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남도/서산

가야산(伽倻山): 불교의 상징

Geotopia 2021. 6. 17. 14:34

 불교문화 특구 가야산

 

  불가에서는 가야산을 '불교문화 특구'라고 부른다. 초기 불교 유적인 마애여래삼존상을 비롯하여 수많은 절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남아 있는 절이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는 정도지만 가야산 자락에는 무려 200여 개의 절터가 있다(김기석, 2012, 내포에 핀 연꽃 가야산의 절터들, 도서출판 가야). 그 중에서 대표적인 큰 절이 동서남북에 각각 하나씩 있었다고 하는데 동쪽에는 서림사, 서쪽에는 개심사, 남쪽에는 가야사, 북쪽에는 보원사이다. 지금 남아있는 절은 개심사 뿐이고 보원사는 터만 남아있으며 서림사는 회암서원(예산군 봉산면 봉림리)이 세워지면서 자리를 내주었고, 가야사 자리는 남연군묘가 차지하고 있다. 절터는 가야산을 중심으로 동쪽의 가야사와 서쪽의 보원사 일대에 가장 많이 남아있다.

 

  가야산이 불교문화 특구라는 사실은 천주교에서 내포를 '신앙의 못자리'라고 부르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다. 중교적 의미를 떠나서 지리학적으로 매우 흥미로운 사실이다. 즉, 우리나라에 들어온 시기에서 많은 시간 차이가 있음에도 내포라는 지역적 공통점을 갖는다는 점이다. 

 

▣ 가야산, 상왕산, 원효봉, 가섭봉

 

  '가야(伽倻)'는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었던 '부다가야(बोधगया, Bodh Gaya)'에서 비롯된 이름으로 불교를 상징한다. 가야산이라는 이름만으로도 종교적으로 의미와 권위가 있는 것이다. 가야산 뿐만 아니라 이 일대에는 상왕산(象王山), 원효봉(元曉峰), 가섭봉(迦葉峰) 등의 불교식 이름이 기록에 전하거나 남아있다. '상왕'은 부처를 가장 큰 코끼리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로 역시 불교적 상징성을 갖는 이름이다. 산스크리트어로 코끼리는 'Gaya(गज)'이므로 뜻으로 보면 '상왕산'과 '가야산'은 같은 이름이다. 일설에 의하면 가야산은 백제 때까지 상왕산이라 불렀는데, 신라 통일 후 상왕산 밑에 가야사를 세운 뒤 가야산이라 하였다고 한다. 

 

예당평야(신리성지)에서 바라 본 가야산지

 

▣ 언제부터 가야산은 불교의 상징이 되었을까?

 

  내포의 가야산이 언제부터 '가야'라는 이름을 얻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통일신라 때 '가야'라는 이름이 쓰이고 있었다. 신라는 일찍부터 전국의 명산대천에서 제사를 지냈는데 삼국통일 이후로는 확장된 영토의 사방 끝에 명산을 지정하여 제사를 지냈다. 이를 사진(四鎭)이라 하였는데, 동진(東鎭)은 아곡정(牙谷亭)의 온매근(溫沬懃), 남진은 추화군(推火郡)의 해치야리(海耻也里, 일명 실제悉帝), 서진은 마시산군(馬尸山郡)의 가야갑악(加耶岬岳), 북진은 비열홀주(比列忽州)의 웅곡악(熊谷岳)이었다. 즉, 가야산은 통일신라 때 사진 중 서진이었으며 당시 이름은 '가야갑악'이었다.

 

  서산마애여래삼존상이 백제 시대에 조성되었으므로 통일신라 서진이 되기 이전부터 이 산은 불교에서 꽤 의미가 큰 장소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더 오래전부터 불교적으로 의미가 있어서 마애불이 조성되었는지, 아니면 마애불이 조성됨으로써 불교적 장소가 되었는지는 마치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같은 이야기지만 고대 이래로 불교에서 매우 의미가 큰 장소였음은 틀림없다. 

 

  백제시대 태안반도로 유입한 중국 문화는 가야산 북록을 지나 예산-공주-부여에 이르렀다. 태안 백화산 마애불-서산 마애여래삼존상 - 예산 화전리 사면석불입상 등 당시 석불들이 이 통로 상에 자리를 잡고 있다. 이들 여래입상과 마애불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초기에 조성된 것이므로 조성 당시 이 지역을 불교적 장소로 만드는 데 크게 공헌했을 것이다. 

 

서산 마애여래삼존상

 

▣ 장소성의 강화

 

  불교의 상징으로서의 장소성이 오랜 세월 유지되면서 불교 경관들이 점차 늘어나게 되었고 이는 또다시 장소성을 강화하는 순환구조가 만들어졌다. 백제시대 마애여래삼존상이 조성된 이후 개심사(654년, 의자왕14년), 보원사(통일신라시대 기록으로 확인이 되는데 출토된 일부 유물(금동여래입상) 중에는 연대를 백제시대로 올려볼 여지가 있는 것도 있다), 663년(문무왕 3)에 창건되었다는 설화가 전하는 일락사, 고려시대에 창건한 문수사, 가야사(신라 때 창건되었다는 설도 있음) 등 많은 절들이 가야산 주변에 자리를 잡았다.

  일락사, 개심사, 문수사 등 지금 가야산 주변에 남아있는 절들은 공통적으로 '상왕산(象王山)'이라는 산 이름을 절 앞에 붙이고 있다. 그렇게 보면 1,500여 년 세월 동안 상왕산이라는 첫 이름의 관성이 살아있는 것이며, 상징적인 그 이름은 장소성을 유지, 또는 강화하는 역할을 해왔다고 볼 수 있다.

 

상왕산 일락사

 

사대부 가문이 적다: 억불숭유에 대한 불교의 소극적 저항

 

  내포에서 가장 높은 산인 가야산은 당진, 서산, 예산, 홍성 등 내포의 주요 지역을 주변에 거느리고 있다. 내포에서 오서산 다음으로 높은 산으로 수려한 경관을 자랑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야산 주변에는 유서 깊은 종족 촌락이 많지 않다. 북동쪽 기슭인 예산군 덕산면, 고덕면 일대에 몇몇 가문이 정착을 했지만 수려한 산세에 비한다면 밀집도가 낮다고 볼 수 있다. 특히 가야산의 서쪽인 서산시 지역에는 동쪽인 예산군, 홍성군에 비해 사대부 가문의 밀도가 낮다. 가야산 서쪽의 용현계곡은 이 일대에서는 가장 깊은 계곡이지만 오래된 마을이 없다.

 

  일찍부터 불교적 장소였기 때문에 마을이 들어서기 어려웠을 것이다. 산 자락에 200여개에 달하는 절이 있었다면 민가가 들어설 만한 곳이 많지 않았을 것이다. 특히 종족촌락은 조선 중기 이후에 주로 성립되었는데 이때는 이미 가야산 일대가 수많은 절로 뒤덮인 '불교 특구'가 되어있던 상태였다. 아무리 억불숭유가 국시이고, 이를 따르는 사대부들이 종족촌락 탄생의 주인공들이라고 하더라도 이미 터를 잡고 있는 절을 몰아내고 집을 짓기 위해서는 엄청난 권력과 함께 굳건한 유교적 신념이 필요했다. 심지어 가야사를 불태운 강심장 흥선대원군도 나중에 보덕사(報德寺)라는 절을 지어 마음의 빚을 갚았으니까.

 

가야사터 자리를 차지한 남연군묘. 뒷쪽으로 원효봉이 보인다

 

  스님을 멸시해서 홍수를 당하고, 소리에 놀라 뒤돌아 보다가 돌로 변했다는 설화는 우리나라 곳곳에 전한다. 내포 일대에도 비슷한 설화가 여럿 전한다. 조선의 숭유억불로 일시에 세력이 약화된 불교는 조선시대 내내 성리학으로 무장한 사대부들의 천대를 감수해야 했다. 고려 때의 전성기로 되돌아 갈 수 없었던 불교는 스님이나 불상을 희롱하거나 불당이나 탑을 훼손한 자에게 벌을 내렸다는 전설로 소극적인 저항을 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 후기 실학자 이철환은 <象山三昧>에서 가야산 일대에 전하는 이런 종류의 설화를 몇 개 소개하고 있다. 보현사 불상을 희롱하여 불치의 병을 얻었다거나 보원사 뒷산의 탑을 훼손하고 묘를 써서 횡액이 끊이지 않는 가문 이야기가 그것이다. 하지만 이철환은 성리학적 소양을 갖춘 사대부답게 '능력을 발휘해서 화를 막으면 될 것을 어째서 일이 터진 후에 횡액을 내리는 지' 의문을 제기함으로써 불교의 권위를 끝내 인정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명문 실학 가문인 여주이씨 출신의 이철환도 불교의 종교적 측면을 완전히 무시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상산삼매>는 이철환이 쓴 가야산 일대 사찰 유람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