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존불 형상의 보현사와 문수사, 그리고 상왕산
가야산의 옛 이름은 상왕산이었으나 신라 이후로 가야산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상왕산이라는 이름은 지금도 살아있다. 상왕(象王)은 산스크리트어로 코끼리를 뜻하는 '가야(गज)'를 한자말로 옮긴 말로 곧 석가모니를 뜻한다. 지금의 상왕산은 가야산 북쪽의 석문봉에서 서북쪽으로 갈라진 줄기 위에 있다.
그 상왕산 줄기에 문수사와 보현사가 있다. 둘 다 조선시대까지 기록에 전하고 있는 이 일대에서 잘 알려진 절이었지만 지금은 문수사만이 남아있다. 그런데 이름이 범상치가 않다. 문수(文殊)와 보현(普賢)은 석가모니를 협시(脇侍)하는 보살인데 그 이름을 딴 것이다. 상왕산과 그 양쪽에 문수사와 보현사, 바로 삼존불 형상이다.
▣ 문수보살과 보현보살: 지혜와 실천을 상징하는 보살
지혜를 상징하는 문수보살(मञ्जुश्री Mañjuśrī, 만주슈리)은 문수사리(文殊師利) 또는 문수시리(文殊尸利)의 준말이다. 산스크리트어 '만주슈리'에서 ‘만주’는 '달다(甘)', '묘하다', '훌륭하다'는 뜻이고, ‘슈리’는 복덕(福德)이 많다, 길상(吉祥)하다는 뜻이다.
문수보살은 석가모니의 왼쪽에 있으며 오른손에는 칼을 왼손에는 청련화(靑蓮花)를 쥐고 사자 위에 앉아 있다. 오른손의 칼은 모든 번뇌와 무명(無明/인간의 괴로움 또는 근본 번뇌. 사물의 도리를 밝게 알지 못함. 진리에 대한 무지)을 단호하게 끊어 버릴 수 있는 지혜의 칼이며, 푸른 연꽃은 일체 여래의 지혜와 무상(無相)의 지덕(智德)을 맡아서 제법에 물들지 않아 마음이 머무르는 곳이 없다는 뜻이다. 사자는 용맹과 위엄을 상징한다. 머리에 상투를 맺고 있는데 이는 지혜를 상징하며, 다섯 개의 상투는 비로자나불의 오지(五智)를 표현한 것이다.
보현보살(समन्तभद्र, Samantabhadra, 사만타바드라)은 실천 행동을 상징하며 석가모니의 오른쪽에 여섯 이빨의 희고 큰꼬끼리를 타고 있다. ‘사만타’는 '넓다'는 뜻으로 '덕이 두루 온 누리에 미친다'는 뜻으로 보(普), ‘바드라’는 '지극히 원하여 선을 가다듬는다'는 뜻으로 현(賢)으로 번역되었다. 경전을 수호하고 널리 퍼뜨리며, 불법을 펴는 보살로 자비행을 실천해 나가는 행자의 모습이다. 중생구제 원력으로 보살행을 실천하는 대표적 보살이며, 화엄의 교주인 비로자나의 본질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보살이다.
하지만 두 절이 상왕산을 중심으로 의도적으로 세워졌다고 보기는 어려워 보인다.
첫번째 이유는 보현사와 문수사는 일반적인 협시보살의 위치와는 반대로 자리를 잡았다. 즉, 상왕산을 중심으로 보현사가 왼쪽에, 문수사가 오른쪽에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이다.
또한 상왕산이라는 이름은 조선후기까지도 가야산과 같이 쓰였다. 즉, 지금의 위치가 아닌 가야산을 다르게 부르는 이름이었다.
문수사뿐만 아니라 일락사, 개심사 등 근처의 절들은 '상왕산 개심사' 형태로 모두 절 이름 앞에 상왕산을 붙인다. 이들 세 개 절은 모두 석문봉에서 갈라진 금북정맥 줄기에 있다. 즉, 상왕산이라는 이름은 문수사 뒷산으로 특정하기는 어렵다는 뜻이다.
그런데 일제 강점기에 제작된 지형도에는 문수사 뒷산이 '상왕산'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그 이후로 지금까지 지형도 상의 공식 명칭이 상왕산이다. 하지만 근처 마을 사람들은 '상왕산' 대신에 '만세봉'이라는 이름을 쓰고 있다. 이를 통해 문수사 뒷산을 상왕산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시기가 그리 오래되지 않았음을 추정해 볼 수 있다. 문수사와 보현사 두 절이 먼저 세워졌고 상왕산이라는 산 이름이 나중에 붙여졌을 가능성이 크다. 즉, 문수사와 보현사라는 협시보살 이름에서 비롯된 절은 곧바로 석가여래를 떠올리게 하므로 뒷산에 상왕산이라는 이름을 붙임으로써 종교적 권위를 드높일 수 있었을 것이다.
석가여래와 보살의 위치가 규칙에 맞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산이름을 상왕산으로 붙이고 그 아래에 협시보살의 이름을 딴 절이 있다는 사실은 이 일대가 강한 불교적 장소성을 갖는 지역임을 말해준다. 삼존불의 형태로 절이 세워진 예는 한반도에서 유일한 것으로 이 일대가 불교적으로 매우 큰 의미를 갖는 지역임을 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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