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남도/부여

백마강을 따라 흘러간 영화, 부여

Geotopia 2022. 9. 8. 09:13

▣ 부여 정체성: 백제의 도읍지, 그런데…

 

  '부여'하면 맨 먼저 떠오르는 것이 '백제의 도읍지'이다. 도읍지로 선정되기 위해서는 방어, 교통, 경제활동 등 다양한 조건들이 다각적으로 고려되었을 것이다. 한 국가의 수도였다는 사실은 이곳이 범상한 위치가 아니었음을 뜻한다. 1,500여 년 전 이곳은 매우 뛰어난 입지 조건을 갖춘 도시였음이 분명하다.

  그런데 백제가 멸망하던 바로 그때의 도읍지여서 왠지 애잔한 느낌이 든다. 백제와 경쟁하던 신라의 경주나 고구려의 평양 역시 멸망의 역사를 겪었지만 부여와는 느낌이 많이 다르다. 아마도 두 도시는 지금도 부여에 비해 번성한 도시이기 때문일 것이다. 평양은 북한의 수도로서 과거의 영화에 못지 않은 상태이며, 경주 역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관광도시로서 그 지위가 확고하다. 부여는 '멸망한 왕조의 수도'인데 그 이미지에 걸맞게(?) 작은 소도시로 쇠락하였다. 평양처럼 새로운 도읍지로 거듭나지도, 경주처럼 과거의 영화를 관광자원화 하여 도시화의 토대로 삼지도 못했다.

  그래서 '부여'는 한 마디로 정의하기가 어렵다. 백제의 도읍지로 보통 정의되지만 그 역사가 짧았고, 더구나 침략 전쟁에 짐으로써 타의에 의해 도읍의 위치를 상실하였을 뿐만 아니라 왕조가 문을 닫은 곳이다. 그래서 '백제의 도읍지'라는 정의에 어떤 수식어가 붙어야 할 것만 같다. '멸망한', '마지막'···

  이러한 이미지는 '백제의 고도' 이상의 다른 이미지를 얻지 못했기 때문에 더욱 강화되었다. 조선시대에 생산된 부여 관련 기록에는 멸망 당시 백제와 관련된 경관들이 주로 언급되고 있다. 낙화암, 조룡대, 부소산··· 조선시대 부여는 과거의 도읍지 이상으로 큰 의미를 갖는 지역이 아니었다는 뜻이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이다. 부여를 정의할 수 있는 뚜렷한 기능들이 새롭게 발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인구가 꾸준히 줄어들고 있는 소도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고대의 부여: 도읍지로 적합한 입지 조건

 

  고대의 부여와 오늘날의 부여가 이처럼 큰 차이가 난다는 사실은 부여의 입지 조건이 시대적 상황에 따라 크게 변했음을 의미한다. 즉, 고대에는 한 나라의 도읍지가 될 만큼 좋은 입지였지만 현대적 관점으로 보면 그것이 큰 의미를 갖지 못한다는 뜻이다. 과거의 좋은 입지조건이 그 의미를 잃은 것이다.

  그렇다면 고대의 부여가 한 나라의 도읍지가 될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이었을까?

 

백제의 역사 세계를 품다, 부여백제역사유적지구  *출처: 문화유산채널

 

  ▶ 금강의 감조 구간 종점

 

  부여는 금강의 감조(感潮) 구간 종점에 해당한다. 감조 구간은 과거 수로 교통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졌다. 밀물을 이용하면 쉽게 강을 거슬러서 운항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기계적 동력이 없었을 때는 바람과 사람의 힘에 의존해야 했으므로 강의 흐름을 거스르는 운항은 매우 힘이 들었다. 하지만 감조 구간은 밀물 때가 되면 물이 역류하거나 최소한 멈추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상류쪽으로 운항이 가능했다.

  우리나라의 하천은 대부분 황해로 유입하는데 황해는 조차가 매우 크다. 또한 황해로 유입하는 하천들은 모두 하류의 경사가 완만하기 때문에 감조 구간이 상당히 긴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금강변의 하항 도시로 가장 잘 알려진 곳은 강경이다. 강경은 하구로부터 50km나 떨어져 있지만 감조 구간에 해당하여 내륙과 바다를 연결하는 거점이었다.

 

주요 하천의 가항 거리와 감조 구간 *자료: Hermann Rautensach(1945), 김종규 외 역, 1998, 「코레아」;*A 주운 가능 거리, B 하천 총 길이에 대한 A의 비율, C 여름철 주운 가능 거리, D 감조 구간, E 하천 총 길이에 대한 D의 비율 *

 

   강경에서 20km를 더 상류로 올라간 곳, 즉 하구로부터 70km 거리에 있는 감조구간 종점이 바로 부여이다. 바다와 쉽게 연결할 수 있는 마지막 지점이라는 뜻이다. 도읍지가 바다와 연결이 된다는 것은 외교나 교역 등 여러 모로 중요한 의미를 가졌다. 하지만 이러한 조건을 좇아 바닷가에 도읍지를 정하면 방어에 취약한 결정적인 단점이 있었다. 하항은 교역과 방어라는 상반된 조건을 모두 만족시킬 수 있었다. 위례성(하남)이 한강의 감조 구간에 자리를 잡았던 것이나 국내성(평양)이 대동강의 감조 구간에 자리를 잡았던 것도 같은 이유이다. 백제의 지방 거점이었던 금성(나주) 역시 영산강의 감조 구간에 있었다.

 

   강으로 둘러싸인 위치: 방어에 유리한 입지

 

  금강은 부여의 북서쪽과 남서쪽을 감싸고 흐른다. 부여를 사각형이라고 보면 강이 두 변을 이루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방어상 매우 유리한 위치이다. 위례성이나 웅진성 역시 강을 끼고 있기 때문에 부여와 비슷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위례성은 한강의 공격사면에 위치하여 홍수에 취약했으며, 웅진성은 감조구간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서 수상 교통에 불리한 단점이 있었다.

 

  금강 중류의 넓은 평야

 

  이중환의 「擇里志」는 부여를  '땅이 기름져서 부유한 사람이 많다'고 기술하고 있다. 수리 관개 능력에 한계가 있던 과거에는 상류나 하류 보다는 중류 지역이 가장 생산 기반이 튼튼했다. 상류는 평야가 좁으며 하류는 조수의 영향과 잦은 홍수로 농경에 불리했기 때문이다. 부여는 금강 중류의 넓은 평야를 끼고 있어 한 나라의 도읍지를 지지할 수 있는 경제적 토대를 갖추고 있었다.

 

 의미를 잃은 옛날의 입지 조건

 

  부여는 일제 강점기까지 내륙과 금강 하구를 연결하는 중간 거점으로서 항구 기능이 발달한 도시였다. 금강의 공격사면인 규암면 외리 일대는 상업 기능과 함께 구룡평야에서 생산된 쌀을 반출하는 항구였다. 그러나 '감조구간 종점'이라는 입지 조건은 근대 교통의 발달과 함께 그 의미를 완전히 상실했다. 충청도 최대의 상업 중심지였던 강경이 쇠퇴한 것과 같은 이유다. 우리나라의 하천은 수심이 얕고 계절에 따른 유량의 변화가 심하여 수로로 이용하는 데 큰 제약이 따른다. 그래서 철도와 도로 등 근대 교통로가 발달하면서 전국적으로 일제히 그 기능을 잃었다.

  방어상의 잇점은 도읍지의 위치를 잃음과 동시에 의미가 사라졌다. 신라에 병합되면서 통일신라의 도읍지였던 경주의 먼 외방에 위치하여 방어상의 필요성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너른 평야는 여전히 변하지 않고 있는 특징이지만 오늘날 농업은 도시를 지지하는 기능으로 작용하지 못한다.

 

부소산에서 바라본 금강

 

  계속되는 인구감소 

 

  입지 조건이 바뀐 것은 인구 감소로 잘 드러난다. 부여는 1964년 인구 19만 5,873명으로 정점을 찍은 이래로 계속해서 인구가 감소해 왔다. 1997년에 10만 명선이 무너진 이후 20년 동안 약 3만 명의 인구가 감소하여 2022년 7월말 현재 63,047명(세대 수 31,312)으로 6만 명을 약간 넘는 소도시로 전락하였다. 이촌향도 현상이 거의 마무리 되었고 노인 인구 중심의 인구 구조가 유지되고 있다. 세대 수가 인구의 절반에 육박한다는 것은 단독 세대, 또는 2인 세대가 많다는 뜻이다. 이러한 오늘날의 사정을 고려하면 앞으로도 부여 인구는 계속 감소할 것이며 머지 않아 인구 6만 명 선도 무너질 것으로 전망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