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남도/부여

사비 천도, 백제 중흥을 위한 선택

Geotopia 2022. 9. 21. 10:36

▣ 웅진 천도: 백제의 쇠락, 그러나 왕조의 멸망을 막은 궁여'비'책


  한강 유역을 장악하고 5백여 년 굳건한 역사를 지켰던 백제는 고구려 장수왕(412-491)의 침입으로 위례성이 함락되면서 역사의 대전환을 겪게 된다. 493년간(BC18~475)의 한성백제 시대가 막을 내리고 도읍지를 웅진으로 옮긴 것이다. 왕(개로왕(455-475))이 살해되었으므로 사실상 왕조가 막을 내릴 큰 위기였으나 태자(부여문주)가 몸을 피해 대통을 이음으로써 왕조의 멀망은 막을 수 있었다. 웅진 천도는 백제의 쇠락을 의미하지만 한편으로는 왕조의 멸망을 막은 한 수이기도 했다. '신의 한 수'라고 할 수는 없지만 이후의 짧지 않은 백제 역사를 생각하면 궁여지책으로 평가절하 할 수만은 없다.

  훗날 의자왕 이후 백제부흥운동 과정과 비교하면 문주가 개로왕의 명으로 도망칠 수 있었음은 큰 행운이었다. 백제부흥운동의 구심점으로 추대된 풍왕은 왜에서 오래 인질 생활을 했는데 장남도 아니고, 의자왕에게서 합법적인 루트로 정통성을 인정받지 않은 상태였기에 정통성 측면에서 다소 취약했다. 이런 이유로 풍왕이 거국적인 백제부흥운동의 구심점으로 다소 부족했던 것과 달리 문주는 왕이 되기 전에는 상좌평으로써 개로왕을 보좌해 실제 국정에 참여한 경험이 있었다. 문주는 개로왕이 직접 "너는 부디 살아남아서 나라의 계통을 이으라"고 문주의 왕위 계승을 명시했다는 점에서 풍왕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정통성이 있었다. (나무위키)

 

  패배를 예감한 개로왕이 태자 부여문주를 미리 위례성에서 내 보냄으로써 백제의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고구려는 왜 부여문주를 쫓지 않은 것일까? 당시 고구려의 군사력으로 보면 웅진성을 충분히 공격할 수도 있었다. 웅진성은 백제 왕실이 이전부터 확고하게 장악하고 있던 곳이라기 보다는 급작스럽게 정해진 임시 수도였다. 더욱이 이미 그곳에는 오랫동안 세력을 유지해온 호족 세력이 있었기 때문에 왕권은 매우 약했다. 따라서 만약 고구려가 바로 공격을 했다면 매우 위험한 상황에 처했을 것이다. 실제로 장수왕의 측근들은 부여문주를 추격할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 하지만 장수왕은 위례성과 한강 유역을 차지하는 것으로 전쟁을 마무리 짓고자 하였다.

고구려가 더 남쪽으로 쳐내려가지 않은 이유는?


  ▶ 나제 연합군의 완강한 저항

  궁성을 탈출한 부여문주는 바로 웅진성으로 피신한 것이 아니라 동맹관계였던 신라에 도움을 청하러 달려갔다. 당시 신라군은 충청북도 북부 지역을 장악하고 있었으므로 바로 한강 전선에 투입될 수 있었다. 심지어 신라군은 백제 지원군보다 빨리 올 수 있었는데 백제 지원군의 주력은 호남에 있었기 때문이다. 나제연합군은 이후로 한달간 한강 방어선에서 고구려와 대치하였다. 

  ▶ 백제와 왜의 밀접한 관계

  백제와 왜의 밀접한 관계도 고구려가 남진을 하지 않은 원인으로 알려져 있다. 개로왕의 동생인 곤지가 왜로 보내졌었고, 웅진 백제를 중흥시킨 무령왕은 곤지(또는 개로왕)의 아들로 일본에서 태어나서 백제로 건너왔다. 장수왕은 백제와 왜의 이러한 관계를 잘 알고 있었으므로 쉽게 남쪽으로 군사를 움직이기가 어려웠다.


▣ 돌아갈 수 없는 위례성, 왕도로 부족한 웅진성

  웅진성에 자리를 잡은 뒤로 백제는 한성으로 돌아가는 권토중래를 꿈꿨겠지만 외적으로는 고구려의 위세가 막강했고, 내적으로는 천도 후 내란 등으로 혼란을 겪으면서 끝내 꿈을 이룰 수 없었다. 임시로 자리잡은 도읍에서 백제는 5대 64년의 길지 않은 웅진백제 시대를 열게 된다.

◈웅진백제 시대(475~538)

문주왕(475-477)은 3년만에 살해(해구)-삼근왕(13세 즉위477-479/해씨와 대립하던 진씨 세력이 옹립)-동성왕(479-501)-무령왕(501-523)-성왕(523-538/554)


  그러나 공주는 좁은 분지로 터가 좁아서 왕성으로 번성하기가 어려웠다. 북쪽으로는 금강이 흐르고 남쪽으로는 겹겹이 산으로 막혀있어서 방어에는 유리하지만 반면에 밖으로 뻗어 나가기가 어려운 위치였다. 결정적으로 금강의 감조구간에서 훨씬 상류에 있기 때문에 강을 수로로 활용하기가 어려웠다. 게다가 금강이 흘러 넘치는 자연재해까지 잇달았다. 한성으로 돌아갈 수 없다면 도읍을 옮길 수밖에 없는 입지였다고 볼 수 있다. 결국 백제는 웅진 천도 64년만에 사비로 수도를 옮겨야 했다.


  사비로 천도한 이유

  538년(성왕16), 백제는 마침내 천도를 단행한다. 사비 천도를 단행한 이유는 대략 다음의 네 가지 이유로 정리할 수 있다.

 

 

계획 도시 사비

▣ 오랫동안 준비한 도시 사비 웅진에 도읍한 뒤 백제는 세 명의 왕이 잇달아 살해, 또는 정치적 변란을 당하는 혼란기를 겪는다. 문주왕은 천도한지 3년만에 웅진 호족 해구에게 살해를 당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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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웅진성의 한계

  공주는 패전으로 갑자기 옮긴 전시 수도, 또는 임시 수도 성격의 도읍지였다. 산과 강으로 둘러싸인 공주는 방어에 유리한 입지지만 도읍지가 되기에는 좁다. 또한 국력이 약한 상태에서는 한강 유역에 가까워 고구려의 공격을 받을 가능성이 높은 위치였다.

  ▶ 왕권 강화

  웅진으로 천도한 뒤 백제는 한동안 왕권이 흔들리는 불안한 시기를 보냈다. 토착 귀족들의 발호 때문이었다. 문주왕은 집권 3년만에 도착 세력인 해구에게 살해를 당했고, 그 뒤를 이어 13세에 즉위한 삼근왕 역시 겨우 3년만에 세상을 뜬다. 웅진의 대표적인 토착 호족은 해씨와 진씨로 이들의 갈등 관계 속에서 왕이 죽고, 옹립되는 과정을 겪었다. 

  사비 천도를 주도한 세력은 무령왕 가계 집단인 성왕계 왕족들과 측근 관료, 그리고 신진세력 등이었다. 또한 사비 지역의 토착 신진 세력이었던 사씨(沙氏, 또는 沙宅氏) 가문의 정치적 지지에 크게 힘입었다. 이외에도 목씨(木氏)·연씨(燕氏)와 같은 세력이 큰 귀족들이 성왕을 도와 사비천도를 주도하였다. 

  ▶ 국제 교역항 필요

  웅진성의 결정적 단점은 수로가 불편하다는 점이었다. 당시 대규모로 인력과 물자가 이동하기 위해서는 수로가 반드시 필요했지만 웅진은 뱃길이 매우 불편했다. 백제는 당시 중국의 양나라나 왜와 가까운 관계를 맺고 있었으므로 편리한 수로를 확보하는 것이 국력을 회복하고 대외적으로 팽창하는 데 꼭 필요했다.

대왕포터에서 바라본 백마강과 부여

  충청도에서는 금강만이 강줄기가 멀리까지 뻗어 있으나 공주 동쪽은 물이 얕고 여울이 많아 배가 통행하지 않는다. 부여와 은진에서 비로소 바닷물이 들어오고 나가기 때문에 백마강 이하의 진강 일대는 모두 배가 오감으로써 생기는 이익을 거두고 있다.  「택리지」(안대희 역)

  이후 백제는 가야와 신라와 동맹을 강화하고 왜와 교류하면서 국력을 회복하고자 하였다. 사비성은 이러한 백제의 정책을 추진하는 데 적합하였다. 그 일환으로 왜에 불교를 전파하고 오경박사 등 전문가를 파견하는 등 왜와 관계를 돈독하게 하였다. 당시 일본에서는 소가씨가 천황을 능가하는 권력을 구가하고 있었는데 이들과의 관계를 강화하여 친 백제 정권을 유지하는 데 성공하였다. 일례로 법륭사 몽전 비불(봄, 가을에 1달씩 년 2회 공개)은 성왕의 등신불(178.8cm)로 성왕의 아들 위덕왕이 조성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북진 의지

  웅진에 우거한 후 백제는 계속 한강 유역을 되찾는 꿈을 꾸었다. 그러나 당시의 대외적 조건과 백제 내부적 조건은 회복은 커녕 고구려의 공세를 막아 내기에 급급했다. 성왕 즉위 이후에도 여러 차례 고구려의 공격을 받았다. 성왕은 천도 후 국호를 '남부여'라 하여 부여를 계승하고 북진 의지를 표명하였다. 이는 왕권을 강화하고 나아가 백제 중흥을 이룩하고자 하는 원대한 포부였다. 천도 후 공세적으로 전환하여 마침내 성왕16년 고구려 우산성(우벌성, 충주일대로 추정)을 공격하였다. 결과는 참패였지만 백제 중흥을 위한 전환점으로 평가할 수 있다.

  마침내 551년(성왕29) 신라, 가야, 왜(수 만 명이 왔다고 함) 연합군이 고구려를 공격하여 76년만에 한강 유역을 회복하였다. 이는 당시 최대 규모의 국제전으로 천도 후 사비성의 입지를 활용한 백제의 외교력이 거둔 성과였다. 이 전투에서 연합군은 고구려가 한강 유역을 점령하고 거점으로 세웠던 남평양성까지 점령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한강 유역을 신라에게 빼앗기고 말았고, 이후 성왕은 신라 금성을 공격하고자 아들 창(후에 위덕왕)에게 관산성(옥천)을 공격하도록 하였다. 전투를 지원하기 위해 성왕이 관산성으로 가고자 하였으나 첩자에게 노출되어 관산성으로 가는 길목에서 붙잡혀 살해당함으로써 백제의 북진 의지는 꺾이고 말았다. 신라는 성왕의 목을 금성의 북청 계단에 묻고 사람들이 밟고 다니도록 하였는데 이는 성왕의 신과 같은 능력을 누르기 위함이었다고 전한다.

◈ 사비백제 시대(538~660, 123년 간)

성왕(538-554) - 위덕왕(554-598) - 혜왕(598-599) - 법왕(599-600) - 무왕(600-641) - 의자왕(641-660)

◈ 웅진-사비 백제 시대 왕 계보

비유왕
     ㅣ
개로왕 ------------------------------ 곤지 ------------------------- (문주)
     ㅣ                                          ㅣ    
22문주왕 - (사마(무령왕))        25무령왕  - 24동성왕
     ㅣ                                          ㅣ
23삼근왕                                  26성왕
                                                   ㅣ
                                                 27위덕왕 - 28혜왕
                                                                     ㅣ
                                                                   29법왕
                                                                     ㅣ 
                                                                   30무왕
                                                                     ㅣ
                                                                   31의자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