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왜 그런 오지에?
왜 거기에 있을까?
'백제의 미소'로 일컬어지는 백제의 대표 불상인데 공주, 부여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것도 이상하고, 그것도 큰길에서 멀리 떨어진 오지에 있는 것도 납득이 잘 되지 않는다. 중국과의 통상로 상에 있었다는 사실이 이제 정설이 되었지만 사실을 받아들이려면 그럴싸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
▣ 시간을 되돌려 보자
시간을 옛날로 되돌려 봐야 한다. 신작로나 철도가 포구를 없앴고 옛길을 바꿔놨지만 우리의 공간 감각은 지금의 길을 바탕으로 만들어져 있다. 서산마애여래삼존상은 주변의 국도나 지방도로 등에서 꽤 멀리 떨어져 있다. 옛길도 지금의 길과 많이 닮기는 했지만 지금의 길과 크고 작은 차이가 있기 마련이다. 주로 걸어 다녔던 옛날에는 길이 지형적 장벽을 피해서 나 있었다. 높은 산이나 너른 하천을 피해야 했다. 그래서 외돌아 가는 길이 많았다. 그런데 의외를 높은 고개를 지나는 길도 많았다. 고개를 피하기 위해 너무 멀리 외돌아 가야 한다면 힘들더라도 고개를 넘는 짧은 길을 선택했다. 높이와 길이를 놓고 오랜 경험으로 저울질을 하여 에너지를 적게 쓰는 합리적 결론을 내려왔다. 그래서 산이 많은 우리나라에는 고개가 무척 많다.
지금 보면 잘 이해가 안 되는 길은 대부분 그렇게 만들어졌다. 지금도 물론 지형 장벽은 길이 나는데 큰 영향을 준다. 하지만 많이 외돌아 가는 길은 지형 장벽을 돌파해서 거리를 줄여 놓거나, 반대로 살짝 돌아가는 길로 장벽을 피하기도 한다. 자동차는 걷는 것보다 훨씬 빠르기 때문에 약간 돌아가는 것은 크게 개의치 않는다.
교류 대상이 바뀌어도 길은 크게 변한다. 당진(唐津)은 당나라와 교류하면서 만들어진 이름이다. 통일신라시대부터 불렸던 이름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그 이름을 얻기 전이었던 백제시대에도 틀림없이 큰 포구였을 것이다. 당시에는 그곳과 내륙 중심지를 연결하는 길이 중요했을 것이다. 덕산, 홍성, 그리고 차령산지 넘어 공주까지 가는 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직접 교류가 거의 없는 길이다. 그때 큰 길이 있었더라도 천 년도 더 지난 지금은 그 자취를 찾기 어려울 수도 있다.
▣ 옛날에는 대단했던 길: 지형을 보면 보인다
이 정도 사실을 전제로 한 다음 지형도를 보면 어렵지 않게 옛길이 이해가 된다. 당진, 또는 태안을 출발점으로 하여 덕산이나 홍성에 이르는 길, 그리고 공주에 이르는 길을 생각하면 된다. 특히 당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중국과 교역하는 항구로는 태안반도보다는 당진의 포구들이 더 유리했다. 산둥과의 거리는 태안이나 당진이나 거의 비슷하지만 항구에서 내륙으로 이동하는 거리는 당진이 좀 더 짧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런 경로가 만들어진다. 당진포/채운포 - 용현계곡 - 예당평야 - 차령산지 - 공주. 이 경로는 음영 지형도를 보면 직선으로 발달한 곡지로 이어진다. 빠르면서도 고도가 높은 지형 장벽이 적은 경로이다. 곡지이므로 대개는 하천이 발달하는데 길이 하천을 따라 발달해야 지형 장벽을 줄일 수 있다. 이 경로에는 역천(驛川)이 흐르는데 역천은 석문봉에서 발원하여 용현계곡과 마애여래삼존상을 지나 거의 직선상으로 북쪽으로 흘러 석문호로 들어간다.
▣ 가야산 자락에는 두 갈래 길이 있었다
가야산을 넘는 길은 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역천이 마애삼존불 바로 아래에서 둘로 갈라지는데 바로 두 지류가 모두 가야산을 넘는 통로였다. 우리의 주인공인 마애불 앞을 흐르는 지류를 따라 난 길은 보원사지를 거쳐 옥양봉 북쪽의 퉁퉁고개(297m)를 넘는다. 퉁퉁고개를 넘으면 남연군묘 옆을 지나 덕산에 이른다.
또 하나의 길은 동쪽 지류를 따라 난 길인데 이 길은 지금 618번 지방도로가 지난다. 이 길에서 가야산 줄기를 넘는 고개는 실티재(쉴티재, 약175m)이다.
두 길은 중간에 서로 연결이 되어 있어서 상황에 따라 적절하게 활용되었을 것이다.
▣ 번화한 길 옆에 있었던 마애여래삼존상
이처럼 지형으로 확인해 보면 길이 보인다. 뱃길로 중국과 교류하던 역사적 조건을 함께 생각해 보면 마애여래삼존상 앞으로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길이 있었을 것이다. 보원사를 비롯한 많은 절들도 큰길이 있었다고 전제하고 보면 잘 이해가 된다. 200여개나 되는 폐사지들이 대부분 가야사(남연군묘)와 보원사 주변에 모여 있는데 위 지도를 보면 그 분포가 길을 따라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서산마애여래삼존상은 우연히 오지에 자리를 잡은 것이 아니라 그곳에 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 마애여래삼존상이 거기에 있는 이유[2]: 지질구조적 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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