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사는 이야기/세상사는 이야기

트럼프주의, 신자유주의가 낳은 썸웨어의 반란

Geotopia 2021. 1. 2. 19:23

▣ Trumpism, 사회적 현상

 

  트럼프주의(Trumpism)는 트럼프라는 독특한 사고방식을 가진 한 사람의 돌출 행동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OO주의(~ism)'가 붙었다는 것은 사회적 트렌드라고 봐야 옳다. 지난 미국 대통령 선거로 본다면 미국인의 절반 가까이가 그를 지지하고 있으며, 라틴아메리카나 유럽에서도 그 추종자들이 꽤 많다는 소식이 들린다. 멀리 갈 필요도 없이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트럼프의 대선 결과 불복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우리나라에도 꽤 많다.

  트럼프주의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더 많았으므로 재선에 실패했겠지만 결과를 자세하게 들여다 보면 심상치 않은 면이 적지 않다. 무려 46.8%의 지지를 받은 것도 그렇지만 6,300만표로 당선이 됐던 2016년 대선에 비해 1천만 표나 더 많은 7,422만표를 얻었다는 사실은 놀라움을 넘어 무섭기조차 하다. 막말과 분열주의로 이성과 합리주의를 송두리째 깨뜨려 버린 트럼프를 얼추 반에 가까운 미국인들이 지지한다니! '비상식적 대통령을 다수 미국인들이 이성적 판단으로 심판했다'고 쉽게 정리해 버리기에는 나타난 결과가 매우 심각하다.

  그렇다면 트럼프주의가 등장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Red neck, 신자유주의의 소외계층

 

  포스트모더니즘의 등장은 거대담론의 실종으로 이어졌다. 타자로 통칭되는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는 것이 진보의 역할로 치부되었다. 다양한 '소수'는 다수결에 도움이 되지 않으며, 그들에 대한 '이해'는 심정적, 정신적인 것으로 사회·경제적 조건을 향상시키는 것과는 큰 관계가 없다. 하지만 1970년대 이후 수십 년 동안 그것이 통했던 것은 진보적 가치가 가지고 있는 정당성의 헤게모니 때문이었다. 

  1980년대 이후 급격한 산업구조 변화라는 쓰나미에 대한 대응책은 무한경쟁으로 표현되는 신자유주의를 낳았다. 신자유주의의 등장은 진보적 가치의 헤게모니에 결정적인 상처를 냈다. 무한경쟁은 필연적으로 지역간, 계층간 격차 확대로 이어졌다. 급격한 산업구조 변화에서 고학력 엘리트들이 훨씬 적응력을 잘 발휘할 수밖에 없었고, 이들이 점차 정치적 헤게모니를 장악했다. 이른바 브라만 좌파가 등장한 것이다. 신자유주의에 편승한 이들은 사회적 진보를 위한 지향점을 발견하지 못하고 젠더, 인종 등 정체성에 기대에 지지자를 규합하려 하였다.  

  반면에 전통적 보수주의자들은 돈만 밝히는 '바이샤 우파'가 되거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전통적 방식을 벗어나지 못하는 '썸웨어'로 전락하였다. 트럼피즘 추종자들은 바이샤 우파와 썸웨어의 결합체라고 볼 수 있는데, 계급적 특성에서 알 수 있듯이 마치 샌드위치 같은 이질적 계층의 물리적 집합체라고 볼 수 있다. 트럼프라는 자본가와 저학력, 농촌지역 중심의 지지층이 그것을 잘 보여준다. 이들에게 인종, 젠더 등의 문제는 '진보 정당'과 동일시 되는 이슈로, 진보 정권이 사회적 소수파에 관심을 기울이면 기울일수록 자신의 기득권을 빼앗아 가는 집단으로 인식하였다. 

 

▣ '옳음'과 '이익'의 대결  

 

  트럼프주의자들은 인권문제, 노동문제 등 이른바 '의식'이 필요한 의제에 대해 큰 의미를 두지 않는 경향이 있다. 심지어는 자신에게 해롭다고 판단한다. 미국에서 나타난 예를 보면 확실해진다. 백인경찰이 흑인 용의자 조지 플로이드를 죽게 한 사건에서 촉발된 흑인인권문제와 이를 막기위한 법안으로 민주당 급진파가 제출한 '경찰 예산 중단법안'은 오히려 중도적이거나 무당파층이 민주당에 등을 돌리는 결과를 초래했다. 인권 문제는 '이익'차원이 아니라 '의식'의 문제이다. 인권문제가 이익의 차원이 되기 위해서는 '나의 문제'가 되어야 하지만 흑인들조차도 자신을 클루니와 동일시하지 않는 사람이 많다. 하물며 흑인이 아닌 사람들에게 흑인 인권 문제가 자신의 문제일리가 없다. 따라서 민주당의 급진적인 법안을 지지하기 위해서는 매우 수준높은 의식이 필요하다.

  똑같은 원리가 적용되는 이슈들이 아주 많다. 성소수자, 소수 인종(종교인), 장애인, 이주민, 무주택자, 저소득 노동자 등등. 타자(Other)의 타자성(Otherness)을 존중하는 포스트모더니즘에서 관심을 갖는 주제들이다. 당사자는 대개 소수이다. 표로 계산하자면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 이번 미국 대선에서는 그동안 전통적인 민주당 지지파였던 성소수자, 소수 인종(흑인, 히스패닉) 등이 공화당을 지지하는 비율이 눈에 띄게 늘었다.

  '에디슨 리서치'의 미국 대선 출구 조사에 따르면 성소수자들은 자신들의 정체성과 관련된 이슈보다는 안보·경제·무기소지 등 일반적 이슈들에 더 관심을 갖고 있다고 답했다. '인권 문제에 무관심하다'기 보다는 이제 성소수자들이 인권문제로 불편을 겪는 수준은 넘어섰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제 정체성 정치는 의미를 잃었다.

▣ 포스트모더니즘의 다수결 

 

  트럼프 정권은 '힘의 미국'을 구호로 내결던 이전의 공화당 정권(레이건, 부시)과는 딴판이다. 미군 철수와 동맹국에게 방위비 분담을 요구하는 것은 기존의 미국 대외 정책과 완전히 반대이다. 이는 '군산복합체'로 통칭되던 과거의 미국과 크게 달라진 산업구조를 반영한 결과이다. 패권주의는 설득력을 잃었고 예산절감, 재외 미군 축소 등 현실주의에 대중은 열광했다.

  여전히 다수의 미국인은 팍스아메리카나의 꿈을 버리고 있지 않지만 트럼프에게 대중은 자신에게 표를 줄 사람만을 의미하므로 미국인을 하나로 묶는 이슈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절반을 적으로 만들더라도 50%만 넘기면 되므로 트럼피즘은 나머지 절반을 결코 설득하려 하지 않는다. 다수결의 원칙을 정말 철저하게 잘 이용한다. 여론을 명확하게 반토막을 내되 당선에 필요한 숫자만 넘으면 된다. '압도적 다수'는 오래 전에 개에게나 줘버렸다. 50.1%만 되면 되는 것이다. 49.9%는 서슴치 않고 무시하고, 적대시한다.

  '옳지만 이익이 되지 않는' 상황에서 서슴없이 이익을 좇는 것이 개성으로 받아들여진다. 그것이 이익 연합으로 굳건한 대오를 만들기 시작했고 이를 노골화한 것이 트럼피즘이다. 아이러니컬하게도 트럼피즘은 포스트모더니즘을 모더니즘으로 조직한 고도의 정치술이다.

  타자를 인정하고자 노력했던 20세기 후반 포스트모더니즘은 이제 이렇게 뿌리를 내렸다. 다수결의 폭력성에 문제를 제기했던 포스트모더니즘은 신자유주의와 함께 새로운 타자를 만들어 내었고, 새로운 타자들이 이익 연합을 만들기에 이른 것이다. 

 

▣ 대한민국의 트럼피즘 

 

  우리나라를 가장 뜨겁게 달구고 있는 주택 문제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집 없는 가구를 위한 주택 공급 정책이 계속되고 있다. 하지만 집 없는 사람들은 우리 국민의 43.8%(2018년)이다. '집 없는 서민이 없는 나라가 좋은 나라다'라는 명제를 생각해 보자. 과연 이 명제는 침일까? 도덕적, 이성적으로 참이다. 하지만 집이 있는 56.2%의 사람들의 입장은 다를 수 있다. 2018년 주택 보급율은 104.2%이므로 이들 중에는 집을 여러 채 가지고 있는 사람도 많다. 따라서 민주적 의사 결정 정족수인 과반수의 지지를 받을 수 있다는 보장은 없다.

  노동자, 장애인, 여성, 이주민 등 타자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 정책이 강화될수록 보수진영의 반발이 커지는 것은 정체성 정치의 한계가 우리나라에도 이미 잘 나타나고 있음을 보여준다. 미국에 비해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의 경험이 짧기 때문에 우리나라는 미국보다 더 극심한 보수진영의 반발에 직면하고 있다.

 

▣ 대안은 있는가?

 

  트럼피즘이 성공할 가능성은 적다. 왜냐하면 지지파가 아니면 서슴없이 적대감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조건이 매우 유리한 상황에서 한 번쯤은 성공할 수 있지만 분리주의로 다수표를 확보하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그래서 문제다. 정권을 장악하느냐, 그렇지 않으냐를 떠나서 공동체를 반토막 내기 때문이다. 의회가 점거 당하는 미국에서, 부소불위 권력을 휘두르는 자본의 이익을 제한하고자 했던 대통령이 탄핵을 당하는 브라질에서 우리는 공동체를 반토막 내는 불타는 적개심을 본다. 

  '선거는 축제'라는 말이 성립하는 이유는 선거 과정 속에서 대중이 학습하고 성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트럼피즘의 선거는 축제가 아니라 '전쟁'이다. '우리'는 사라지고 적군과 아군이라는 이분법만이 판치기 때문이다. 의견이 다를 수는 있으나 그것을 적대시해서는 안 된다. 내 의견이 옳다고 믿는다면 설득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상식이다. 

  누군가를 배제함으로써 나에게 기회가 올 수 있을 것이라는 환상이 아니라, 공동체 구성원 간의 격차 해소가 경제를 건강하게 하고 결국 나에게도 이롭다는 인식이 필요하다. 이러한 인식은 일정한 지식을 필요로 한다. 트럼피즘과 저학력의 상관 관계를 보면 이를 잘 알 수 있다. 최저임금이 사회를 건강하게 하고 그것이 나아가 나를 이롭게 한다는 판단을 할 수 있으려면 적어도 거시경제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이 바탕에 깔려 있어야 하는 것이다. 

  기존의 정체성 정치는 생명을 다해가고 있다. '타자 혐오'가 일각에 살아 남아 있기는 하지만 타자의 타자성을 존중하는 것은 이제 사회적 대세가 되었기 때문이다. 소수 집단을 정당화하고, 다수에 저항하기 위한 정체성은 많은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의미를 잃었다. 따라서 이를 통합하여 새로운 지향점을 제시히는 정체성이 필요한 때가 되었다. AI의 보편화와 산업구조 변화, 인구구조의 급격한 변화 등은 기본소득제, 보편적 복지 등에 대한 대비를 필요로 하고 있다. 이들은 공동체가 건강하게 유지되기 위한 과제들이며 바로 코앞에 다가와 있는 문제들이다. 트럼피즘을 극복할 확실한 대책은 없지만 트럼피즘이라는 역사적 퇴보를 막는 방법은 미래지향적, 진보적 가치를 제시하고 실천해 나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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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적 사회경제 정책이 트럼프 부활 막는다

정의길의 세계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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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6. 미국 국회의사당을 점거한 트럼프 지지자들  *자료: BBC 뉴스(202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