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아산의 지리환경/역사지리

아산현: 도로와 포구가 만나던 곳

Geotopia 2019. 10. 24. 04:55

▣ 연혁


  백제시대에는 아술현(牙述縣)이었고, 통일신라 경덕왕 16(757년)때에는 음봉현(陰峯縣)이었다. 고려 태조 23년(940년) 인주(仁州)로 고쳤다가 1018년(현종 9)에 다시 아주(牙州)로 고쳤다. 조선 초인 1413년(태종 13)에 아산현(牙山縣)이 되었다. 아산의 별호는 영인(寧仁)이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온양군, 신창현과 통합되어 아산군이 되었다.


[1872 지방지도 아산현]

   

 ◈ 아산이 염티다


   엄술(아술)=음봉=엄티=아산=염티>염치


▣ 교통의 요충지: 내포(內浦, 안개)와 도로


  아산은 전통적으로 교통의 요충지였다. 읍치(邑治)가 지금은 철도와 도로 등 주요 교통로에서 벗어나 있었지만 수로 교통이 중요했던 시대에는 교통이 발달한 곳이었다. 특히 공세곶(貢稅串)은 조선시대에 세곡의 집산지로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곳에는 공세곶창(貢稅串倉)이 설치되어 충청도 일대의 세곡(稅穀)을 수납하여 한성의 경창(京倉)으로 운송하는 기능을 담당하였다. 『경국대전』에 수록된 조선 전기 전국 9개 조창 중 한 곳으로 내륙수로의 요충이었다. 조세의 금납화(1679, 숙종5, 作錢規定)로 점차 기능이 축소되기 시작하여 19세기 초반에 이르러 조창의 기능이 완전히 폐지되었으나 조선시대 거의 전 시기에 걸쳐 국가적으로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창이 설치된 후 장사치들이 모여들어 공세리 일대는 상당히 번창했던 곳이기도 하다. 공세창(貢稅倉), 공진창(貢津倉), 아산창(牙山倉)이라고도 한다.

  공진 외에도 아산현 관내에는 많은 포구들이 있었다. 『대동여지도』에 의하면 곡교천 연안에 중방포(中方浦), 견포(犬浦), 안성천 연안에 백석포(白石浦), 시포(市浦), 둔포(屯浦) 등의 포구들이 수록되어 있다. 이를 통해 아산이 조선시대까지 내륙수로 교통의 요충지였음을 알 수 있다.

  포구가 발달하면 이와 연결하는 도로가 발달하기 마련이다. 공진은 세곡을 수합하기 위해 내륙의 여러 지역과 연결이 되었다. 아산만의 당포(唐浦)는 안성천 하류를 건너 경기도 수원부를 연결하는 대표적인 포구였는데 직산현, 온양군에서 당포로 연결되는 도로가 발달하고 있었다. 충청도 서부 지역을 포괄했던 수영도(水營道) 역시 아산현 관내에서 갈라져 당포로 연결되었다. 곡교천 연안의 중방포와 게바위나루(犬浦)는 내포지역에서 경기도로 향하는 도로를 연결하였다. 아산현 관내 최북단에 위치한 둔포는 직산, 평택, 아산, 온양, 수원 등 주변의 읍치들과 연결되는 교통의 십자로였다.

  충청수영에서 호남로를 연결하던 수영도는 충청 서부지역을 관통하는 대표적인 도로였는데 곡교(曲橋)를 건너 아산현 관내로 진입하여 영인지맥의 어리목고개를 지나 요로원(要路院)을 거쳐 둔포-평택으로 이어졌다. 요로원은 수영도와 아산-직산을 연결하는 도로가 교차하던 지점으로 규모가 큰 원(院)취락이 발달하고 있었다.


[대동여지도]


▣ 아산만의 포구들


 백석포(白石浦)


   백석포(白石浦)는 아산만과 아산군 치소(治所)를 연결하는 주요 포구였다. 포구가 있던 바닷가에 흰(白石)이 있어서 백석포라고 불렀다. 일설에는 인접한 산꼭대기에 흰 돌이 있어서 이 산을 백석산이라고 불렀으며, 백석산 앞에 있던 포구도 산의 이름을 따서 백석포라 불렀다고도 한다. 하천 양쪽으로 너른 들판이 펼쳐져 있어서 '한들'이라고 했던 것이 입말로 이어져오다가 '흰돌'로 와전되었을 수도 있다. 즉, '한들' > ('힌들'?) > '흰돌' > '白石'으로 바뀌었을 수도 있다(공근식선생님). 포구에 '흰돌'이 있었던 것도 분명한 사실이므로 두 가지 사실이 함께 작용하여 지명이 만들어졌을 가능성도 있다.

  서해안은 조석간만의 차가 커서 항구 발달에 불리한데 백석포는 낮은 구릉성 산지가 해안까지 뻗어 곶을 이루고 있어서 항구가 발달할 수 있었다. 영인산, 금산, 고룡산 등에서 발원한 하천(주천)이 백석포로 흘러드는 것도 포구가 발달하는 데 유리한 조건이 되었다.

   백석포는 안성천을 건너 수원(조선시대에는 안성천 건너편은 수원부에 속했다)으로 연결되는 경로상의 포구였다. 이와 관련하여 백석포리는 조선 정조 때 수원 화성 공사 부역을 피해 도망친 사람들이 모여들어 만들어진 마을이라는 이야기가 전한다. 백석포는 상류의 당포나 하류의 공세곶포에 비해 늦게 발달한 포구로 18세기 중반(1745~1765)에 만들어진 지도인 「비변사인방안지도(備邊司印方眼地圖)」에는 수록되어 있지 않다. 수원 화성은 1794년 1월에 착공하여 1796년 9월에 완공하였으므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맞다면 백석포리는 대략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반에 형성된 마을이며 포구도 비슷한 시기에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청일전쟁 때 청군이 상륙한 곳으로 잘 알려져 있으며 일제강점기를 거쳐 해방 이후까지 포구의 기능을 하였으나 1974년 아산만 방조제가 완공되면서 포구로서의 기능을 상실하였다. 현재 백석포 일대는 모두 간척이 되어 드넓은 평야지대로 탈바꿈하였다.



[「비변사인방안지도」(18세기 중반). 공세창과 당진포가 표시되어 있고 백석포는 표시되어 있지 않다]


 ◈ 당포(唐浦)


   당포(唐浦)는 영인면 창용리 안성천 하류에 있던 포구이다. 비변사인방안지도』(18세기 중엽)에는 아산현 읍치에서 북쪽으로 20 지점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당진포(唐津浦)’로 표기되어 있다. 아산만 입구의 당진은 통일신라시대 중당나라와 교류하던 곳이어서 당진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하는데 창용리 당진포도 같은 기능을 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하지만 '당(唐)'은 포괄적으로 '중국'을 의미하기도 하므로 이곳이 중국과 교류도 이루어지던 곳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당포는 대동여지도에는 수록되어 있지 않지만 김정호가 제작한 필사본 지도인 청구도에는 수록되어 있는데, 대동여지도에 시포(市浦), 백석포(白石浦), 공진(貢津) 등의 나루가 수록되어 있는 것에 비춰보면 상대적으로 중요도가 떨어졌던 포구로 추정된다.

   이 마을은 지금도 당개라고 하는데 唐浦를 우리말로 표현한 이름이다. 조선시대 당포 일대는 숭어가 유명하여 진상품으로 지정되었는데 모두 왕실에 진상을 하고 마을 사람들은 거의 숭어를 맛볼 수 없었다고 한다. 백석포와 마찬가지로 당포 역시 아산만 방조제 건설 이후 간척되어 농경지로 이용되고 있다


 ◈ 시포(市浦)


   둔포면 시포리 둔포천 연안에 있던 포구이다. 포구 남쪽 약 120m 지점에 있는 용당산에서 북쪽으로 뻗어내린 야트막한 구릉이 곶(串)으로 돌출한 곳에 포구가 발달하였다.

  시포는 안성천 하안의 포구 가운데 유서가 깊은 포구로 기록에 의하면 최소한 고려 중기부터 포구 기능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명종2년(1172) 천안부의 속현이었던 아주현이 분리되었는데 이 때 시포 일대가 천안부의 월경지(모산부곡)로 남게 되었다. 시포는 당시 모산부곡에 속했던 마을로 기록되어 있다(「여지도서」).

  둔포가 번성하기 전부터 발달했던 포구였으나 개항기 이후 둔포로 수로 교통의 중심이 이동하였다. 「대동여지도」에는 시포와 둔포가 모두 표시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19세기 후반까지는 포구 기능을 유지했던 것으로 보이지만 1919년 지형도에는 물길이 닿지 않는 것으로 표시되어 있다. 안성천 하안의 많은 포구들이 아산만 방조제 건설 이후 기능을 잃은 것과 달리 시포는 20세기 초반에 그 기능을 상실했음을 알 수 있다. 하구 퇴적과 함께 개항 이후 둔포가 빠르게 성장하면서 기능이 겹치는 시포가 도태된 결과로 보인다.



[20세기 초반 시포· 둔포 일대 *자료: 조선총독부(1919)]


 ◈ 둔포(屯浦)


   둔포는 조선 후기 아산현, 평택현, 직산현 등의 내륙 지역과 아산만을 연결하는 대표적인 포구였다. 안성천의 지류인 둔포천의 밀썰물 구간에 위치하여 배가 드나들기에 유리하였기 때문에 조선 후기부터 포구로 발달하기 시작하여 일제강점기에 번성하였다. 둔포는 둔포천에서 배가 운항할 수 있는 마지막 지점(可航終點)이었다. 보통 가항종점에 위치한 포구에서는 내륙 지역의 생산물과 바다 생산물이 활발하게 교류되었는데 특히 둔포는 소금을 매매하는 곳이어서 소금배들이 많이 드나들었다아산현 삼북면(三北面)이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둔포면으로 개칭되었다한 개의 마을이었던 둔포리가 면 이름이 되었다는 사실은 당시 수로 교통의 요지로서 둔포의 위치를 잘 보여 준다.

   조선시대 아산현 삼북면 둔포리 일대는 수영로를 비롯한 여러 도로들이 교차하는 육상 교통의 요지였다일제강점기에는 식민지형 교역에 포구가 활용되기 시작하면서 둔포의 역할이 이전보다 훨씬 커졌다. 이에 따라 삼북면 소재지에서 서쪽으로 10 정도 떨어져 있던 둔포가 이 일대의 경제적, 행정적 중심지가 되었다. 하지만 광복 이후 근대 교통수단이 일반화되면서 서서히 포구로서의 기능이 축소되다가 아산만방조제가 건설된 1974년 이후 포구의 기능을 완전히 상실하였다. 둔포의 포구 기능이 상실됨에 따라 둔포면의 상업적 중심성도 포구 기능이 활발했던 때에 비해 크게 축소되었다.

 

▣ 방어상의 요충지, 그러나 성(城)이 설치되지는 않았다


  해안에 인접하여 방어상 필요성이 컸음에도 불구하고 아산현에는 읍성이 설치되지 않았다. 안성천 하구에 위치한 공세곶창에 성이 설치되어 있어 방어진지 역할을 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병인양요 이후에는 전국의 연안에 포군(砲軍)이 설치되었는데 아산현에도 포수청(砲手廳)이 백석포 해안에 설치되었다(1872 지방지도).


  읍치의 남쪽에 있는 영인산(靈仁山)이 고을의 진산(鎭山)으로 고을이 전체적으로 북동향을 하고 있지만 북서쪽으로 수구(水口)가 잘 열려 있어 배산임수의 명당으로 인식되기도 하였다. 물이 빠져나가는 북서쪽을 제외하고는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방어에 유리한 지형구조를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