구분하여 표시해준 것이다. 소근진의 所斤은 所斤浦에서 왔는데, 순우리말 이름인 '석은이개'에서 음차한 것이다. (이기봉, 「호서읍지」 해제, 서울대학교 규장각)

 

충청남도 기념물 태안소근진성 (泰安所斤鎭城) : 국가문화유산포털 - 문화재청

문화재 검색 충청남도 기념물 태안소근진성 (泰安所斤鎭城) 해당 문화재의 정보입니다. 분류, 수량/면적, 지정(등록)일, 소재지, 시대, 소유자(소유단체), 관리자(관리단체)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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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여도」

 

[드론 영상] 소근진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