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남도/서산

유계리 경주김씨 종족촌락

Geotopia 2021. 6. 19. 12:27

▣ 경주김씨가 유계리에 살게 된 내력

 

▶ 안동에서 한성으로, 한성에서 서산으로 

 

  유계리 경주김씨의 입향조는 안주목사를 지낸 김연(金堧, 1494~?)이다. 대대로 안동에 세거하던 경주김씨 가문 출신의 김연이 명종 때에 만년 은거지로 서산을 택함으로써 연고를 맺게 되었다. 그는 관직에 있는 동안에는 한성에 살았는데 관직에서 물러난 후 서산 덕지천(德止川)에 정착했다가 이곳 유계리(한다리)로 이주했다. 김연은 유계리에 세 채의 집을 지어 후손들이 살도록 했는데 큰 아들 김호윤(金好尹)과 그의 아들 김적(金積), 차남 김호열(金好說), 김호윤의 사위 김지남(金止男)이었다. 이들이 실질적인 유계리 입향조로 이후 유계리에 자손이 대를 이어 살게 되었다. 일설에는 김연이 임꺽정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이곳에 사패를 받아 정착했다고 하는데 확인이 되지는 않는다. 보통 공신에게 사패를 하는 것이 관례였는데 임꺽정의 난과 관련된 공신 책봉은 없었다.

 

덕지천은 천수만 연안에 있었고 한다리(大橋里)는 상류지역이다  *1872지방지도 서산군

 

▶ 정착기: 16세기 후반

 

  정착 이후 경제적 기반을 확보하고 후손들이 입사(入仕)하면서 종족촌락의 면모를 갖추어갔다. 1619년에 발간된 서산지역 사찬 읍지인 <호산록(湖山錄)>에는 김연의 차남인 김호열(1534~?)의 행적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호산록>에 따르면 김호열은 임진왜란 때 지역의 유력 인사들과 함께 의병을 모집하여 왜군의 침입에 대비하였고, 서산향교를 옮기는 일에도 적극적으로 관여했다. 정착 후 곧바로 지역의 영향력 있는 가문으로 성장하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 확장기: 17세기 초반

 

  가문이 크게 번성하기 시작한 것은 정착 후 60여 년이 지난 다음이다. 김연의 4세손 김홍익(金弘翼, 1581~1636)1614년(광해군 6) 사마시에 합격하여 관직에 진출하여 의금부도사, 장악원직장, 사헌부감찰, 공조좌랑 등을 거쳤다. 외직으로 연산현감으로 있던 중 병자호란이 일어나 적과 싸우다 화살에 맞아 순절하였다. 그 공으로 1741년(영조 17)에 충신 정려를 하사받았고 1794년(정조 18)에는 충민(忠愍)이라는 시호가 내려졌으며, 논산시 부적면 충곡리에 있는 충곡서원에 배향되었다.

  김홍익의 동생 김홍욱은 1635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성균관전적, 사헌부지평, 홍문관수찬, 사간원정언, 예조참의 등 요직을 거쳤고 외직으로는 공충도관찰사, 홍주목사, 황해도감사에 이르렀다. 그러나 김홍욱은 소현세자빈 신원문제로 효종의 노여움을 사 장살되고 말았다.

 

▶ 가세 확장과 분파: 18세기 초반

 

  김홍욱이 사망한 후 가세가 다소 약화되었으나 그의 증손자 김흥경(金興慶, 1677~1750)이 크게 입신하면서 가문이 또다시 중흥하였다. 김흥경은 1699년(숙종25) 과거에 급제하여 삼사의 청요직을 거쳐 영조 때 분무공신에 책록되고 영의정에 올랐다. 김흥경의 차남은 영조의 부마 김한신(金漢藎, 1720~1758)으로 왕가와 혼인함으로써 궁가(宮家)의 지위를 확보하였다. 김한신은 부마가 된 후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 일대 토지를 하사받아서 가문의 근거가 예산으로 확대되었다. 추사 김정희는 김한신의 증손이다.

 

[유계리 경주김씨 가계도]

 

▶ 한다리 김씨의 중흥: 정순왕후 책봉 이후 

 

  정확한 시기를 특정할 수는 없으나 김홍욱 이후 세대에서는 후손이 번성하여 한성, 여주, 서산 등으로 나뉘어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김흥경의 조부인 김세진과 부친 김두성의 묘가 마을에 있는 것으로 보아 김흥경이 입신하던 당시까지도 유계리와 한성을 오가며 살았음을 알 수 있다. 내포에서는 정치적으로 입신한 경우에는 한성이나 경기도에, 그렇지 못한 경우는 내포에 근거를 두는 예가 많았다. 

  한다리 김씨가 또다시 크게 중흥한 것은 김계진의 증손자 김한구에 이르러서이다. 김한구의 딸이 1759년 왕비로 책봉된 것이다. 즉,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 김씨(1745~1805)를 배출함으로써 궁가의 지위를 확보하면서 명문가로 급부상하였다. 정순왕후가 정계를 떠나면서(1803 순조 수렴청정을 거두었고 1805년에 사망하였다) 정치적 수세에 몰리는 운명을 겪기도 했지만 조선 후기까지 서산의 대표적인 유력 가문으로 성장하였다. 서산 내에서도 근거지가 확장되어 대산, 지곡, 인지 등에 후손이 살거나 묘가 있는데 김홍익의 묘는 대산읍 기은리에, 김두징(김유경의 부친)의 묘는 인지면 남정리에, 김유경의 묘는 지곡면 연화리에 있다.

 

 

▣ 한다리 김씨

 

  유계리는 조선시대 서산군 동암면 (銅岩面)의 유산리(遊山里), 명계리(明溪里), 대교리(大橋里), 기촌(機村) 등 네 개 마을이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합쳐져 만들어졌다. 경주김씨 마을은 이 중에서 대교리였다. '大橋'는 우리 말로 '큰 다리', 즉 '한 다리'를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 '한다리 김씨'라는 별명은 바로 대교리에서 왔음을 알 수 있다.

  유계리 앞을 흐르는 도당천은 가야산 석문봉에서 갈라진 금북정맥에서 발원한 하천이어서 비산비야 지형이 발달하는 이 일대에서는 비교적 규모가 큰 하천이다. 도당천을 건너는 다리는 대동여지도를 비롯한 여러 고지도에 표시되어 있는데 서산과 해미를 잇는 길목에 있어서 예로부터 중요하게 여겨졌었음을 알 수 있다. 한자 이름은 일제 강점기 때 사라지고 뜻이 모호한 합성 지명으로 변했지만 우리 말 이름은 살아 있으니 다행이다.

대동여지도에 '大橋'가 표시되어 있다

 

▣ 경관

 

  정순왕후 생가 앞에는 '한다리 김씨 세거비'가 있는데 경주김씨가 이 마을에 살게 된 내력을 자세하게 적어놨다. 다른 마을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시설인데 최근까지도 가문을 현양하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비문에 따르면 왕비 1, 부마1, 국구(國舅) 1, 상신(相臣)3, 대과 급제자 27, 무과급제자 37, 소과 급제자 64, 2품관 이상의 고관이 37, 시호를 받은 사람 11명 등을 배출한 가문이다.  

  이 마을은 취령봉 남쪽 기슭에 대교천을 앞에 두고 하천 너머로는 상왕산을 바라보고  있는 풍수지리상 길지라고 한다. 사대부 가문이 이룬 종족촌락들이 대부분은 풍수상의 길지에 자리를 잡았다고 전하는 것은 성리학적 가치관과는 모순되지만 풍수지리는 조선시대에 널리 통용되던 입지론이었음을 알 수 있다. 명당은 곧 현달한 인물을 배출하는 배경이 되고, 그리고 그에 따라 가문이 번창하는 것으로 연결되기 때문에 마을의 권위를 높이는데 좋은 경관 요소이다.

  마을 입구에는 김홍익 충신 정려(1741년(영조 17)에 명정), 김유경(1669~1748) 효자 정려(1751년(영조 27) 명정, 1754년(영조 30)에 효정(孝貞) 시호)가 있다. 

 

김유경 효자정려. 김유경은 행직이 좌참찬(정2품)에 이르렀기 때문에 증직이 없었다

 

김홍익 충신정려


  정착 초기 김적과 관련이 있는 경관들이 몇개 전하는데 김적이 낙향하여 풍류를 즐겼다는 용유대와 단구대가 있다. 용유대는 도당천(북쪽 간대산, 은봉산, 상왕산에서 발원)과 홍천천(동쪽 개심사 계곡에서 발원) 합류지점에 있는 화강암 토르이며 단구대는 용유대 하류에 있는 화강암 암반이다.

 

용유대는 화강암 토르(tor, 核石)이다

 

단구대

 

  유계리 경주김씨 마을을 대표하는 경관은 정순왕후 생가이다. 가문을 중흥한 원인이 정순왕후였으므로 매우 의미가 큰 경관으로 지금까지도 잘 보전이 되어있다. 김홍욱이 효종에게 장살을 당했지만 그 이전에는 친분관계가 있었던 듯하다. 늙은 아버지을 봉양하며 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효종이 그의 아버지 김적에게 내린 집으로 1649~1659년 사이에 지은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 김홍욱이 사망한 해가 1654년이었으므로 효종과의 밀월관계는 그 이전이었다고 봐야 한다. 김기현가옥은 19세기 중엽에 지은 것으로 추정되는 가옥으로 옛 모습이 잘 간직되어 있다.  

  생가 앞에는 거대한 느티나무가 가문의 역사를 말해주듯 서 있다. 독립운동가 김용환 묘비가 생가 앞에 서있는 것도 특징이다. 

 

정순왕후 생가

 

정순왕후 생가 앞의 느티나무

 

  김세진, 김두성의 묘가 마을에 있다. 김세진은 김홍욱의 장남이며 김두성은 김세진의 아들이다. 김두성은 김흥경의 아버지이다. 김세진 묘비에는 부친이 장살된 후 낙향하여 어렵게 살았던 내용이 적혀있다. 부친 김홍욱이 관직에 있을 때는 한성에 살고 있었으며 그가 세상을 떠난 다음에는 한다리로 낙향했음을 알 수 있다.

  손자 김흥경이 입신하면서 다시 한성으로 진출했으며 그후로 계속 한성에 살았다. 김흥경의 아들 김한신이 영조의 부마가 되면서 예산 신암 용궁리 일대를 하사받음으로써 경제적 근거가 확대되었다.

 

김세진묘

 

▣ 영역 확대

 

  한다리 김씨 문중은 한성, 여주, 예산 등 서산 이외의 지역에도 연고가 있었으며, 대산읍, 지곡면 등 서산의 여러 지역으로도 영역이 확대되었다. 

 

 

  김적과 김홍욱의 묘는 대산읍 대로리에 있는데 마을에 후손들이 살고 있다. 김학방(1746~1822, 사헌부 감찰)이 이 마을 출신이며 마을에 그의 효자 정려가 있다. 김홍익의 묘는 지곡면 도성리, 김두징의 묘는 인지면 남정리에, 김유경의 묘와 신도비는 지곡면 연화리에 있다. 

 

▣ 당색

 

  내포 일대는 당색이 복잡한 편이었지만 지리적으로 한성에 가까운 기호지역에 해당하여 서인 계열이 많았다. 한다리 김씨도 서인 계열로 볼 수 있다. 유계리 경주김씨 마을을 중흥시킨 주인공 김홍욱은 소현세자빈의 신원을 요구하면서 효종과 마찰을 빚어 끝내 장살되고 말았다. 그러나 1654년에 신원이 되어 1718(숙종44)년에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1721년(경종 1) 서산의 성암서원(聖巖書院)과 음성 지천 서원(陰城 知川書院)에 배향되었다. 그의 신원에는 김집, 송준길, 송시열 등 서인의 거물들을 비롯하여 지역에 유생들이 널리 참여하였다. 

 

 

  남당 한원진이 호서의 명망가로 위상을 굳힌 후로는 그 영향이 주변에 미쳤는데 유계리 김한록은 한원진의 제자로 호론(湖論)의 적전(嫡傳)이었다. 김한구, 김귀주, 김관주 등도 호론의 핵심 인물이었다. 정조 즉위 이후에는 노론 벽파(辟派)로 정조와 대립하였고 김귀주는 남당(南黨)을 이루어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장인 홍봉한의 북당(北黨)과 대립할 정도로 세력을 확장하였다.
  호론은 내포 지역의 독립 운동에도 영향을 주었는데 이 가문에서도 김용환 등 여러 명의 독립운동가가 배출되었다.

 

한다리김씨 세거비와 김용환 묘비

 

▣ 내포성

 

  입향조인 안주목사 김연은 대대로 안동에 살았던 가문 출신이었지만 입사한 이후로는 한성부 저동에 살았다고 한다. 김연의 증손자인 김홍욱은 한성부에서 태어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를 보면 이 가문은 유계리 정착 이후에도 한성부와 유계리를 오가며 생활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오흥부원군 김한구의 묘는 경기도 남양주시에 있으며, 그의 아들 김귀주의 묘는 경기도 이천에 있다. 또한 정순왕후의 본가는 경기도 여주군 여주읍에 있어서 행장에서는 그를 여주 출신으로 기록하고 있다. 

  김홍욱의 아들인 김세진家와 김계진家는 처음에는 유계리에 함께 살았으나 김흥경이 입신한 이후로 점차 분리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오랫동안 한성과 유계리를 오가며 생활하였다. 

  옛날에 이곳에서 서울에 가려면 당진 한진까지 걸어가서 배를 타고 아산만을 통해 한성부로 가거나, 삽교천을 건너 평택, 수원을 거쳐 한성으로 갔다.

  유계리 경주김씨 마을은 한성, 경기 지역과 관련성을 갖는 전형적인 내포형 종족촌락이지만 유계리는 내포에 뿌리를 내린 다음 한성으로 진출한 형태이다. 그런면에서 특수성을 갖는다. 즉, 대부분의 내포 종족촌락들이 한성, 경기에 근거를 두고 내포를 경제적 기반으로 삼았던 것과 대조를 이루는 것이다. 정착 연대가 조선 중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은 이러한 특징을 잘 보여준다. 즉, 입향조 김연이 대대로 한성이나 경기도에 살았던 인물이 아니고 당대에 입사하면서 한성에 살게 되었으며 곧바로 유계리에 들어와 후손이 번성했다. 김연이 유계리에 연고를 갖게 되었던 16세기 초반은 전국적으로 종족촌락이 일반화 되기 전이다.

 

▣ 현재

 

  정순왕후를 배출한 유계리 경주김씨, 지금은 10여 호 만이 고향을 지키고 있지만 조선 중기 이후로 세거하면서 세력을 떨쳤던 가문이다. 왕후 생가에는 후손이 살고 있다. 서산 시장을 지낸 김기흥님 내외다. 두 분이서 큰 집을 돌보기에는 힘이 벅차겠지만 집안 구석구석 손이 닿지 않은 곳이 없이 정갈하다. 마침 시장님과 사모님을 만나 이런저런 얘기도 나누고 은쑥과 은배꽃 선물까지 받았다.

 

생가 정원에 있는 화분들

 

우리집 옥상으로 이사 온 은배꽃과 은쑥

 

 

▣ 음암면 일대 종족촌락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신장리의 전주 이씨는 덕천군(德泉君)의 후손인 변성군(邊城君) 이계연(李繼連)의 후손들로 ‘구리바위 이씨’라고도 불린다. 전주 이씨가 처음 서산과의 인연은 처향(妻鄕)으로 시작되는데, 이계연의 부인은 서산의 토착 성씨인 서산 송씨로 참봉을 지낸 송유징(宋有徵)의 딸이다. 전주 이씨는 1300년대에 입향한 것으로 전해지며 신장리 구리바위에 집성촌을 구성하고 있다. 이계연의 아들 이이수(李頥壽)는 부모를 섬김에 효성을 다하였고,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였으며, 산소에 비석과 상석(床石) 등의 석물을 모두 혼자 마련하였는데 주변에서 효성이 지극하였다고 소문이 자자하였다. 주변 사람들에게는 8병사(兵使)를 배출한 가문이라 전해지며 일제 강점기에 편찬된 『서산군지』에는 약 20여 명이 거주하며 20대 이상이 대대로 살고 있다는 기록이 있다.

 

  도당리 구도동의 구둘 박씨는 밀양 박씨로 1500년대 말에 입향한 것으로 보인다. 『서산군지』에는 약 40명이 살고 있으며 14대가 대대로 살아오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부장리의 부다리 류씨는 서산의 유력 토착 성씨인 서령 류씨로 유방택(柳方澤)[류방택]의 후손이다. 대대로 서산읍 일대에 세거하여 오다가 부장리로 이거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서산군지』에 의하면 당시 약 70여 명이 살고 있고 9대가 대대로 살아왔다고 한다.

 

 상홍리 마항의 정씨는 경주 정씨로 세칭 ‘마항 정씨’라고 불리며, 500여 년 이상 거주하는 성씨인데 『서산군지』에는 약 70명으로 17대째 세거하고 있다고 한다.

 

  부산리 윤씨는 해평 윤씨로 100여 년 간 집성촌을 구성하고 있다. 부산리 윤씨는 윤원구(尹瑗求)의 후손들로 부산리가 본래의 입향지가 아니고 대대로 서산에서 세거하면서 분파되어 온 것이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