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답사 경로
안흥진성(용굴 - 서문 - (성벽길) - 태국사 - 북문 - 동문 - 남문) - 안흥항 - 안흥나래교 - 태안해양유물전시관 - 신진도항 - 물넘이고개(무너미재) - 소근진성
▣ 안흥량과 안흥진성
▶ 끊임없는 해난사고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규모가 큰 조운선 사고를 간추려 보면, 태조 4년(1395) 경기도 조운선 16척이 난파되었고, 태종 3年(1403)의 5月 경상도 조운선 34척의 침몰과, 같은 해 6月에는 경상도 조운선 30척의 침몰과 함께 1천명이 사망하고 1만석이 손실되었다. 태종 14년(1414) 8月에는 전라도 조운선 66척이 침몰하여 200여명이 익사하고, 미곡 5,800여석이 수장되었다. 세조 1년(1455)에는 전라도 조운선 54척이 수장되었다.
▶ 원래 이름은 '難行梁'이었다
얼마나 험했으면 난행량이라 했을까?
안흥량은 조류가 빠른데다 가운데에 사주가 발달하여 사주가 있는 곳은 수심이 얕다. 물이 빠지면 겉으로 드러나므로 피할 수 있지만 오히려 물밖으로 드러나지 않는 물때에는 암초가 된다. 그러므로 물때를 잘 맞춰야 하고, 물길을 잘 모르면 배가 좌초될 수도 있다. 안흥량 인근에는 안파사(安波寺), 징미산(拯米山) 등의 지명이 전하는데 이들은 조운선 침몰에서 비롯된 지명으로 짐작된다.
조선시대 일어났던 사고 규모가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상식을 넘어선다. 34척의 배가 침몰하여 1,000여명의 병사가 죽고, 10,000석의 양곡이 가라앉았다고 한다면 조정의 재정에도 큰 영향을 미칠 정도이다. 그러니 안흥량에 대한 대책을 세우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굴포운하, 의항운하, 안면운하 등은 이런 맥락을 이해 해야 한다.
▶ 더 큰 장애물은 관장목이었다
당시의 항해술로는 시속 4노트의 조류를 헤치고, 폭 830m의 좁은 수로를 암초에 부딪치지 않고 항해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위 사진에서 볼 수 있듯이 안흥량은 썰물때가 되면 물길 한가운데에 사주가 드러나는데 뱃길을 잘 알지 못하면 이런 지형들이 배가 다니는데 큰 위험 요소였다.
그런데 사실 더 위험한 곳은 안흥량보다는 관장목이었다. 안흥량 동쪽에 있는 안흥진은 조운선이 꼭 들러야 하는 곳이었다. 이 항로에서 가장 위험한 곳은 관장목이었기 때문이다. 관장목은 소원반도의 끝인 所遠面波濤里 남단에 있는 좁은 해협으로 冠丈項(『萬機要覽』재용편 漕轉條), 關障項(『東國名山記』湖中山水安興鎭條), 灌頂巖(『한국지명총람』4, 충남편(하)), 官首角(『1/50,00 地圖』, 삼능공업사), 꼬챙이뿌리(자연지명)로도 불리우며, 꼬챙이뿌리의 서쪽 수면 아래에 꼬챙이섬이 있다.
관장목은 파도리와 섬 사이의 좁은 해협으로 빙하기에는 이어진 산줄기였다. 후빙기 해수면이 올라오면서 물에 잠겼지만 원래 산줄기였으므로 수면 아래에 높고 낮은 기복이 있을 수밖에 없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암초들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지질도에서 구조선의 방향을 보면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물길이 낯선 외부인들(아마도 조선초기 조운체제가 정비되어가던 무렵에는 수군들이 가지고 있던 정보가 많이 부족했을 것이다)이 낭패를 당하기 십상이었을 것이다.
관장목을 통과하기 위해 조운선은 모두 안흥진에 들러 관장목을 통과할 수 있는 물때를 기다렸다. 썰물때가 되면 물이 북쪽에서 남쪽으로 흐르기 때문에 배가 물살을 거슬러 올라 가야만 했다. 그래서 밀물을 이용해야 하는데 수심이 사주와 암초를 덮을 만큼 올라와야 하므로 그 시간이 아주 짧았다. 조곡을 가득 실은 배를 몰고 안흥진을 출발하여 관장목을 통과하려면 바람도 때맞춰 불어줘야 했으므로 매우 힘든 여정이었다.
▶ 관장목을 통과하기 위해 워밍업을 하던 곳 안흥진
워낙 뱃길이 멀어서(2월에 시작하면 먼 곳(경상도)의 세미는 5월에나 한양에 도착했다) 중간에 배를 점검 받아야 했는데 30척 1綜으로 선단을 꾸려 도착과 출발할 때 점검을 받았다. 특히 태안반도는 밖으로 튀어나와 있어서 조류와 파도가 거세고 운항거리가 길었으므로 태안반도에 들어서기 전에 원산도에 들러 점검을 받았다. 원산도를 떠나 안흥진에 이르면 조운선들은 또 안흥진에 들러 숨고르기를 했다. 안흥진은 조운로 3대 난코스(울돌목, 안흥량, 손돌목)에 속하는 관장목 바로 앞에 있었으므로 반드시 들러서 점검을 받아야 하는 곳이었다.
▶ 안흥진성 내부구조
▣ 국립태안해양유물전시관: 마도해역에서 발굴된 유물을 전시
▣ 신진도에는 석회암이 있다
▣ 무넘이재와 소근진성
▶ 굴포를 뚫어서 안흥량을 피해가라 : 「世祖實錄」1년 윤6월 癸酉
護軍鄭有臨輪對, 上曰: "常行公事, 一遵條章, 固無可議, 今之輪對, 欲聞律令外遺弊耳, 如有所言, 悉陳無隱。" 有臨曰: "全羅道漕船, 皆敗於安興梁, 未及安興有古蓴城之基, 纔隔七八里亦有永豐倉古基。 若令全羅漕船, 泊於古蓴城基, 陸輸永豐倉, 載船而來, 萬無覆沒之理。 且於蓴城、永豐之基, 俱置倉庫以備雨。" 上曰: "爾言良是。 予當議行。"
호군(護軍) 정유림(鄭有臨)이 윤대(輪對)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상례로 행하는 공사(公事)는 한결같이 조장(條章)대로 준행하고 있으므로 본시 의논할 것이 없지만, 지금의 윤대는 율령(律令) 외의 끼치는 폐단을 듣고자 함이니, 만일 말할 것이 있거든 숨김없이 다 진달하라."
하니, 정유림이 아뢰기를,
"전라도(全羅道)의 조선(漕船) 이 모두 안흥량(安興梁)에서 실패하는데, 안흥(安興)에 못 미쳐서 옛 순성(蓴城)의 기지가 있고, 이에서 겨우 7, 8리를 격해 또한 영풍창(永豐倉) 고기(古基)가 있습니다. 만약 전라도 조선으로 하여금 옛 순성 기지에 정박(定泊)케 하고는 육로로 영풍창까지 수송하고 이에서 다시 선박에 적재해 오게 하면 전복하여 빠질 이치가 없으니, 또 순성과 영풍 기지에 모두 창고를 설치하여 우습(雨濕)에 대비하면 됩니다."
하니, 임금이,
"네 말이 진실로 옳다. 내 마땅히 이를 의논하여 시행하겠다."
하였다.
▶ 굴포운하가 안 된다면 관장목이라도 : 「中宗實錄」17년 1월 丙辰
三道體察使高荊山啓曰: "若鑿泰安 安恒 梁、蟻項, 以通漕船, 則可免覆沒之禍, 而萬世蒙利, 請以水軍鑿之。" 戶曹請依啓, 允之。
삼도 제찰사(三道體察使) 고형산이 아뢰기를,
"태안(泰安)의 안항량(安恒梁)·의항(蟻項)을 굴착하여 조운선(漕運船)이 통행하도록 한다면 침몰하는 화를 면할 수 있어 만세토록 이(利)를 누리게 될 것이니, 수군(水軍)을 동원하여 굴착하기 바랍니다."
하고, 호조가 아뢴 대로 하기를 청하였으므로 윤허하였다.
▶의항(蟻項) 운하
의항운하는 관장목을 피하고자 기획했던 운하다. 희대의 사기극으로 끝나고 말았지만 지도를 보면 관장목을 피할 수 있는 수로를 뚫음직한 위치인 것은 틀림이 없다. 위 그림에서 볼 수 있듯이 의항운하는 근소만과 소근진성 앞 바다를 잇고자 했던 운하다. 소원면 송현 2구에서 의항(蛾項)의 '개목'으로 가는 중간쯤인 송현 3구의 '구먹마을' 에서 '수유동(水踰洞)'으로 넘는 나즈막한 고개가 하나있다. 이 고개가 바로 '무너미재' 고개인데 계획대로 되었다면 이곳으로 조운선이 넘나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고개 이름이 '무너미재'이다. 하지만 이곳을 운하로 바꾸기 위한 시도가 있었는지는 확인이 되지 않는다. 기록(『중종실록』) 에만 전할 뿐 판 흔적이라고는 하나도 찾을 수가 없다. 그런데도 '무너미재'라는 이름을 얻은 것은 참 알 수 없는 일이다. '무너미재' 뿐만 아니라 인근에는 '곳집재', '水踰洞' 등 운하와 관련이 있음직한 이름들이 전한다. 운하는 뚫지 못했지만 사람들을 동원하여 요란하게 공사를 벌이기는 했던 모양이다.
▶ 담양 부사 이현을 파출시키고 삭직시키다 : 「中宗實錄」34년 6월 丙午
憲府啓曰: "潭陽府使李俔, 兇險狂悖, 自恃外戚, 內交宦官, 外結兇黨, 假威肆毒, 人畏之如豺虎, 莫敢議其是非。 犬項、蟻項之役, 【俔爲都廳。】 多受僧人之賂, 專不趁役者, 多給號牌。 又將蟻項役所器物, 私築海澤, 其縱恣無忌如此, 而反受賞賜, 人莫不痛憤。 當初兇黨之誅, 欲幷治此人, 而朝廷要務安靜, 姑置不問。 若在都下, 則慮有生事, 人反以出外爲幸, 今者猶不畏戢, 貪縱殘虐, 托稱私獻, 駄載輸京, 至爲汎濫。 請罷黜削職。" 答曰: "如啓。"
헌부가 아뢰기를,
"담양 부사(潭陽府使) 이현(李俔)은 음흉하고 막되어 자신이 외척(外戚)임을 믿고 안으로는 환관(宦官)과 교결하고 밖으로는 흉당(凶黨)과 결탁, 위엄을 빌어 흉독을 부리므로 사람들이 호랑이 보듯 두려워하여 아무도 감히 시비(是非)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견항(犬項)과 의항(蟻項)의 역사(役事) 【이현이 도청(都廳)이었음.】 때 많은 뇌물을 받고 전혀 역사에 나오지 않은 중들에게도 호패를 발급한 일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의항의 역사 때에 나오지 않은 중들에게도 호패를 발급한 일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의항의 역사 때에 쓰던 기물(器物)을 가져다가 사적으로 간석지(干潟地)를 막는 데 썼습니다. 이처럼 아무 거리낌없이 방자히 구는데도 도리어 상을 받으니 통분해 하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당초 흉당들을 주벌(誅罰)할 적에 이 사람도 아울러 다스리려 하였으나 조정이 안정되기에 힘썼으므로 우선 불문에 붙여두었습니다. 만약 도하(都下)에 있었다면 일을 만들까 우려했을 것이지만, 외임으로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두려워 조심하지 않고 탐오하고 잔폭한 짓을 멋대로 하여 봉헌(奉獻)을 칭탁하면서 짐바리를 서울로 실어나르고 있으니, 매우 외람된 짓입니다. 파출시키고 삭직(削職)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 소근진성
의항운하가 완공되었다면 소근진성의 역할이 매우 컸을 것이다. 그렇지 못했음에도 이곳에 진성(鎭城)이 있는 것은 운하가 없는 상태에서도 방어상 쓸모가 컸었다는 뜻이다. 소근진성은 고려말 이후 준동하던 왜구를 막기 위해 설치되었으며, 조선시대에는 이곳부터 당진까지 해안을 지키면서 조운선을 보호하는 역할을 겸하였다. 수군첨절제사(종3품)가 관할했던 것으로 보아 방어상 중요한 곳이었음을 알 수 있다.
'충청남도 > 태안' 카테고리의 다른 글
[토크 영상] 안면도에 화산이 있다 (0) | 2023.09.23 |
---|---|
[드론 영상] 소근진성 (0) | 2023.08.11 |
[답사 영상] 천수만 : 남당리, 쑤아미섬, 안면도 판목 운하, 밧개, 진대섬, 안면암, 여우섬과 조구널 (0) | 2023.07.17 |
조운선 침몰에 관한 「조선왕조실록」의 기록 (0) | 2023.07.16 |
천수만 : 화산과 운하, 그리고 간척 (0) | 2023.06.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