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남도/태안

조운선 침몰에 관한 「조선왕조실록」의 기록

Geotopia 2023. 7. 16. 21:56

▣ 「太祖實錄」4년 8월 戊辰

忠淸道漕運船十艘, 慶尙道漕運船十六艘, 遇風摧敗

충청도 조운선(漕運船) 10척과 경상도 조운선 16척이 바람을 만나 파선되었다.

 

▣ 「太宗實錄」3년 5월 辛巳

慶尙道漕運船三十四隻, 沒于海中, 人死者甚衆。 萬戶使人搜之, 依島而生者一人, 見之而走, 追執之, 問其故, 答曰: "欲遯去薙髮, 離此苦也。" 上聞之, 嘆曰: "責乃在予。 豈非驅萬人就死地乎? 五日, 於陰陽爲受死, 且風氣甚惡, 非行船日也。 知其風惡而發船, 此實驅民而就死地也。" 問左右曰: "人之死者幾, 米之失幾?" 左右不能對。 上曰: "大槪幾何?" 左右對曰: "米則萬餘石, 人則千餘名。" 上曰: "米雖多, 不足惜也, 人之死者, 甚可憫也。 其室家之心, 爲如何也? 漕運之苦如此, 船軍不堪其苦, 而逃散宜矣。" 右代李膺曰: "陸轉則其難尤甚。" 上曰: "其爲陸轉之難者, 乃以牛馬之勞耳, 不猶愈於人之死乎?" 

경상도의 조운선(漕運船) 34척이 해중(海中)에서 침몰되어, 죽은 사람이 대단히 많았다. 만호(萬戶)가 사람을 시켜 수색하니, 섬[島]에 의지하여 살아난 한 사람이 이를 보고 도망하였다. 쫓아가서 붙잡아 그 까닭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도망하여 머리를 깎고, 이 고생스러운 일에서 떠나려고 한다."

하였다. 임금이 듣고 탄식하기를,

"책임은 내게 있다. 만인(萬人)을 몰아서 사지(死地)에 나가게 한 것이 아닌가? 닷샛날은 음양(陰陽)에 수사일(受死日)이고, 또 바람 기운이 대단히 심하여 행선(行船)할 날이 아닌데, 바람이 심한 것을 알면서 배를 출발시켰으니, 이것은 실로 백성을 몰아서 사지(死地)로 나가게 한 것이다."

하고, 좌우에게 묻기를,

"죽은 사람은 얼마이며, 잃은 쌀은 얼마인가?"

하니, 좌우가 대답을 하지 못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대개 얼마인가?"

하니, 좌우가 대답하기를,

"쌀은 만여 석이고, 사람은 천여 명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쌀은 비록 많더라도 아까울 것이 없지마는, 사람 죽은 것이 대단히 불쌍하다. 그 부모와 처자의 마음이 어떠하겠는가? 조운(漕運)하는 고통이 이와 같으니, 선군(船軍)이 그 고통을 견디지 못하여 도망해 흩어지는 것은 마땅하다."

하였다. 우대언(右代言이응(李膺)이 말하기를,

"육로(陸路)로 운반하면 어려움이 더 심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였다.

"육로로 운반하는 것의 어려움은 우마(牛馬)의 수고뿐이니, 사람이 죽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느냐?"

 

▣ 「太宗實錄」14년 8월 甲辰

夜大風。 全羅漕船六十六艘敗沒, 溺死者二百餘人, 沈水米豆幷五千八百餘石。 七月行船, 古人所忌。 先是, 戶曹移文云: "七月晦時載船, 八月初發送。"水軍都節制使鄭幹從移文, 以致此災。 上怒曰: "戶曹雖不審節氣早晩, 刻期移文, 今年則七月節候, 盡於八月十四日, 奉行者不能審處, 若尾生之抱柱。 其令騎私馬上京。" 上曰: "七月行船, 曾有敎禁, 鄭幹不審節候, 以致覆沒。 其父母妻子悲怨之情, 豈不致傷和氣? 其代鄭幹者, 須擇能者薦之。" 仍命憲府曰: "自今各道官妓毋令越境。 違者本官守令及監司, 皆以敎旨不從論罪。" 以敗船時, 鎭撫所携官妓二人沒死故也。 又遣判繕工監事李漬全羅道, 檢覆敗船時遺失軍器, 究問沒水軍丁, 賑䘏其家。 傳問蓴堤開鑿便否于承政院, 李灌等對曰: "忠淸漕運, 皆輸沔川, 不由安行梁, 獨全羅漕運, 必由是梁, 然致敗恒在於群山等梁。 若從河崙議, 則一月朔望, 潮水止輸二次, 久泊海門, 恐有風變。 且曾力主自遠州至近圻以次轉載之策, 然京畿之民, 自秋徂春, 田租賦役, 殆無虛日, 加之以轉載之役, 則奚暇治生哉?" 上曰: "予已知之矣。"

밤에 큰 바람이 불어 전라도 조선(漕船) 66척이 패몰(敗沒)하여 익사한 자가 2백여인었고, 침수(沈水)한 쌀·콩이 아울러 5천 8백여 석이었다. 7월에 행선(行船)은 옛사람이 꺼리던 바였는데, 이 앞서 호조(戶曹)에서 이문(移文)하기를,

"7월 그믐 때 실어서 8월 초에 떠나 보내라."

고 하여, 수군 도절제사(水軍都節制使) 정간(鄭幹)이 이문(移文)한 것을 따르다가 이러한 재앙(災殃)이 이르른 것이다. 임금이 노하여 말하였다.

"호조에서 비록 절기(節氣)의 빠르고 늦은 것을 살피지 않고 기간을 정하여 이문(移文)하였더라도, 금년은 7월의 절후(節候)가 8월 14일에 다하는데, 봉행(奉行)하는 자가 능히 살피지 못하고 처리한 것이 미생(尾生)의 포주(抱柱) 와 같았다. 정간으로 하여금 사마(私馬)를 타고 상경(上京)하게 하라. "

임금이 말하였다.

"7월에 행선(行船)하는 것은 일찍이 교지(敎旨)로 금지하였는데, 정간(鄭幹)은 절후를 살피지 않아서 배가 뒤집혀 패몰(敗沒)하는데 이르렀다. 그 부모 처자의 슬퍼하고 원망하는 정이 어찌 화기(和氣)를 손상시키는 데 이르지 않겠느냐? 정간(鄭幹)을 대신할 자로서 모름지기 능한 자를 가려서 천거(薦擧)하라."

이어서 헌부(憲府)에 명하였다.

"이제부터 각도의 관기(官妓)는 월경(越境)하게 하지 말라. 어기는 자는 본관(本官)의 수령(守令)과 감사(監司)를 모두 교지(敎旨)를 따르지 않은 것으로 논죄(論罪)하라."

배가 패몰(敗沒)할 때 진무(鎭撫)가 데리고 있던 관기(官妓) 두 사람이 물에 빠져 죽었기 때문이었다. 또 판선공감사(判繕工監事) 이지(李漬)를 전라도에 보내어 배가 뒤집혀 패몰(敗沒)할 때에 유실한 군기(軍器)를 검사하고, 물에 빠진 군정(軍丁)을 구문(究問)하고 그 집에 술금(䘏金) 을 주었다. 순제(蓴堤)를 개착(開鑿)하는 편부(便否)를 승정원(承政院)에 전(傳)하여 물으니, 이관(李灌) 등이 대답하였다.

"충청도 조운(漕運)은 모두 면천(沔川)으로 운수하는데 안행량(安行梁)을 거치지 않으나, 오로지 전라도 조운(漕運)은 반드시 이 안행량을 거쳐야 합니다. 그러나, 배가 패몰하기에 이르는 것은 항상 군산량(群山梁) 등지에 있습니다. 만약 하윤(河崙)의 의논을 따른다면, 한 달에 초하루와 보름에 조수(潮水)가 그치므로 두 차례를 운수하고 오래도록 해문(海門)에 정박하니, 바람의 변(變)이 있을까 두렵습니다. 또 하윤(河崙)은 일찍이 먼 고을에서 가까운 경기 땅에 이르기까지 차례로 전재(轉載) 하는 방책을 힘써 주장하였으나, 그러나 경기의 백성들이 가을부터 봄까지 전조(田租)와 부역(賦役)이 거의 빈 날이 없는데 거기에다 전재(轉載)하는 역사를 더한다면, 어느 겨를에 생업(生業)을 다스리겠습니까?"

임금이 말하였다.

"내가 이미 알고 있다."

 

▣ 「世祖實錄」1년 9월 壬午

京畿觀察使曰: "今見忠淸道觀察使啓本, 全羅道漕船五十四艘, 本月三日過泰安 安興梁, 遭風或全船敗沒, 或不知所向, 予甚軫慮。 計於遠島極浦, 雖有依岸得活者, 無食必至餓死, 其令諸邑, 具船與糧, 窮搜救活, 又令沿海人家, 遇有下陸求食者, 隨至供饋。" 幷諭忠淸全羅道觀察使。

경기 관찰사(京畿觀察使)에게 유시(諭示)하기를,

"이제 충청도 관찰사(忠淸道觀察使)의 계본(啓本)을 보니, 전라도(全羅道)의 조운선(漕運船) 54척[艘]이 본월 3일 태안(泰安)의 안흥량(安興梁)을 지나다가 바람을 만나 혹은 선척 전체가 파손되어 침몰하였거나, 혹은 향방(向方)을 알지 못한다 하니, 내 이를 몹시 진려(軫慮)하는 바다. 먼 섬이나 포구(浦口)에서 비록 언덕을 의지해서 살아난 자가 있어도, 먹을 것이 없으면 반드시 굶어 죽을 것이니, 그 여러 고을로 하여금 선척과 식량을 갖추고서 끝까지 수색하여 구원하게 하고, 또 연해(沿海)의 민가로 하여금 육지에 내려 먹을 것을 구하는 자를 만나거든 이르는 대로 음식을 먹이도록 하라."

하고, 아울러 충청도(忠淸道)·전라도(全羅道) 관찰사(觀察使)에게도 유시하였다.

 

▣ 「成宗實錄」19년 4월 癸卯

全羅道觀察使金宗直馳啓: "法聖漕運船三十一隻致敗, 漕卒溺死, 搜得屍身九名。" 傳曰: "乘船漕卒必多, 其溺死人, 當不止此。 更令搜覓, 其生沒數, 備細閱實馳啓。 且今後發船時, 須令審視風水事, 下書諭之。"

전라도 관찰사(全羅道觀察使) 김종직(金宗直)이 치계(馳啓)하기를,

"법성(法聖)의 조운선(漕運船) 31척(隻)이 파손되어 조졸(漕卒)이 익사(溺死)하였는데, 시신(屍身) 아홉 구를 찾아내었습니다."

하므로, 전교하기를,

"배를 탔던 조졸(漕卒)이 반드시 많을 것이니, 그 익사한 사람이 여기에 그치지는 않을 것이다. 다시 찾게 하여 그 생몰(生沒)의 수(數)를 세세히 갖추고 실제를 조사해서 치계(馳啓)하도록 하라. 또 금후(今後)로 배를 띄울 때에는 모름지기 풍수(風水)를 살펴보는 일을 하서(下書)하여 유시(諭示)하라."

하였다.

 

▣ 「中宗實錄」21년 2월 丁丑

御朝講, 講《大學衍義補》。 侍講官李龜齡曰: "觀武帝漕運之事, 有造作舟車之費; 跋涉河流之苦, 然漕運六百萬石, 則必致六百萬石, 而無敗溺之患。 我國漕船, 年年致敗, 前年敗船, 亦至五六隻。 觀, 後魏時, 於水運之路, 隨便置倉, 遇軍國有需, 應用漕引。 我國逐年漕引, 非但多致敗溺, 漕軍亦, 未休息, 未知何以則得便也?" 

조강에 나아갔다. 《대학연의보(大學衍義補)》를 진강했다. 시강관 이귀령(李龜齡)이 아뢰기를,

"무제(武帝)가 조운(漕運) 한 일을 보건대, 배와 수레를 만드는 비용(費用)과 강물을 발섭(跋涉)해야 하는 고통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6백만 석을 조운한다면 반드시 6백만 석을 가져왔고 파선(破船)하거나 하는 염려가 없었습니다. 우리 나라의 조운선(漕運船)은 해마다 파선하여 지난해에도 5∼6 척이나 됩니다. 살피건대 후위(後魏) 때는 조운하는 수로(水路)의 편리한 곳에다 창고(倉庫)를 설치하였다가, 군국(軍國)의 일로 수용(需用)하게 되면 쓸 만큼만 조운하였습니다. 그런데 우리 나라는 해마다 조운을 하므로 많이 파선될 뿐만 아니라 조운하는 역군들도 쉬지를 못하니, 어떻게 하면 편리할 것인지를 알지 못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