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남도/서산

서산: 가야산지 주변

Geotopia 2021. 6. 27. 05:55

▣ 일정

 

10:00 용현리 서산마애여래삼존상 입구 주차장 도착 - 10:30 서산마애여래삼존상 - 11:30 보원사터 - 12:00 서산목장 - 12:30 점심(서산) - 14:00 유계리 경주김씨 종족촌락 - 15:30 문수사 - 16:00 해산(용현리 주차장)

 

▣ 주제

 

▶비산비야(非山非野)와 낙토(樂土)

 

큰 하천이 발달하지 않아 벼농사가 발달하지 못했고, 따라서 규모가 큰 집촌이 발달하기 어려웠다. 대신에 개간이 쉽고 물난리가 잘 나지 않으며 토질이 좋기 때문에 조선 후기에 이르러 인구가 빠르게 늘어났다. 오늘날은 마늘, 당귀, 생강 등 상품작물을 주로 재배하는 밭농사가 발달한다. 

 

부석면 서산목장 목초지

 

▶불교적 장소성

 

  '내포(內浦)'가 기록에 등장하기 시작하는 시기는 조선시대이다. 그리고 조선 중기를 넘어서면서 한양 사대부들이 삶의 근본으로 삼는 지역으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하였다. 즉 '내포'라는 이름은 시대적으로는 조선시대, 그리고 계급적으로는 한양 사대부를 중심으로 정의될 수 있다. 그런데 '내포'를 정의할 때 기준이 되는 가장 대표적인 자연적 지표는 가야산이다. '가야산(伽倻山)'이라는 이름은 불교를 상징한다. 성리학의 나라가 되기 전에 붙었던 이름인 가야산이 성리학의 나라 조선에서도 굳건하게 살아 있었을 뿐만 아니라 '내포'를 정의하는 기준으로 널리 받아들여졌던 것은 역사적 아이러니다. 

  

  불교적 장소성의 역사적 근원은 백제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니까 이 일대는 내포가 하나의 지역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던 조선시대 보다 훨씬 전부터 불교적 장소였다. 그것이 숭유억불의 조선시대를 견디고 지금까지 장소성으로 남아있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200여개에 달했다는 가야산지의 절들은 대부분 사라졌다. 아마도 숭유억불의 영향을 피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성리학이 그 자리를 장악하고 새롭게 장소성을 만들어 내지는 못했다. 가야사를 불태우고 부친의 묘를 옮긴 흥선대원군은 역설적으로 성리학과 모순이 되는 풍수지리적 사고를 널리 퍼뜨리는 결과를 불러 일으켰고, 또한 보덕사를 세움으로써 불교의 '영험함'을 인정한 셈이 되었다. 가야산 일대에는 불상이나 석탑을 모욕함으로써 화를 당했다는 선비 이야기가 여럿 전한다. 

  장소성은 단지 눈에 보이는 경관으로만 정의되는 것은 아니다. 가야산지 일대의 불교적 장소성은 경관 이상의 어떤 것으로 전수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가야산과 상왕산에 둘러싸여 있는 보원사터(서산시 부석면 용현리)

 

▶내포(內浦)로서의 서산: 경주김씨 종족 촌락

 

  음암면 유계리는 서산의 대표적인 종족촌락이다. 가야산 자락을 조금 벗어나서 멀리 상왕산이 건너다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고 있다. 종족촌락은 조선시대 성리학 사상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종법사상이 정치적 권력투쟁의 도구로 활용되면서 발달하기 시작한 마을이다. 그리고 그 효력을 확인한 사대부들은 더욱 더 종법사상에 몰두하였고, 그럴수록 또한 종족촌락의 확산이 가속화되었다.  

  서산은 내포의 다른 지역에 비해 종족촌락이 많은 지역은 아니었다. 규모가 큰 집촌이 발달하기에는 경제적 기반이 약했던 것이 가장 큰 원인일 것이다. 즉, 비산비야의 지형 때문에 벼농사가 발달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유계리 역시 비산비야의 구릉지에 자리를 잡다. 하지만 비교적 규모가 큰 하천을 앞에 두고 있어서 생산 기반이 튼튼한 마을이다. 유계리는 종족촌락 태동기인 16세기 중반에 근거를 마련하고 발달하기 시작한 전형적인 종족촌락이며 한성, 경기 지역과 관련성을 갖는 전형적인 '내포형' 종족촌락이다. 

  또한 지금까지도 지역사회에서 영향력이 큰 가문이다. 지금도 정순왕후 생가에는 김기현 전 서산시장 내외가 살고 있다. 조선시대 유력 성씨가 지금까지 향촌 사회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은 특이한 사례로 보인다. 

 

유계리 정순왕후 생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