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아산의 지리환경/역사지리

직산현: 삼남과 서울을 연결하는 육상 교통 요지

Geotopia 2020. 10. 28. 23:01

▣ 직산현 연혁 및 범위

 

 

  백제 시조 온조가 졸본성에서 남하하여 직산에 도읍을 정하고 백제를 개국했다는 설(說)이 전해 내려온다. '온조묘기(溫祚廟基)', '위례성(蔚禮城)' 등의 지명이 전해 내려오며 일부는 지금도 남아있다(예: 위례산). 고구려가 백제를 밀어내고 이 일대를 차지해 사산현(蛇山縣)으로 불렀고, 신라통일 757년(경덕왕 16)에는 백성군(白城郡)의 영현이 되었다. 고려 태조 23년(940년)에 직산현(稷山縣)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1505년(연산군 11) 직산현은 평택현·진천현·아산현 등과 함께 충청도에서 경기도로 이속되었다가 중종 초에 다시 충청도에 편입되었다. 1596년(선조 29) 왜구의 침입으로 평택현의 인구가 줄어들자 평택현을 직산현에 예속시켰다가 1610년(광해군 2) 다시 분리하였다. 조선후기에는 오늘날 평택시의 일부를 포함하기도 하였다. 1914년에 천안에 병합되었다. 지금의 성환읍, 입장면, 직산읍, 성거읍 일대이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553호에 인구가 2,111명이며, 시위군(侍衛軍) 40명, 선군(船軍) 254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주변 지역에 비해 인구 및 군사의 규모가 큰 편이었다. 인구는 천안(2,385명), 목천(2,186명)이 더 많았지만 군사의 수는 직산이 가장 많았다. 아산, 온양, 신창, 평택, 안성 등 주변 지역은 인구와 군사 수 모두 직산에 훨씬 못 미친다. 이러한 현상은 직산이 많은 월경지를 거느렸던 것과도 관련이 있다. 즉, 안성천 및 서해 연안에 언리면(堰里面), 경양면(慶陽面), 안중면(安仲面) 등의 월경지가 있었는데 포구가 발달하거나 창고가 있어 인구가 많았으며 특히 군사의 수가 많았다.

  광여도에는 북쪽에 안중창(安仲倉), 경양창(慶陽倉) 등의 창고가 수록되어 있는데 이곳은 안성천 연안(경양면)이나 서해안(안중면)에 있는 창고로 직산의 월경지이다.



[광여도(廣輿圖, 19세기초): 온조묘기, 위례성, 경양창, 안중창 등이 수록되어 있다]
▣ 직산: 피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
  '직산(稷山)', '稷'은 '피', 또는 '기장'을 뜻하는 말이므로 우리말로 직역하면 '피산', 또는 '기장산'이라는 뜻이다. 세간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로는 수리 시설이 열악했던 옛날에 가뭄이 들면 피가 무성하여 '피산'이라고 부르던 것이 한자 표기인 '稷山'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세종실록지리지」에도 지역 농산물(土宜)로 기장(稷)을 가장 먼저 기록하고 있다. 천안, 목천, 아산 등 주변 지역의 토의는 오곡이나 벼로 기록되어 있는 것과 대비가 된다.   직산은 고려 개국공신에게 내린 본관명에서 왔다는 주장도 있다. 고려 개국공신 최양유(崔良儒)는 직산최씨의 시조이다. 즉, 왕건으로부터 '직산'을 본관지로 하사받은 인물이다. 최양유의 고손자 최홍재(崔弘宰, ?~1135)의 묘비 기록에 의하면 '최양유가 사직을 지켜서(社稷之衛) 직산이라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김용선, 2015, 崔弘宰·金尹覺 묘지명, 한국중세사연구(41), 한국중세사학회). '稷'은 '곡식의 신'을 뜻하기도 하는데 '사(社)'와 합치면 '사직(社稷)'으로 '토지신과 곡식신'을 뜻하며 나라를 의미하는 말로 쓰인다. 이 기록을 그대로 따른다면 '稷山'은 '곡식 신의 땅'이 된다. 하지만 왕건의 사성(賜姓)은 호족의 본거지 지명을 본관으로 내렸기 때문에 그 이전부터 '직산'과 관련된 이름이 있었다고 봐야한다. 즉, 공신에게 부여하는 본관 지명이었으므로 보다 큰 의미를 부여하여 이름을 내렸을 가능성이 크다.

 

▣ 풍수지리: 부엉바위와 도영지

 

  읍치는 직산면 군서리 일대로 지금의 직산초등학교가 동헌이 있던 곳이다. 읍치 뒤쪽의 사산(蛇山)이 진산이다. 읍치 주변에 '연지(蓮池)', '도영지(倒影池)' 등의 연못이 있다. 동헌 남쪽 1km 지점에 남산이 있고 그곳에 '부엉바위(鵂鶹巖)'라는 큰 바위가 있다.

  부엉바위는 하루에 곡식을 천 석이나 먹어치울 형세여서 직산 고을이 가난하게 된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왔다고 한다. 이에 부엉바위의 기를 누르기 위해 도영지를 팠다고 한다(「광여도」 참조). 도영지는 '그림자가 뒤집어진 못'이라는 뜻으로 부엉이를 거꾸로 비치게 하여 쌀을 먹어치우지 못하게 하므로써 바위의 기를 눌렀다고 전해진다.

  남산과 관련하여 남산장수와 섬바위 장수 전설도 전해진다. 두 장수가 힘자랑을 하다가 바위 던지기 시합을 했는데 남산 장수가 던진 돌은 섬에 떨어져 섬바위가 되고, 섬바위 장수가 던진 돌은 남산 위에 떨어져 부엉바위가 되었다고 한다. 남산의 바위에는 장수가 오줌을 누었다는 요강자국, 누웠던 자리 자국, 타고 다니던 말 발자국 등이 있다.

  부엉바위는 북동-남서방향으로 관입한 맥암류가 노출되어 만들어진 바위이다. 정확한 형성 시기는 미상이지만 형태와 구조가 아산의 어금니바위와 유사하다(☞ http://blog.daum.net/lovegeo/6781299). 직산읍 군동리 희홍밸러뷰 아파트 103동 뒷편으로 올라갈 수 있다.

 

 

 

[부엉바위 일대의 지질구조]

 

▣ 육로의 요충지

 

 

 

  삼남대로가 통과하는 교통의 요지

 

   직산은 삼남대로가 통과하던 곳이다. 삼남대로 조선의 10대로 가운데 하나로 한성에서 해남에 이르는 길이었다. 또한 아산, 둔포, 목천, 안성, 죽산 등으로 이어지는 길이 삼남대로로 연결되어 차령산지 북부에서 손꼽히는 교통의 십자로였다. '피산'이라고 불리웠고 부엉바위 전설이 전해내려오는 등 농업 생산이 풍부하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되지만 직산현은 교통의 요충이어서 국가적으로 중요도가 높은 지역이었다.



 

 

 

 [東輿」(1856~1861) *「동여」는 「대동여지도」 판각 원본으로 추정되는 지도임]

[조선시대 10대로 *자료: 옛길 박물관]

 

 

  성환도(成歡道)

 

   직산 읍치 북서쪽에 위치한 성환역(成歡驛)에는 성환도가 설치되어 인근 12개 역을 관장하였다. 찰방(察訪, 종6품)이 관장하던 역도로 성환(成歡)-천안(天安)-공주(公州)-여산(礪山)으로 이어지는 역로와 공주와 연기(燕岐)·예산(禮山), 천안과 목천(木川)을 잇는 역로를 관할하였다. 현감의 품계가 종6품이었으므로 성환역은 상당히 중요한 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성환역에는 東軒, 作廳, 將廳 등을 갖춘 관아가 있었고 인근에는 시장(成歡市)도 발달하고 있었다.


[성환도 관할 역 *원도: 대동여지도


[성환역 관할 역  *자료: 실록위키]


[조선시대 주요 역도  *자료: 옛길 박물관]
  ◈ 온양온천으로 향하던 왕의 행차로

   직산읍치 내부에는 영소정(靈沼亭)이 있었는데 1665년(현종 6)에 왕이 온양온천으로 거동할 때 지은 행궁의 일부이다. 주변에 못을 파고 연씨를 뿌린 후 이름을 붙였다. 숙종은 이 곳에 시를 지어 달았다고 전해진다. '왕이 영소에 계시니, 고기들이 가득히 뛰노는구나(王在靈沼於牣魚躍)' 라는「시경(詩經)」문구에서 유래한 이름으로 왕이 선정을 펼치고 있다는 의미를 담은 이름이다. 「광여도」에 영소정과 연지가 수록되어 있다.
   봉선홍경사갈기비(奉先弘慶寺碣記碑): 너른 들판에 세워진 절

 

   직산 일대는 산지가 적고 넓은 들판이 펼쳐져 있다. 전통적인 입지관으로 볼 때 배산임수형의 좋은 자리는 아니다. 하천 연안의 넓은 들은 현재 생산성이 높은 농경지로 이용되고 있지만 수리시설이 충분하지 않았던 시대에는 치수가 어려워 사람이 살기 적당하지 않았다. 1872지방지도에는 곳곳에 제언들이 자세하게 표시되어 있는데 환경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이 활발했음을 보여준다. '피산'이라는 이름이나 부엉바위 설화도 이러한 자연환경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봉선홍경사가 세워진 연유에는 이러한 자연환경도 영향을 미쳤다. 즉, 국가적으로 중요한 도로가 통과하는 곳임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많이 살지 않아서 도적떼가 자주 출몰했고 이를 막기 위해 큰 절을 지었다는 것이다. 봉선홍경사갈기비가 서 있는 자리는 고려시대 사찰의 입지와 기능을 추측해볼 수 있는 위치이다. 봉선홍경사터 일대는 성환천에 의해 만들어진 범람원으로 해발고도가 낮고 산이 없다. 일반적인 사찰의 입지와는 판이하게 다른 위치이다. 고려 시대 당시에 사철은 여행객들에게 편의를 제공하기도 하였는데 봉선홍경사에는 '경연통화원(慶緣通化院)'이라는 80여 간에 달하는 객관 건물을 짓고 여행자들에게 편의를 제공했다고 한다.

 

 

[1872 지방지도]

 

☞ 碣記碑??

 

  비(碑)와 갈(碣)은 원래 비교적 명확히 구분이 되었다. '방비원갈(方碑圓碣)'이라 하여 네모난 것은 ‘비’라 하고 둥근 것은 ‘갈’이라 구분하였다. 당대(唐代)에는 관직이 4품 이상은 귀부이수(龜趺螭首

)인 비를 세우고, 5품 이하는 방부원수(方趺圓首)인 갈을 세우도록 규제하였다. 또한

 갈은 일반적으로 비보다 규모가 작은 것을 말하며 대개 머릿돌이나 지붕돌을 따로 얹지 않고 비의 끝부분을 둥글게 처리한다. 이처럼 본래 비와 갈은 위계가 있었으나 후대에 와서는 구분하지 않고 쓰였다.

  봉선홍경사갈기비는 현종이 '奉先弘經寺碣記'라는 전액(篆額)을 사명(賜名)하여 비로 세운 것이다. 이 비는 거북받침돌과 머릿돌을 모두 갖추고 있어 일반 비의 형식과 다르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