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남도/서산

보원사터: 폐허의 힘

Geotopia 2021. 6. 20. 15:34

▣ 예사롭지 않은 입지 : 하천 상류 저지대

 

  보원사터는 용현계곡, 또는 강당골이라 불리는 깊은 골 안에 있다. 북쪽으로 흘러 나가는 하천(역천) 상류에 자리를 잡았는데 동서 양쪽으로 뚜렷한 산줄기가 하천과 평행으로 뻗어있는 독특한 위치이다. 동쪽(앞쪽)으로는 가야산 본줄기가 흐르는데 가야산(678.2m) 주봉으로부터 약 7km 북쪽에 있는 수정봉(453.4m)이 동남쪽에 우뚝 서있다. 이 산줄기는 북쪽으로 계속 이어져 서산마애여래삼존상을 지나 고풍저수지 상류의 하천 합류 지점에서 끝을 맺는다.

  서쪽으로는 금북정맥이 지나간다. 금북정맥은 가야산 북쪽 약 1.7km 지점에 있는 석문봉(656.8m)에서 서북쪽으로 갈라지는데 이 산줄기는 일락산(521.4m), 상왕산(309.6m)으로 이어져서 안흥진에 이른다. 상왕산은 보원사를 중심으로 보면 서북쪽에 있고, 산줄기를 넘어 서남쪽에는 개심사가 있다. 개심사까지는 산길로 채 3km가 되지 않는다. 

  

보원사 주변의 산세와 절들

 

  보원사는 깊은 계곡에 자리를 잡았지만 하천에 바로 붙어 있는 독특한 위치이다. 대개 절들이 산 중턱 고지대에 자리를 잡는 것과는 달리 보원사는 저지대에 있다. 조선시대 이전에 세워진 많은 절들이 저지대에 세워진 것과 같다. 고려시대 왕실과 가까운 절이었던 보원사는 규모가 매우 컸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에 걸맞는 지형 조건을 갖추고 있다. 

 

보원사지 5층석탑과 용현계곡

 

▣ 역사

 

  보원사는 신라 때 창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백제시대부터 시작되었을 수도 있다는 주장도 있는데 백제시대 유물인 금동여래입상이 출토된 적이 있기 때문이다. 고려시대에는 세력이 크게 커졌는데 고려초 고려 왕조와 연계되어 왕실의 지원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신정권이 들어서면서 쇠퇴하기 시작했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면서 숭유억불 정책으로 더욱 쇠락의 길을 걸었다. 17세기 중엽까지는 기록에 전하지만 18세기 중반에 이르러 기록에서 사라졌다. 

 

 

 

▶ 고려시대: 정권의 흥망과 함께 한 화엄종 사찰의 성쇠  *자료: 우리역사넷

 

  당시를 대표하던 법인국사(法印國師) 탄문(坦文)이 보원사에서 머물렀고 975년 국사(國師)로 책봉된 후 이 사찰에 살다가 입적하였다는 사실로 볼 때 고려 초기에 이 사찰의 세력이 매우 컸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사찰은 무신집권기 이후 화엄종의 쇠퇴와 함께 점차 세력이 기울어진 것으로 보인다.

 

법인국사탑과 탑비

 

  1170년(의종 24) 쿠데타로 무인이 정권을 잡으면서 고려 사회는 크게 바뀌었다. 지배층의 교체는 불교계에도 적지 않은 변화를 가져왔다. 기존의 왕실 및 문인 관료와 연계하고 있던 수도 중심의 불교가 쇠퇴하고 대신에 권력으로부터 독립하여 자율적으로 운영하고자 한 지방의 결사(結社) 불교가 대두되었다. 

  무신 정권이 등장한 이후에도 기존 불교계는 한동안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왕실 및 문인 관료와 밀접하게 연결되었던 이들은 수차례에 걸쳐 무신 정권의 타도를 위한 움직임을 보였고 그때마다 무인 집정자에게 큰 타격을 받았다. 1174년(명종 4)에 개경의 승려 2,000여 명이 무신 정권을 타도하기 위해 나섰다가 진압되었고, 1202년(신종 5)과 1203년에는 경상도 지역 승려들이 지방민과 연합하여 무신 정권에 대한 반란을 일으켰다가 토벌되었다. 또 1217년(고종 4)에는 침입해 온 거란군을 물리치기 위해 동원되었던 개경의 승려들이 도리어 집권자 최충헌을 죽이려 하다가 수백 명이 죽임을 당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과정을 거치면서 기존 불교계의 중심 세력은 거의 대부분 도태되었다. 왕실 및 문벌 출신이 교단의 중심을 이루고 있던 화엄종과 법상종 세력은 크게 위축되었고, 선종과 천태종에서도 중앙에서 활동하던 기존 중심 세력이 밀려나고 중앙의 권력으로부터 떨어져 있던 승려가 새롭게 종단을 주도하게 되었다.

  무신 정권기 불교계의 새로운 흐름은 지방에서 일어난 결사 불교였다. 개경을 떠나 지방의 조용한 곳에 함께 모여 오로지 수행에만 정진하는 결사 불교는 무신 정권기 이전에도 있었지만 불교계 전체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기존 불교계가 쇠퇴한 상황에서 결사 불교는 이제 불교계의 새로운 구심점 역할을 하게 되었다. 당시의 대표적인 결사로는 화엄종의 반룡사(盤龍社)와 수암사(水嵓社), 법상종의 수정사(水精社), 선종의 수선사(修禪社), 천태종의 백련사(白蓮社) 등이 있는데, 특히 수선 결사와 백련 결사는 기존 불교계의 문제점을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사상과 신앙을 제시하면서 중심 세력으로 등장하였다.

 

보원사터에서 바라본 용현계곡

 

▶ 17세기 후반 이후 폐사

 

  「신증동국여지승람(1530)」에는 개심사, 문수사, 보현사(普賢寺), 보원사(普願寺)가 상왕산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보원사는 당시에 이미 세력이 줄어들고 있던 중이었지만 여전히 명망이 있는 절이었음을 알 수 있다. 「호산록(1619)」, 「동국여지지(17세기 중엽)」에도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17세기 중엽까지 보원사가 유지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동국여지지」에 기록된 상왕산에 있는 절들은 모두 신증동국여지승람과 같은데 한자 표기까지도 똑같은('願'자 표기) 것으로 볼 때 옛 기록을 그대로 옮긴 것일 수도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왼쪽)과 「동국여지지」 서산군 불우/사찰조

  그런데 18세기 중반에 나온 「여지도서(1757~1765)」부터는 보원사에 관한 기록이 없다. 정확히 언제, 어떤 이유로 절집이 사라지게 되었는지 기록으로 확인되지는 않지만 적어도 17세기 후반~18세기 초반 사이에 사라진 것만은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 억불 정책으로도 없애지 못한 불교적 장소

 

  예산의 실학자 이철환의 「상산삼매(1754)」에는 보원사 일대의 절집에서 불상이나 탑을 희롱하거나 부순 선비 이야기가 등장한다. 당시 사대부들이 불교를 어떻게 봤는지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런데 공통적으로 그 댓가로 병을 얻었거나 자손들에게 횡액이 끊이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함께 기록되어 있다. 절의 스님들에게 전해들은 이야기를 옮겨 적은 그 이야기에 이철환 자신은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지만 그런 종류의 전설들은 널리 회자되면서 민중들에게 암암리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상산삼매와 예헌(例軒) 이철환(李철煥)의 서산 불교유적 답사기 - 서산시대

취허당(聚虛堂) 한기홍의 서산갯마을 상산삼매(象山三昧)는 예헌 이철환 선생이 가야산 일원의 불교유적을 답사하면서 쓴 일기이다. 계유년 10월 9일부터 갑술년 1월 29일까지 기록되어 있는데

www.sstimes.kr

 

  일제강점기 초반에 제작된 지형도에는 강당리 일대에 30여호의 집이 표시되어 있다. 이 정도 규모면 당시 꽤 큰 마을이라고 볼 수 있다. 그 정도 규모의 마을을 부양할 만큼의 생산 기반을 가지고 있었다는 뜻이다. 산간분지지만 물이 풍부하고 평지가 넓어서 인구부양력이 꽤 컸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보원사 주변의 너른 산간 분지에는 종족촌락이 들어서지 않았다. 「상산삼매」의 기록처럼 사대부들이 탑을 헐고 불상을 희롱했던 것은 단순히 불교를 업신여겼기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아마도 절이 가지고 있던 토지를 차지하고자 하는 욕구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강당골 일대에는 종족촌락이 없었다. 절집을 훼손한 결과로 벌을 받았다는 전설들이 엄연했던 상황은 함부로 그 자리를 차지하는 행동을 망설이도록 했을 것이다. 왕실에서도 궁 안에 절을 지었던 예로 볼 때 숭유억불 속에서도 불교의 종교적 경외감은 살아있었다고 볼 수 있다. 더욱이 가야산 일대는 백제시대 이후 천년의 세월 동안 불교적 장소성을 두껍게 퇴적시켜왔던 곳이었다.  

 

20세기 초반 강당리 *조선총독부(1915)

  지역성은 시대가 변하면서 변한다. 특히 '내포'라는 지역과 지역성은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다. 따라서 조선시대 이전의 지역성은 약화되었거나 사라지기도 했다. 내포를 규정하는 문화 지표는 여러가지가 있는데 불교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 그렇지만 불교문화는 '내포'라는 이름이 회자되기 훨씬 전부터 이 일대에  형성되었던 문화이다. 그래서 내포 전지역을 하나의 지역으로 묶는 지표로 보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야산 일대는 불교적 장소성을 조선시대 내내 유지했고 지금까지도 이어오고 있다. 보원사는 가야산 일대의 불교적 장소성 형성에 영향을 미친 여러 요인 가운데 대표적인 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