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남도/부여

백마강 일대의 지형과 역사

Geotopia 2022. 9. 26. 14:29

▣ 규암진 일대 공격사면과 포인트바

  ▶ 공격 사면에 드러난 바위 자온대

  공주 곰나루에서 수북정까지 약 30km 구간에서 금강은 작은 굴곡은 있지만 대체로 직선상으로 흐른다. 이는 구조선을 반영한 흐름으로 한반도의 전형적인 구조선 방향인 북동-남서 방향이다. 부여읍을 감싸고 흐르는 백마강에 이르면 맨 처음 부소산을 만나는데 거대한 화강암 덩어리인 부소산이 흐름을 방해하여 약간 서쪽으로 방향을 튼다. 이때 공격 사면에 해당하는 부소산 북쪽 사면이 침식되어 낙화암으로 대표되는 암벽이 만들어졌다.
  이어 백제교에 이르면 거의 반대 방향인 동남동으로 크게 방향을 튼다. 이곳에도 역시 거대한 화강암 덩어리가 자리를 잡고 있다. 자온대를 필두로 수북정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암반이다. 자온대 일대의 암반도 낙화암 일대와 마찬가지로 백마강의 공격사면에 해당하여 집중적으로 깎여 나간 결과이다. 특히 자온대 일대에서는 백마강이 거의 120도 이상 크게 휘돌아서 흘러 나가기 때문에 하천의 공격에 직접 노출되어 침식을 많이 받을 수밖에 없다.

백마강 일대 지질구조 *한국지질자원연구원
강을 건너던 기능을 다리가 대신하면서 나루가 역할을 잃었다. 수북정에서 바라본 백마강과 백제교

 

 

  ▶ 공격면 아래쪽에 발달한 포구 규암진
 

  배가 드나들려면 하안의 수심이 어느 정도 확보되어야 한다. 백사장 주변은 수심이 얕아서 배가 드나들기 어렵다. 그러나 공격사면은 수심이 깊지만 물살이 세어 배가 드나들기에는 위험하다. 그래서 하항은 대개 공격사면의 바로 아래쪽에 발달하는 경우가 많다. 수심이 확보되면서 물살은 잠잠해지는 곳이다. 규암진은 그런 면에서 전형적인 하항의 입지 조건을 갖춘 곳이다.

  ▶ 감조권과 결합된 입지 조건

규암진 일대의 지형  *국토지리정보원(1996)

  규암진이 나루로 번성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금강의 감조권(感潮圈)이라는 점이다. 백마강은 밀물이 영향을 미치는 마지막 지점이어서 항구가 발달하기에 유리했다. 규암진은 사비시대에도 강을 넘나드는 나루로 쓰였겠지만 특히 일제 강점기에 쌀을 반출해가는 항구로 번성했었다.

  ▶ 퇴적 사면에 발달하는 포인트바(Point Bar)

  물살이 빠른 공격 사면이 침식을 집중적으로 당하는데 반해 공격 사면의 반대쪽인 보호사면(활주사면)에서는 퇴적이 이루어진다. 물살이 공격 사면에 비해 느리기 때문이다. 모래, 자갈 등이 쌓여 공격사면 쪽으로 자라는데 이를 '포인트바'라고 한다. 백마강에서는 규암진 건너편에 포인트바가 넓게 발달한다. 홍수가 나면 물에 잠기지만 평소에는 물이 흐르지 않기 때문에 공원이나 운동시설 등으로 많이 활용하고 있다.

 

[드론영상]포인트바와 공격사면: 백마강

금강 백마강 구간의 공격사면과 포인트바 백마강은 금강의 부여 일대를 일컫는 이름으로 백제 멸망과 관련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소정방이 백마를 미끼로 백제의 수호신인 용(성왕)을 낚아 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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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강 감조권에 발달한 포구들: 대왕포, 규암진, 백강나루(진변리), 구드래

 

백마강의 하항(위로부터 구드래, 진변리, 규암, 대왕포) *조선총독부(1916)

 

 

▶ 금강의 감조권은 하루로부터 70km


  금강의 감조(感潮)구간은 하구로부터 70km까지이다. 그 종점이 바로 부여 백마강 일대이다. 20km 더 하류쪽에 있는 강경이 번성한 포구였던 것은 조수의 영향을 더 충분하게 받았기 때문이다. 부여는 조수의 영향이 미치는 마지막 지점이므로 하루 중에 배를 쉽게 댈 수 있는 시간이 강경에 비해 훨씬 짧다. 하지만 보다 상류지역, 예를 들면 공주에 비하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수상 교통이 편리한 지점이었다.
  사비성의 하항은 구드래였다. 왕궁에 가장 가깝고 감조구간에 해당하여 항구가 발달하기에 매우 적합했다. 또한 구드래는 부소산 하류에 있어서 규암진과 비슷한 입지를 하고 있었다. 구드래 건너편의 백강(진변리) 포구 역시 비슷한 입지였다. 부산(浮山)이 공격사면에 위치하여 수심이 깊었고 그 아래에 포구가 있었다. 백마강 구간의 가장 하류에 있었던 대왕포는 지형적 조건으로는 다른 포구에 미치지 못하지만 가장 하류에 있어서 조수의 영향을 더 많이 받을 수 있었다. 또한 백마강의 동쪽 하안에 있어서 부여로의 접근성이 좋았다.

주요 하천의 가항 거리와 감조 구간 *자료: Hermann Rautensach(1945), 김종규 외 역, 1998, 「코레아」;*A 주운 가능 거리, B 하천 총 길이에 대한 A의 비율, C 여름철 주운 가능 거리, D 감조 구간, E 하천 총 길이에 대한 D의 비율 *

 

대왕포터(사진 가운데 지류와 백마강이 만나는 곳)

  ▶ 왕이 놀던 포구 대왕포

  「삼국사기」에 대왕포에 관한 기록이 등장한다. '무왕이 신료들을 거느리고 사비하 북쪽 포구에 나가니 기암괴석과 기화가 그림 같아 왕이 음주가무를 즐기면서 연회를 베풀고 즐겨 '대왕포'라고 칭하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이 기록에 따르면 대왕포는 부소산 북쪽 어디쯤이 되어야 하며 한자 표기는  '大王浦'가 되어야 한다. 「대동여지도」에는 대왕포가 부여현 남쪽에 '大王浦'로 표기되어 있다. 지금은 '왕포리'라는 마을 이름으로 남아있는데 한자 표기는 '旺浦里'이다. 「1872지방지도」에는 '大旺浦'로 표기되어 있으므로 19세기 후반에 표기가 바뀌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위치는 두 지도 모두 부여현 남쪽에 표기하고 있다. 「삼국사기」가 오기이거나 시간이 흐르면서 위치가 바뀐 결과일 수도 있다.

 

  ▶ 「대동여지도」에 표시된 백마강의 포구들

  「대동여지도」를 통해 금강변의 포구를 살펴보면 왕지진·대왕포·구랑포(부여), 장암진·점다진·낭청진·정포진·남당진·상지포(임천), 저포(석성) 등 많은 포구들이 표기되어 있다. 일제강점기 이후로 급격하게 그 의미를 상실했지만 부여의 역사적 특징을 이해하는 데 있어 금강 수운은 매우 중요한 요소임을 알 수 있다.

<대동여지도> 부여,석성,임천 일대의 포구

 

  「擇里志」를 통해서도 부여가 당시 수로교통이 발달했던 지역임을 알 수 있다. 이 책에서는 부여를 '뱃길이 통하는 곳'으로 묘사하고 있다. 임천군, 홍산현, 석성현 등 오늘날 부여군에 속하는 다른 군현에 대한 기록도 등장한다. 기술을 짧지만 '모시', '수상교통', '사대부 가문' 등 주목할 만한 내용들이 들어있다.

 

  성주산 남쪽은 서천한산임천인데 鎭江가이다땅이 모시 가꾸기에 알맞아서 모시로 얻는 이익이 전국에서 첫째이다강과 바다 사이에 위치하여 뱃길의 편리함이 한양보다 못하지 않다이 일곱(+홍산정산비인남포고을은 풍속이 대략 같고 또 여러 대로 계속 사는 사대부 집이 많다.  
                                                                         「택리지」충청도條(이익성 譯)

 

  모시를 생산하여 이익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수로교통이 발달했기 때문이었다. 당시는 상업 경제가 발달하기 시작했던 때로서 교역이 가능한 곳이 '생리(生利)'에 유리한 곳이라고 이중환은 주장하였다. '풍속이 같다'는 점도 강을 통하여 문화적 교류가 활발했기 때문에 나타날 수 있는 특징이었다.

  석성현에 대한 기록은 다음과 같은데 농업에 불리한 기후이지만 '교역에 유리한 위치'임을 특징으로 부각시키고 있다.

 

  석성은 들에 위치하였으나 땅이 메마르며 수재(水災)와 한재(旱災)를 자주 당한다. 바다 조수가 강경을 지나 출입하므로 들 가운데 여러 곳의 냇물과 골에 배가 통행하는 이익이 있다. 

                                                                            「택리지」충청도條(이익성 譯)

 

▣ 기후 변동과 유로 변경이 만든 하안단구 군수리/동남리 일대

 


  빙하기에 백마강 일대는 지금보다 하곡이 훨씬 깊었다. 해수면이 지금보다 100m 이상 낮아서 하방 침식 작용이 활발했기 때문이다. 박지훈(2011)의 연구에 따르면 최종빙기 중 가장 기온이 낮았을 무렵에 백마강의 지류인 왕포천의 하상은 -10.21m(오늘날의 해수면 기준)에 달했다. 이 과정에서 공격사면, 특히 백마강이 가장 크게 휘돌아 나가는 규암진 하류 일대가 깊이 깎여 나갔을 것으로 추정된다. 공격사면이 침식을 당하면서 유로가 공격사면 쪽으로 치우치게 되면 반대쪽에는 과거의 하상면이 깎이지 않은 상태로 남는 경우가 생기기도 하는데 이를 하안단구(河岸段丘, river terrace)라고 한다.
수북정에서 강 건너쪽인 군수리 일대(성말리, 군수뜰, 신기정/신동엽시비~군수리사지 구간)와 동남리 일부 지역이 바로 이러한 성격의 지형이다. 아래 지도에서 붉은색으로 표시된 지역이다. 이 일대는 주변 지역과는 달리 풍화층 아래가 화강암 암반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넓고 평평하다. 해발고도는 10m를 약간 넘으며 금강 수면과의 고도차는 5m 안팎으로 홍수가 나도 어지간해서는 물이 침범하지 않는다. 그래서 강에 가깝지만 일찍부터 거주지가 되었다. 이 일대에서는 원삼국시대 및 백제시대 토기 조각들이 흩어져 발견된다(금강문화유산연구원, 2010).
  최성길(1997)의 연구에 따르면 이 단구면은 125,000년 전~80,000년 전 사이에 만들어졌다. 이 시기는 최종간빙기인 리스-뷔름간빙기(약13만년전-11만4천 년 전)에서 뷔름빙기(11만년 전~1.2만년 전) 초기에 해당하는 시기이다. 오랜 시간 경지와 택지로 이용되고 있어서 원형이 대부분 사라졌지만 자세히 관찰해 보면 곳곳에서 하천 작용으로 만들어진 퇴적물(모래, 자갈 등)을 볼 수 있다.

백마강 일대 지형 *박지훈(2011)

 

 

▣ 후빙기 해수면 상승으로 만들어진 범람원: 왕포천 유역


  1만2천년 전 마지막 빙하기가 끝나고 후빙기에 들어서면서 해수면이 점차 올라가게 된다. 이때 빙하기 동안 깊이 파였던 백마강 일대도 바닷물에 잠기게 된다. 백마강 일대가 감조구간에 속하므로 오늘날과 같은 수준으로 해수면이 올라오면서 자연스럽게 이 일대가 해안선이 된 것이다. 이 일대가 해수면의 영향을 받기 시작한 시기는 약 8,400년 전이었으며 6,000년 전에 가장 높은 해수면에 이르렀고 대략 6,500년 전에 지금의 해수면과 비슷한 수준이 되었다(박지훈, 2011). 이후 연안을 따라 퇴적이 진행되어 오늘날에 이르게 되었다. 따라서 백마강 일대에는 넓은 충적지가 발달하며 지하층에는 과거 해안의 자취인 갯벌이 남아 있는 곳도 있다.

후빙기 해수면 변동과 해안선

  백마강의 지류인 왕포천 유역도 후빙기 초기에는 대부분 바닷물의 침입을 받았으며 점차 퇴적이 진행되면서 백마강의 배후습지에 속하게 되었다. 배후습지는 배수가 잘 안 되기 때문에 자연상태에서는 경지로 활용하기 어렵다. 그러나 지금은 배수시설을 갖춰 논농사와 멜론, 수박 등을 생산하는 금싸라기 땅으로 변했다.

왕포천. 홍수 때 하천 주변 농경지로 물이 역류하는 것을 막기 위한 수문(하늘색)이 설치되어 있다.

 

▣ 왕포천 연안의 배후습지 궁남지

  궁남지는 백마강의 배후습지를 흐르는 왕포천의 지류에 자리잡고 있다. 배후습지에 발달한 늪을 단장하여 못을 만들었는데 인공이 많이 가미되었지만 원래 배후습지였으므로 형성 원인으로 보면 천연 연못이다. 『삼국사기』 무왕 조에는 634년(무왕 35년)에 '궁궐 남쪽에 못을 파서 물을 20여 리에서 끌어들이고, 사방 언덕에 버들을 심고 물 가운데 섬을 만들어 방장선산(方丈仙山)을 모방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주변에는 산지(화지산)와 단구면이 발달하여 상대적으로 고도가 낮은 이 일대로 물이 흘러 내렸다. 이 물은 왕포천으로 흘러드는데 왕포천 역시 배후습지를 흐르므로 배수가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지금도 궁남지에서 흘러 나온 물이 왕포천과 합류하는 지점은 본류와 지류간의 고도차가 거의 없어서 인공 배수 시설을 만들어 배수를 하고 있다.

궁남지와 궁남지에서 흘러나오는 하천
궁남지에서 흘러나와 왕포천으로 흘러가는 지류
궁남지에서 흘러나온 물을 왕포천으로 배수하는 동남배수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