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남도/서산

서산 답사 II : 운산면 여미리(2)

Geotopia 2022. 3. 28. 14:59

 전주이씨 선성군파 종족 촌락

  정종의 4남 선성군의 후손이 세거하는 마을이다. 선성군은 9남3녀를 두었는데 여미리는 3남 명산부수(明山副守) 이금정(李金丁)의 후손들이 이룬 마을이다(선성군의 장남인 명선대부(明善大夫) 춘산도정(春山都正) 이귀손(李貴孫)의 후손이라는 설도 있다). 여미리 전주이씨는 ‘예미 이씨’라고도 부른다. 처음 입향한 인물은 선성군의 6세손 이창주(李昌冑)[1567~1648]이다. 

  마을에 선성군 사당(선정묘), 가묘(이창주, 이정방, 이진백, 이택 등), 신도비(이택), 이택이 심은 비자나무,  이진백의 글이 새겨있는 바위(西巖洞天, 醉石) 등 관련 경관이 남아 있다. 지금도 마을 전체 80여 가구 중 절반 이상이 전주이씨이다.

 

 宣城君 李茂生(1392-1460)

  정종의 네 번째 서자이며, 숙의 지씨(淑儀 池氏) 소생의 둘째 아들이다. 1454년(단종 2) 3월에 중의대부에 오르고 선성군에 봉해졌다. 1872년(고종 9) 3월 고종이 종친부에 하교하기를 “정종대왕의 여러 왕자에 대한 봉작을 논의하여 올바르게 하라.” 하여 선성군을 상보국숭록대부 영종정경으로 추증했고 시호를 `양정'이라 내렸다. 시법(諡法)에 따르면 “온화하고 선량하며 배우기를 좋아하는 것을 양(良), 너그럽고 화락하며 좋은 이름을 간직하고 마치는 것을 정(靖)"이라 하였다.

  선성군의 배위는 셋이다. 오천군부인 정씨는 참의 종성(宗誠)의 딸로서 조부는 충의백(忠義伯) 포은(圃隱) 몽주(夢周)이며, 증조는 시중 운관(云瓘)이고, 외조부는 밀직제학 죽산박씨 중용(仲容)이다. 1녀를 두었다. 안강군부인 김씨는 상호군(上護軍) 중약(仲約)의 딸이며 조부는 밀직사 원수(元帥) 종연(宗衍)이며 증조는 부사 정(精)이고 외조부는 개국공신 한양조씨 인옥(仁沃)이다. 1남을 두었다. 평산군부인 한씨는 평산백(平山伯) 후저(後抵)의 후손이다. 한씨와의 사이에는 8남 2녀를 두었다.

  묘는 남한산성 동북쪽 40km의 거리에 덕봉(현 경기도 하남시 덕풍동)의 남쪽 남향의 등성이에 있다. 왼쪽에 정씨, 김씨가 부장되어 있고 한씨는 섬돌 아래에 부장되어 있다. 

 

▶ 宣靖廟: 宣城君 사당

  선정묘는 선성군과 배위 3명의 신위를 봉안한 사당이다. 선성군의 사당은 본래 경기도 파주에 있었으나, 후손이 끊기면서 서산의 후손들이 그 제향을 대신 맡게 되었다. 후손의 전언에 따르면 선성군의 신위는 조선 말기 파주에서 서울~수원~온양~예산~면천을 거쳐 옮겨졌으며, 곳곳에서 군인의 호위를 받았다고 한다. 이렇게 모셔온 신위는 한동안 후손의 집에 임시로 보관되다가 1928년 선정묘를 건립하여 이안(移安)하였다.

  사당과 외삼문으로 구성된 남향 건물이며 솟을대문으로 들어서면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사당이 있다. 사당은 2단의 단을 조성한 위에 마룻바닥은 타일을 깔았고, 4각의 높은 초석에 둥근 기둥을 세웠다. 화려한 다포 양식에 지붕은 양 측면에 방풍판[맞배지붕에서 비바람을 막기 위하여 붙여 댄 널빤지]을 대목(帶木)에 의지하여 붙이고, 판자와 판자 사이에 졸대[좁고 가늘게 쓰는 재료]를 덧대어 붙였다. 시설이 있는 맞배지붕이다. 동측에 재실인 선미재(宣美齋)가 있다. 선정묘는 조선 시대 왕자와 그 배위를 기리는 사당으로서 그 사례가 드물다.

  매년 음력 7월 7일에 제향을 올리고 있다. 한편 신우의 뒤편을 한석봉(韓石峯)의 친필 병풍이 두르고 있었다고 하는데, 1990년대에 유실되었다.  [참조: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선정묘

▶입향

  여미리에 처음 입향한 인물은 이창주(李昌冑)[1567~1648]이다. 이창주는 선성군의 5대손으로 선성군-이금정(명산부수)-이옥형(하양령)-이찬(파령부령) - 이극검 - 이창주 순으로 계보가 이어졌다.

 

 

족보 계보도 - 장서각기록유산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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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창주가 입향한 시기는 병자호란 때로 입향한 이유는 뚜렷하게 알려진 것은 없다. 이창주의 행직(行職)은 기록된 것이 없으며 증직으로 의정부 좌승지 겸 경연참찬관을 받았다. 

 

이창주 묘. 묘비에 따르면 증직으로 정3품(통정대부) 좌승지 겸 경연참찬관을 받았다.

 

이창주 부인의 묘는 합장하지 않았고 이택 묘 뒷편에 있다. 연대표기(周甲)가 특이하다.

 

▶유력 종족촌락으로 성장

  이창주 이래 이정방(李定邦)-이진백(李震白)-이택(李澤)으로 가계가 이어지면서 종족촌락의 면모를 갖춰갔다. 특히 이창주의 3대손 이택에 이르러서 가문이 크게 성장하였다. 종족촌락이 번성하기 위해서는 가문에서 현달한 관리가 나와야 하는데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이택이다. 이택은 삼도통제사(종2품)에 올랐는데 그 영향으로 선대 조상들이 증직되었다. 이진백, 이정방이 모두 종2품직(오위도총부 부총관)으로 증직되었다. 

  가문의 성장에서 통혼 관계도 중요하다. 여미리 전주 이씨는 서산의 유력 성씨들과 통혼 관계를 맺고, 교류하면서 안정된 종족촌락으로 자리를 잡아 갔다. 일례로 이웃한 운산면 갈산리 안동김씨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는데 갈산리 안동김씨 입향조인 김가근의 처가 이진백의 동생 이동백의 딸이다. 갈산리에는 김가근의 효자정려가 남아 있는데 김가근 사후 해미현 주민들이 정려를 하사받기 위해 크게 노력한 결과라고 한다. 이때 여미리 전주이씨 가문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인근에 살던 약천 남구만(1629년-1711년)과도 교류하였다. 남구만은 서산에 은거하면서 곳곳에 행적을 남겼는데 서산시 해미면 산수리 수원동(水源洞)에 그의 유허비가 있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남구만이 서산에 잠시 유배되었을 때 이곳에 초막을 짓고 살았다고 한다. 이때 이택과 깊이 사귀었으며, 그의 아버지 이진백(1622-1708)이 죽자 묘비명을 지었다.

 

이진백 묘. 뒷편은 이정방 묘

 

이정방 묘비. 연대를 숭정기원으로 표시하고 있다.

 

이택[李澤, 1651 효종2~1719 숙종45]

  1676년(숙종 2) 무과에 급제한 후, 훈련판관‚ 고산진첨절제사(高山鎭僉節制使)‚ 공주영장‚ 부산진첨사‚ 전라좌수사‚ 영종방어사‚ 태안군수‚ 춘천병사‚ 황해병사‚ 북병사 등을 거쳤다. 남구만(南九萬)·이상진(李尙眞) 등과 교유하였는데, 이들의 추천으로 도총부경력(都摠府經歷)이 되었다. 이어 사복시내승(司僕寺內乘)을 거쳐 훈련원정을 역임한 뒤, 전라좌도수군절도사와 삼도수군통제사(종2품)에 이르렀다. 1718년(숙종 44) 병중에 평안도병마절도사에 제수되어 재직하던 중 병사하였다.

  품성이 순결하고, 청렴으로 이름이 높았다. 아들 이의천(李倚天)이 기록한 문집 『사주록(泗洲錄)』이 전한다. 이 책의 대부분은 이택의 가계와 출생‚ 출사‚ 관력 등의 행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택의 연보 뒤에 아들 이의천이 사주성(泗洲城)에서 쓴 것이라는 기록으로 보아 책명은 이 사주성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이 책에 이택의 신도비명도 수록되어 있는데, 원래 윤봉조가 지었던 글이 불에 타 이의천과 가인(家人)들에 의해 재구성된 것이다. 

  여미리에는 이택의 묘와 신도비가 있다. 묘비는 1728년(영조 4)에, 신도비는 1731년(영조 7)에 각각 세워졌다. 신도비 비문은 윤봉조(尹鳳朝)[1680~1761]가 짓고 글씨는 김진상(金鎭商)[1684~1755]이 썼으며, 전액(篆額)은 조상(趙尙)이 썼다. 이들은 모두 노론계 인물로, 특히 김진상은 글씨에 뛰어나 많은 비문을 남겼다. 

  부모 봉양에도 힘써 아버지와 절친한 노인들을 초빙하여 시와 노래로 즐겁게 해드리기로 주변에 소문이 자자하였다.   

 

이택 신도비

▶330년 비자나무

  이택이 현직에 있던 1675년(숙종 1), 제주도에서 비자나무를 흙과 같이 가져와 심었다고 한다. 수령은 약 330년 이상으로 전주 이씨 가문과 함께 해 온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는 나무이다. 특히 중부 지방 이북에서 자라고 있는 드문 예에 속해 주목되고 있으며, 충청남도 기념물 제174호로 지정되었다. 

 

여미리 비자나무

 

▶서암동천(西巖洞天)과 취석(醉石)

  이진백은 글씨를 잘 썼다고 전한다. 해미읍성 남문 현판의 '鎭南門'이 이진백의 글씨다. 그의 글씨가 마을 뒷산 계곡 바위에 새겨져 있다. '醉石'은 은봉산 자락에서 흘러 내리는 계곡 바위에 새겨져 있으며, '西巖洞天'은 그 옆 산기슭에 있는 화강암 너럭바위에 새겨져 있다. '洞天'은 '신선이 사는 곳'을 뜻하는데 그 앞에 이진백의 호인 '西巖'을 붙였다. '신선 이진백이 사는 곳'인 셈이다. '醉石'은 도연명 고사에서 따 온 글귀로 도연명이 술에 취하면 올라가서 술이 깰 때까지 잠을 자곤 했는데 그 바위를 취석이라 불렀다고 한다. 이곳에서 이진백은 약천 남구만과 자주 어울렸다고 전한다. 이진백은 남구만보다 일곱살 연상이다. 후에 남구만은 이진백의 아들 이택과도 교류하였다고 전하는데 남구만이 22세 연상이어서 벗으로 사귀었다기 보다는 부친과의 인연으로 교류하였을 것이다. 

'西巖洞天'이 새겨진 화강암 너럭바위
醉石바위

 

■ 서산유씨 유적

  서산유씨가 입향한 시기는 조선후기~일제강점기로 추정된다. 서산유씨는 서산 토착 성씨로 文化柳氏 9세 류순(柳淳)의 3남인 류성간(柳成澗)이 서령부원군(瑞寧府院君)에 봉해졌으므로, 이 때부터 서산을 본관으로 삼아 분적했다고 알려져 있다. 고려 시대 이래로 서산에 토착하여 인지면 애정리를 중심으로 서산 지역에 널리 퍼져 있었으므로 여미리에 들어오기가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정착연대가 명확하지는 않으나 유상묵이 1919년 집(유기방가옥)을 지었다고 전하며, 유상묵은 1927년 사망하여 그 묘가 여미리 앞 전라산에 있다. 

  여미리 유씨는 금헌(琴軒) 유방택(柳方澤)의 후손이다. 유방택은 고려말 판서운관사(判書雲觀事)를 지냈다. 판서운관사는 기상, 천문 관련직책으로 유방택은 천문학에 뛰어난 능력이 있었다고 한다. 조선 개국 후에는 권근 등과 함께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국보 228호)'라는 천문도를 만들었다. 

  유방택의 후손으로 서령유씨 17세손인 유춘배(柳春培, 호조참판)가 여미리 옆 가좌리에 터를 잡았다(平山落雁一雁東飛, 기러기가 평산에 자리를 잡았고 그 중 한 마리가 동쪽으로 날았다). 22세손 유상묵은 본래 가좌리 출신으로 자수성가하여 용양위 부사과에 올랐다. 이후 유상묵이 여미리에 집을 짓고 정착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전통가옥

 

*유영호가옥: 1905년. 옆 마을인 갈산리에 있다.

 

*유기방가옥

  1919년에 세워졌다. 여미리 큰말에 있다. 유기방의 할아버지인 유상묵이 운산면 가좌리에서 여미리로 이사하면서 지은 집이다. 독특한 모양의 대문은 1988년도에 이전 건물을 일부 허물고 새로 지었다고 한다.

모양이 독특한 유기방 가옥 대문

 

 

서산 유기방 가옥 - 디지털서산문화대전

[정의] 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 여미리에 있는 일제 강점기 전통 가옥. [위치] 서산시 운산면 소재지에서 국도 32호선을 따라 서쪽으로 약 2㎞ 정도 가다 보면 도로의 북쪽으로 여미리 마을이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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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상묵가옥

  여미리 이문안에 있다. 1925년 유상묵이 서울의 운현궁을 본떠서 지었다고 알려져 있는데 집안의 기록에 따르면 1896년에 처음 지어진 집을 유상묵이 사들여서 고쳐지었다고 한다. 이때 운현궁의 구조를 가미했다고 한다. 

유상묵의 아들 유정로는 일제강점기 와세다 대학에 유학하여 교육자로 살았는데 이 집 이름을 '나전헌(螺田軒)'으로 지은 인물이다. 그의 호가 나전인데 이는 유상묵 묘가 있는 전라산(田螺山)에서 따 온 것이다. 

 

유상묵가옥

 

 

서산 유상묵 가옥 - 디지털서산문화대전

[정의] 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 여미리에 있는 일제 강점기 전통 가옥. [변천] 서산 유상묵 가옥은 1925년 유상묵[구한말 종5품]이 명당이라고 전해지는 현 위치에 서울의 운현궁(雲峴宮)을 본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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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상묵 묘와 송덕비

  유상묵(1863~1927)묘가 마을 앞 전라산(全羅山/유상묵 묘비에는 田螺山)으로 기록되어 있다)에 있다. 묘비에는 '宣略將軍 龍驤衛副司果'로 기록되어 있고, 전라산 아래 묘 입구에 세워진 송덕비에는 '사과(司果)'로 기록되어 있다. 품계상 선략장군은 서반의 종4품직이며, 용양위 사과는 정6품직이고, 부사과는 종6품직이다.

 

 

■ 불교 경관

▶석불입상

 

 

서산여미리석불입상(瑞山余美里石佛立像)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높이 310㎝.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32호. 미륵불로 속칭되는 이 상은 높이 307㎝, 너비 80㎝, 두께 50㎝에 달하는 직사각형 석재의 한 면을 깎아 조각하였다. 토속적인 상호(相好)주 01)와 단순화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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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천 상류에서 떠 내려와 흙 속에 묻혀 있던 것을 주민들이 수습하여 이 자리에 세웠다고 하는데 역천의 상류인 가야산 일대에는 많은 불상과 절터들이 있다. 가야산 자락에 있던 불상이 홍수에 떠내려 갔다고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연관성이 전혀 없다고 단정할 수도 없다. 일례로 용현리 서산마애삼존불상 바로 아래쪽에는 '강댕이 미륵불'로 불리는 석불이 있다. 고풍저수지가 만들어지면서 물에 잠기게 되어 이곳으로 옮긴 불상이다. 이 불상은 여미리 석불보다는 크기가 작지만 분위기는 매우 비슷하다. 여미리 불상이 이곳에서 떠내려 가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가야산 일대의 풍부한 화강암이 재료로 쓰였을 가능성은 매우 크다.

 

강댕이 미륵불. 여미리 석불보다는 크기가 작고, 조성된 시기도 늦지만 분위기가 많이 닮았다.

▶황운사

  여미리에는 황운사 라는 절이 있다. 유서 깊은 절은 아니지만 황운사에 있는 불상도 눈길을 끈다. 최근에 조성된 불상이지만 분위기가 역시 여미리 석불입상을 닮았다. 왼손과 오른손이 서로 반대이지만 모양은 많이 닮았다. 강댕이 미륵불과는 양손의 방향과 수인이 같다. 불상을 조성할 때 여미리의 상징과도 같은 석불입상을 본따서 '여미리 답게' 조성하지 않았을까 생각하게 된다.

 

황운사 석불입상

 

■ 토속신앙 경관

 

▶산신제 바위

  뒷산 중턱에 산신제를 올리는 바위가 있다. 보통 유교적 전통이 강한 마을에서는 토속 신앙이 배제되는 경우가 많지만 여미리에는 유교적 전통과 함께 토속신앙이 공존하면서 유지되어 왔다. 산신제는 정월대보름날 지낸다. 

 

▶장승제

 

 

여미리 미륵제, 장승제 - 디지털서산문화대전

[정의] 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 여미리에서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며 지내는 마을 제사. [개설] 여미리 미륵제, 장승제는 매년 음력 1월 14일 오후 3시에 전라산 기슭의 산제당과 마을 중앙에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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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라산 산성

  산 앞에 있는 바위가 마치 소라(螺)처럼 생겼다 하여 '田螺山)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全羅山'으로 표기한다. 원래 전라도에 있던 산인데 어느날 이곳으로 날아와서 붙은 이름이라고 한다. 동남쪽으로 역천에 면하고 있는데 하천 쪽 경사가 급하여 방어용 산성이 있었다. 

  역천은 가야산 서쪽 용현계곡에서 발원하여 북쪽으로 흘러 이곳을 지나 당진을 거쳐 아산만 끝으로 흘러나간다. 따라서 이 통로는 서해안-가야산-웅진으로 이어지는 중국과의 통상로 가운데 하나였다. 용현리 마애여래입상도 이 통로상에 있다. 지금은 오지이지만 백제시대에는 요충지였을 가능성이 크다. 현 치소가 자리잡을 만한 위치였던 것이다. 

 

역천 유역

 

전라산에서 바라본 역천. 앞에 보이는 시가지는 운산면 소재지(용장리)이고 멀리 왼쪽으로 가야산 일대가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