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사는 이야기/세상사는 이야기

영어가 우리말 보다 쉽다

Geotopia 2020. 7. 11. 16:58

  장면 1

 

  길을 가다보니 가로수를 새로 심었는데 뿌리를 잘 내리라고 물을 주는 장치를 달아놨다. 길가에 길게 한 줄로 늘어서 있는 나무들에게 하나하나 물을 주기는 어려운 노릇이니 아주 좋은 아이디어다. 

  그런데,

  그 물주머니에 쓰여있는 글귀가 영 거슬린다.

  '점적관수用'

  한글과 한자가 뒤섞인 '퓨전-글로벌'한 글자는 읽을 수는 있지만 뜻을 금방 알아차리기가 어렵다. 한자로 치환한 후 뜻을 짐작해볼 수는 있지만 흔히 쓰는 말이 아니라서 낯설다. 한눈에 뜻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면 읽어도 읽는 것이 아니다. 한자를 공부하지 않은 어린이들도 지나다가 볼텐데 어린이들이 그 뜻을 아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알듯말듯한 글자 아래로 영어도 쓰여있다.

  'Drip Waterring'

  어이없게도 오히려 이 말이 더 쉽게 느껴진다. 영어로 뜻을 알아내라고 적어 놓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点(점)滴(물방울)灌(물대다)水(물)用(쓰다)' 대신에 '한 방울씩 떨어뜨리는 물 주머니'라고 쓰면 안될까?

 

  누가 이런 이름을 지었을까? 한글 전문가를 둘 수는 없을 테니 제조업체 일반 직원 중에서 누군가가 지었을 것이다. 뜻을 함축하는 낱말을 고민고민했음직하다. 혹시 한자말을 넣어야 폼이 난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다 살펴보지는 못했지만 농업관련 상품중에서 이런 류의 이름을 많이 볼 수 있다. 비료포대, 농약봉지, 농기구와 농기계 등등.

 

참 불친절하다. 유박, 박, 유목, 성목, 경엽채류, 인경채류, 시비, 기비, 정식···, 대신에 깻묵, 어린나무··· 등 흔히 쓰이는 쉬운 말로 하면 좋겠다.

 

  장면 2

  

  '비점오염을 줄여 우리 환경 우리가 지킵시다'

 

  좋은 일인 것 같기는 한데 무슨 뜻인지 몰라서 함께할 수가 없다. 그쪽 업계 사람들에게는 흔한 낱말인지 모르겠으나 나는 이런 낱말을 생전 처음 들었다. 전문가들이 모여서 회의를 하는 자리에서나 쓰일 법한 전문 용어 냄새가 난다. 그런데 그것이 길 옆에 붙어있는 캠페인 현수막에 쓰여있다니···  이건 함께 하자는 말이 아니다. '우린 이런 거 하고 있는데 자세히 알 필요는 없고 그냥 알고나 계시라'는 얘기나 다름없다. 대중을 대상으로 하는 홍보, 캠페인이라면 사람들에게 알기 쉽게 전달되어야 한다. 

 

비점(非點) 오염이라··· 함께하고 싶어도 뜻을 몰라서 할 수가 없다

 

  경고문은 더 말할 것도 없다. 

 

  '개구부 주의'

 

  공사장 맨홀 위에 쓰여 있으니 뜻은 짐작하겠다. 하지만 위험 안내 치고는 너무나 힘을 줬다. 차라리 '주의', 또는 '조심하시오'라고 쓰는 편이 훨씬 낫겠다. 뭐라고 쓰여있나 들여다 보다가 맨홀에 빠질 판이다.

 

무슨 말인가 들여다 보다가 맨홀에 빠지게 생겼다

 

  장면 3

 

소비자에게 정보를 주고자 한다면 매우 효율이 떨어질뿐 아니라 불친절한 자세다.

 

  택배 주문을 하고 물건을 기다리는 시간은 참 지루하다. 그래서 어디까지 왔나를 알아보려고 주문한 웹사이트에 들어가서 '배송 조회'를 자주 하게된다. 그런데 배송조회에 쓰여있는 글자도 마찬가지다. 읽을 수는 있으나 뜻을 금방 알아차리기가 어렵다. '송장', '집화 처리', '간선 상차'· · ·

  왜 이런 용어를 쓰게 되었을까, 볼 때마다 안타깝다. 뜻이 명확하지 않아 손님에게 친절하지 못하다. 직원들에게도 마찬가지겠지만 자꾸 쓰다보니 익숙해졌을 뿐이다. 하다 못해 어감이 좋지도 않다, '송장'이라니···

 

이렇게 쓰면 안 될까?

 

▣ 장면 4

 

   "선생님, 일사량이 뭐예요?"

  처음엔 깜짝 놀랐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니 이게 만만한 낱말이 아니다. '일사(日射)'라는 한자말을 학생들이 일상 생활에서는 쓰지 않는다. 그런데 지구에서 일어나는 모든 기후 현상의 원인이 바로 일사량이다. 일사량을 모르고서는 기후 이해는 출발조차 할 수 없다. 교과서를 찬찬히 읽어보면 이런 낱말이 한둘이 아니다. 당연히 알고 있을 것이라 전제하고 쓰여있는 이런 낱말들 덕분에 학생들이 지리교과를 어려워 한다는 사실을 느낄 때가 많다. 용기를 내서 물어보는 학생은 그나마 어려움을 극복할 가능성이 있지만 표현하고 있지 않은 많은 학생들에게 지리는 점점 더 어려운 과목으로 전락해 간다. 지리를 시작도 하기 전에 지쳐버리고 마는 셈이다.

  전문 용어로 가면 더욱 심해진다.

  사빈, 선상지, 하안단구, 범람원, 사주, 순상지, 습곡···

  읽을 수는 있지만 뜻을 짐작할 수 없는 이런 용어들은 한글로 표현되어 있을 뿐 우리말이라고 할 수가 없을 지경이다. 한자를 잘 알고 있다면 어느정도는 뜻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데 이 용어들이 대부분 일본어에 기원한 한자어이기 때문이다. 대부분 학생들은 한자를 어려워한다. 

  어이없게도 영어 표기를 보면 뜻이 짐작이 되는 것들이 많다.

  '사빈(beach)', '선상지(fan plain)', '하안단구(river terrace)', '범람원(flood plain)', '사주(sand bar)', '순상지(shield land)', '습곡(fold)'···  'beach', 'fan', 'terrace' 등을 생각하면 지형이 어떤 모양을 하고 있을지 대충 짐작이 간다. 특히 심한 지형 용어들을 예로 들었지만 다른 것들도 만만치 않다. 영어가 우리말보다 더 쉽다니···

 

▣ 쉬운 말 쓰기

 

  이쯤되면 우리가 쓰고 있는 수많은 말들이 쓸데없이 어려운 표현이거나 적절하지 않은 표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전문적으로 낱말을 연구하고 퍼뜨리는 단위가 있으면 좋겠다. 그리고 우리도 자꾸 쉬운 우리말을 쓰는 노력을 해야 한다. 말은 소통을 위한 도구이지 폼잡는 장식물이 아니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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