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남도/부여

계획 도시 사비

Geotopia 2022. 9. 30. 09:57

▣ 오랫동안 준비한 도시 사비

  웅진에 도읍한 뒤 백제는 세 명의 왕이 잇달아 살해, 또는 정치적 변란을 당하는 혼란기를 겪는다. 문주왕은 천도한지 3년만에 웅진 호족 해구에게 살해를 당했고, 해씨와 대립관계에 있던 진씨가에 의해 옹립된 삼근왕은 즉위 3년만에 사망한다. 13세 나이에 즉위했으므로 자연사했을 가능성은 낮다. 그 뒤를 이은 동성왕은 비교적 집권 기간이 길었지만 끝내 호족 백가에게 살해를 당했다. 이미 천도가 예정되어 있던 것과 다름이 없었다.


  1달만에 이루어진 웅진 천도와는 달리 사비 천도는 오랫 동안 계획적, 체계적으로 진행되었다. 동성왕은 사비로 자주 사냥을 나가 정황을 살피고 가림성(임천)을 세웠다. 그는 자신이 세운 가림성에 측근 백가를 성주로 임명했다가 그에게 살해를 당하는 역설을 겪었지만 이때부터 사비와 백제 왕실의 인연이 시작되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국력을 회복한 무령왕 때는 사비가 웅진에 필요한 물품을 공급하는 배후 생산지 역할을 하였다.

  성왕은 즉위 초에 사비천도를 결정하고 천도를 체계적으로 진행하였다. 부소산성(扶蘇山城)을 먼저 세우고 이어 간선도로·왕궁·사원 등 도읍지의 기반시설들을 차례로 만든 후 즉위 16년만에 마침내 천도를 단행한다.

▣ 오부오항(五部五巷)의 도시


  당나라의 역사서 「北史」에는 '도성에는 1만家가 거주하고, 5부로 나뉘었는데, 상부, 전부, 중부, 하부, 후부이고, 각 부에는 오항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궁남지에서 출토된 목간에는 서부후항에 사는 '사달사'라는 사람이 땅을 개간한 내용이 적혀 있다. 사비가 오부(五部)로 나뉘어 있고, 각 부에는 오항(五巷)이 있는 이른바 오부오항(五部五巷)으로 구획된 계획도시였음을 알 수 있다.

사비는 바둑판 모양으로 도시가 구획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국립부여박물관

 

▣  왕궁터

 

 


▣ 부여 나성(羅城)

  또한 사비도성 외곽을 둘러싸는 나성을 세웠다. 나성은 수도의 가장 외곽에 있는 성으로 수도 방어 기능과 수도의 경계를 나타내는 역할을 하였다. 사비성은 내부에는 최후방어선 역할을 하는 부소산성이 있었고 외곽에는 나성이 있는 독특한 구조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성은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드문 구조물이어서 '나성'이라고 하면 자연스럽게 '부여나성'을 떠올릴 만큼 거의 고유명사화된 것이 부여나성이다.

부여 나성 안내판

  부여 나성은 평지가 대부분인 사비성의 단점을 보완해 주는 역할을 하였다. 사비 외곽의 구릉성 산지들을 연결하여 자연 지형을 잘 활용하여 성곽을 쌓았다. 사비 전체를 둘러쌌을 것으로 추정하지만 지금 자취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북쪽과 동쪽 부분 6.6km 구간이다.

부여나성 *문화재청

  6.6km 나성을 쌓는데 약 200만 명의 연인원이 필요했을 것으로 추정한다(충남대 고고학과 박순발교수 추정). 백제 멸망 당시 추정 인구가 350만 명(70만호)이었던 점을 고려하면 나성을 쌓기 위해 엄청난 국력이 투입되었음을 알 수 있다. 체계적으로 건설 및 인력 동원 계획을 세워야 가능한 일이었고, 또한 정권이 안정되지 않고서는 이루지기 어려운 일이었다.

부여나성과 능산리사지(사진 오른쪽). 사진 오른쪽 숲은 능산리 고분이다.

 

 

 정림사: 통치 불교의 상징

 

  성왕은 불교를 통치 이념으로 적극 활용하였다. 도덕과 법에 의해 통치하는 이상 군주인 전륜성왕(轉輪聖王)의 개념을 끌어들여 자신의 통치 기반을 튼튼하게 하고자 하였다. '성왕'이라는 왕호가 전륜성왕에서 비롯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으며, 실제로 불교를 장려하고 일본에 불교를 전파하였다는 점에서 전륜성왕과 비슷한 점이 있다. 웅진으로의 천도 이후 위축되어 있던 국가체제를 재정비하여 백제의 부흥을 도모하고자 한 성왕에게 있어 전륜성왕은 이상적인 모델로 비춰질 수 있었을 것이다.
  사비 천도 이후 불교를 통치 이념으로 활용한 사실은 정림사가 세워진 것을 통해 유추할 수 있다. 사비 도성 계획 단계에서 정림사가 세워졌으며, 그 위치는 왕궁 앞 사비성의 중심부에 있었다. 또한 남아있는 유적인 5층석탑을 통해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는데 왕궁에 버금가는 큰 규모로 추정된다. 오층석탑에는 '대당평백제국비명(大唐平百濟國碑銘)'이 새겨져 있다. 대당평백제국비명은 당나라의 신구도행군대총관인 소정방이 백제를 멸망시킨 후에 정림사지 오층석탑에 새겨 놓은 일종의 기공비(記功碑)라고 할 수 있다. 백제의 상징과도 같은 탑을 전승탑으로 바꿈으로써 백제 부흥 운동을 억누르고 지배를 확고하게 하고자 했음을 알 수 있다.

대당평백제국비명 *국립중앙박물관


  성왕은 또한 불교를 내치에만 활용한 것이 아니고 국제 관계에도 활용하였다. 이 또한 불교를 통치에 활용한 예라고 볼 수 있다. 백제에 대한 기록은 「삼국사기」보다 「일본서기」에 더 많이 나오는 경우가 많은데 성왕에 대한 기록은 「일본서기」에 특히 많이 나온다. 그중에서도 불교 전파와 관련한 기록들이 많이 등장는데 성왕은 불교를 활용하여 왜와 밀접한 관계를 만들어갔음을 알 수 있다. 일례로 나가노 선광사(善光寺)에는 성왕이 사비 천도 시기에 야마토 조정에 보낸 불상이 있는데 7년에 한 번만 공개하는 비불(秘佛)로 유명하다. 선광사는 대대로 천황의 친족이 주지를 맡아 오고 있는 절로 백제와 일본의 밀접한 관계를 증명해주는 것과 함께 백제가 불교로써 왜와 외교관계를 돈독하게 했음을 보여준다. 왜와의 이러한 관계는 후에 백제가 한강 유역을 회복할 때 큰 도움이 되었으며, 부흥운동 과정에서도 왜의 지원을 받는 역사적 배경이 되었다.


궁남지: 배후습지를 활용한 인공 연못

  남쪽에는 인공 연못 궁남지가 조성되었다. 궁남지는 천도 당시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무왕 때 만들어진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 일대는 배후습지로서 천도 당시에 이미 자연호가 있었다. 이러한 지형적 특징을 고려하여 도시가 구획되었을 것이다.

궁남지

 


▣ 구드래: 국제도시 사비의 관문

  백마강은 감조 구간의 종점으로 사비 천도의 중요한 자연지리적 배경이 되었다. 사비 천도 이후 백제는 수로를 이용하여 중국, 왜와 활발하게 교류하였다. 구드래는 공격사면인 부소산 바로 하류에 있어서 수심이 깊으면서도 물살이 약해서 천연의 하항으로 적합했다. 그리고 왕궁과도 가까워서 교류에 유리했다. 백제는 조선술이 뛰어나서 왜국에서 백제에 배를 주문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는 사비성이 수로를 배경으로 한 도시였던 것도 하나의 원인이었을 것이다.

사비 백제의 입구에 해당했던 구드래나루가 지금은 유람선 선착장으로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