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사는 이야기/세상사는 이야기

이런저런 집안 일 하기

Geotopia 2021. 6. 20. 18:33

▣ 早退事由는 四字成語로

 

  조퇴를 달면서 사유를 뭐라고 쓸까 잠깐 생각을 하다가 옆자리 선생님께 우스개 삼아 물었다. 오래 전이지만 '의가사'라는 낱말이 두루두루 쓰였던 적이 있있다. '집안 일 때문'이라는 말을 한자말로 '힘을 준' 낱말이다. 조퇴를 하는 이유가 대부분 이것이련만 무슨 이유인지 갑자기 쓰지 못하게 했었고, 그 뒤로 이런저런 '개성있는(?)' 조퇴 사유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갑자기 '조퇴 사유'를 주제로 이야기꽃이 피었다. '개인용무'가 맨 먼저 나왔다. 그것과 '의가사'는 어떻게 다르냐고 물었더니 '그렇게 썼더니 결재가 났다'는 동문서답인지, 우문현답인지가 나왔다. 가사조력, 병원진료, 차량수리, 심지어는 법원출두까지 나왔다. 그중에 어떤 걸 골라서 조퇴를 쓸때마다 돌려막기 하면 된다는 원로의 조언이 결론격으로 나왔다.

 

  듣다 보니 웃음이 나왔다. 이 무슨 난데없는 사자성어란 말인가!

  왜 죄다 네 글자여야 하느냐, 세 글자나 다섯 글자면 안 되냐고 했더니 모두들 대답이 없다. 굳이 대답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겠지? 우스개처럼 던졌지만 우스개만은 아니다. 조퇴하는 이유를 사자성어 한자말로 만들라는 규정이 있는 것도 아닌데 왜 몽땅 네 자 짜리 한자 말이어야 하는가? 갑자기 홍콩 영화 제목들이 머리에 떠오른다. 와호장룡, 첩혈쌍웅, 동방불패, 화양연화··· 訛戶場溶(집이 잘못되어 마당이 질퍽거려서), 洞訪不悖(동사무소 찾아가서 잘못된 것 바로잡으려고)··· 한자 사전을 뒤져 이런 뻘짓을 해봤다.

 

▣ 그 깊은 뿌리,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나 다 있었던 분리 본능

 

  프랑스어를 사교어라고 한다. 소싯적에 처음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잘 이해가 되질 않았고 솔직히 지금도 그 뜻을 깔끔하게 알지 못한다. 내내 자기네 나라 말을 쓰다가 사교장에 가면 프랑스어로 바꿔 말한단 뜻인가? 발음과 철자가 우리말처럼 딱딱 맞는 말은 별로 없는 듯한데 프랑스말은 특히 규칙이 남다른 것 같다. 오죽하면 마리 앙뜨와네뜨가 철자를 틀려서 비아냥을 당했을까? 어려운 철자법은 결국 귀족들과 아랫 것들을 쉽게 구분할 수 있는 좋은 수단이다. 그 무리에 낄려면 프랑스말을 유창하게 해야 하니 거기서 사교어라는 말이 나왔음직하다. 

  훈민정음을 반대한 관료들은 또 어땠나? 무지렁이들이 글을 안다는 것을 그들은 용납할 수 없었다. 사대부들은 더욱 중국 글에 몰두하여 지식을 축적함으로써 무지렁이들과 차별화하고자 하였다.

  남인과 소론의 거물들이 송시열의 논리를 쉽게 반박할 수 없었던 것은 범접할 수 없는 그의 경전 지식이 큰 몫을 하였다. 그럴수록 그들은 더욱 어려운 말과 글에 집착하였다. 한말에 우리나라에 와있던 미국인 헐버트(Hulbert.H.B)는 「사민필지」라는 지리책을 한글로 썼다. 그는 이책 머릿말에서 한글이 우수한데도 널리 쓰이지 못하고 있음을 안타까워 하고 있다. 

 

▣ 얕지만 너무나 넓게 퍼진 뿌리, 일제 강점기

 

  이렇게 깊숙한 뿌리는 쉽게 캐내기가 어렵다. 더욱이 가까이에는 일제 강점기가 도사리고 있다. 일제가 남겨 놓은 유산은 오늘 우리의 화두인 '사자성어 조퇴 사유'의 가장 큰 원인이다. 우리가 쓰고 있는 한자말 가운데에는 일본어에서 비롯된 한자말이 매우 많다. '매우 많다'는 말보다는 한자말 거의 다가 일본말에서 비롯되었다고 해야 옳을지도 모른다. 조선시대에 쓰여진 책들을 보면 거의 모르는 낱말들로 이루어져 있다. 중국에서 쓰는 낱말도 비슷하다. 하지만 일본 신문을 보면 일본말을 모르는 사람이라도 얼추 그 뜻을 짐작할 수 있다. 우리가 쓰고 있는 낱말과 똑같기 때문이다.

 

  쉬운 예로 일제 군사용어는 대부분 두 자에서 네 자 사이의 한자말이었다. 한자를 써야만 하는 일본어의 특징에 군국주의가 합쳐져 이른 바 '절도 있는' 낱말로 표현되었다. 반합, 요대, 수갑, 사역, 모포, 고참, 금일, 명일···  지금도 대한민국 군대에서 쓰이고 있는 말이다. 군대를 다녀온 남성들에게는 아주 낯익은 말이고, 여성들도 그리 낯설지는 않을 것이다. 총기수입, 시건장치, 도수체조, 일석점호, 사관학교, 등화관제···에 이르면 조퇴사유가 네 글자 짜리 한자말인 이유가 조금은 짐작이 될 것도 같다.

 

이런 일본말들은 해방이 된 뒤에 없어지지 않고 한글로만 바뀌어 우리말로 변했다. 더욱이 친일파를 청산하지 못하면서 심지어는 일본말식 한자말이 '유식한 이들이 쓰는 말'로 오해되기에 이른다. 중학생이 되어 한자를 조금씩 알게 되면서 한글로만 알고 있던 낱말들의 뜻을 깨닫고 유레카를 느꼈던 경험이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없이 일제가 남긴 옳지 못한 유산에 파묻혀 간 것이다. 국민학교 때 '일어났던' 아이는 중학생이 되어 '기상'하였으며, '아침밥' 대신 '조식'을, '먹는' 대신 '식사'하게 되었고, '학교에 가던' 것을 '등교'로 바꿨다. '기율부'의 눈을 피해 '입실'하여 '학업'에 '열중'하였다. 

 

▣ 이런 저런 집안 일 하기

 

고민(?) 끝에 내가 쓴 사유는  '이런저런 밀린 집안일 하기'.

* 덧 붙이기: 이 글에 쓰인 한자말도 셀 수 없을 정도다. 사실 세어 보려다 말았다. 나름 안 쓰려고 생각하면서 썼는데도 그렇다. 스며들어와서 '쇠때' 가 되어버린 낱말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