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답사일: 2022년 4월 2일(토)
■ 답사 주제와 답사지
⊙전주이씨 종족촌락: 선정묘, 가묘(이창주, 이택 등), 이택 신도비, 350년 비자나무, 서암동천
⊙서산유씨 관련 경관: 유상목가옥, 유기방 가옥, 유상목 묘
⊙불교 경관: 여미리 석불, 황운사, 강댕이 미륵불(운산면 용현리)
⊙민속 경관: 산제바위(산신제), 석장승, 300년 소나무, 250년 느티나무
⊙문화공간: 여미갤러리, 여미녹거근대사박물관, 생활문화센터, 서예전각연구소, 마애환경조형연구소
■ 답사 경로
전라산 - 유상묵묘 - 여미갤러리 - 석불입상 - 유상묵가옥 - 선정묘 - 유기방가옥(수선화축제) - 비자나무 - 이진백 묘 - 이창주 묘 - 이택 묘 - 이택 신도비 - 황운사 - 취석 - 서암동천 - 여미도예 - 여미녹거근대사박물관
■ 餘月美也의 마을 여미리
-자연마을: 윗장터, 넘어말, 바디울, 서당골, 이문안, 점말, 대촌, 향교골, 도당골, 초막골
-여월미야: 서산 팔경 가운데 하나
-달빛 예촌 여미리: 2009년 신문화공간 조성 사업지로 선정
-여월미야축제(정월대보름): 미륵제(여미리 석불), 장승제(석장승), 산신제(산제바위 약수터)
-全羅映月(전라산 위로 솟는 달과 용장천에 비친 달),
-茅亭蛙鳴: 4월 모정 앞 들녘에서 개구리 울음 소리와 함께 바라보는 달
-醉石流水: 취석과 서암동천이 새겨져 있는 서당골 계곡에서 흐르는 물소리와 함께 바라보는 달
■ 지질구조와 지형
여미리는 쥬라기 흑운모화강암과 시대미상의 변성암(편암, 천교암)이 만나는 지점에 있다. 마을의 서북쪽 배후 산지는 해발 155m 정도이다. 화강암 산지이고, 이곳에서 마치 청룡과 백호처럼 뻗어나온 두 개의 산줄기는 변성암이다. 화강암 지대에는 노출된 화강암이 많다, 일찍이 배후산지의 거대한 암반(멍석바위)에 이진백이 '西巖洞天', '醉石' 등의 글귀를 새겨넣기도 했다. 반면에 변성암 지대에는 토양층이 발달하고 숲이 우거져 있다.
마을 뒷산을 중심으로 볼 때 우백호에 해당한 산줄기에는 마을에서 가장 높은 은봉산(282.3)이 있다. 변성암 산지답게 숲이 우거져 있고 여미리 들판을 적셔주는 물을 공급한다. 좌청룡에 해당하는 동북쪽 산줄기는 역천 앞까지 길게 뻗어 있다. 이 산줄기의 끝에 '전라산'이 있는데 역천의 침식을 받아 끝 부분이 급경사를 이룬다. 전체적으로 북서-남동 방향으로 흘러서 북서풍을 막아주는 역할을 하므로 마을이 주로 이 산줄기 남사면으로 발달한다.
■ 여미리 역사
-백제 때 餘村縣, 신라 때는 余邑으로 고쳐 槥城縣에 속하게 함.
-고려 태조 정해(貞海)현
-고려 현종9년 운주에 속했다가 감무를 두고 여미(余美)현으로 불렀다.
*한자 표기는 시대에 따라 餘를 쓰기도 하고 余를 쓰기도 했음.
-조선 숙종17년 해미현
-1914 서산군 정미면 여미리
-1957년 11월 6일 정미면이 당진군으로 편입(대호지면과 함께)
-1973년3월12일 당진군 정미면 여미리가 서산군 부석면으로 편입
■ 고현(古縣)과 고산성(古山城)
일찍이 백제 때 여촌현이 있었고, 고려시대에는 여미현이 있었다. 지금의 '여미리'는 과거 현 이름에서 유래했음을 알 수 있다. 백제나 고려 때 여미현의 중심지가 여미리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오늘날 여미리에는 옛 산성터(전라산)가 있고, 장시 터가 '웃장터'라는 자연 마을 이름으로 남아있다. 역천까지 뻗어있는 마을 북쪽 산줄기 끝은 경사가 급한 독립 구릉을 이룬다. 이 구릉, 즉 전라산이 옛 성터라고 주민들은 말한다.
그런데 <대동여지도>에는 가야산에서 북쪽으로 뻗어 내린 산줄기 끝에 옛 여미현과 옛 산성이 표시되어 있다. 이 지도가 맞다면 여미리는 역천에 의해 이 산성과는 끊어져 있으므로 옛 여미현은 지금의 여미리가 아니다.
반면 <1872지방지도>에는 산성과 장터(여미시)가 역천의 서쪽에 표시되어 있다. 일도면 여미리로 표시되어 있는데 아래 지도를 보면 하천(대모천/지금의 역천) 오른쪽에 표시되어 있어서 얼핏 <대동여지도>처럼 역천의 동쪽에 성터가 있는 것 같아 보이지만 사실은 남북으로 긴 해미현을 표시하기 위해 방향을 왜곡시켰음을 알 수 있다. 이 하천은 실제로는 북쪽으로 흐르므로 여미리와 산성, 그리고 장터는 모두 대모천의 서쪽에 있는 것이다.
■ 여미장은 언제까지 있었을까?
1일과 6일에 열렸던 여미장은 주변의 군현 소재지 장시에 비해 규모는 크지 않았지만 위치로 보면 서산, 당진, 해미를 잇는 허브 역할을 했던 곳이었다. '웃장터'라는 자연 마을 이름으로 남아있다. 1910년대까지 장이 열렸다고 전한다.
그런데 왜 웃장터일까? 마을의 윗쪽에 장터가 있었던 것일까? 하지만 마을의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외부와 연결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장터 자리로는 적당하지 않다. 웃장터는 이름과는 달리 마을의 아래쪽, 오늘날 마을 입구인 여미갤러리카페 일대에 있었다.
그렇다면 왜 '웃장터'라는 이름이 붙었을까? 여기에 붙은 '웃'은 마을에서 위, 아래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운산면 일대에서 위, 아래를 뜻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마을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아랫장터는 지금의 운산면 소재지(용장리)에 있던 시장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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