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남도/예산

오석산과 화암사

Geotopia 2020. 11. 19. 22:16

▣ 화강암 잔구(殘丘)

 

  오석산(용산)은 가장 높은 곳이 93.9m에 불과한 낮은 산이다. 차령산지에서 갈라진 지맥이 마지막 끝을 맺는 지점이어서 해안에 가깝기 때문이다. 지금은 이 일대가 해안(아산만)에서 10km 이상 떨어져 있지만 이 일대에서 해안에 이르는 대부분의 지역이 신생대 제4기 마지막 빙하기 이후에 만들어진 충적지로 충적되기 이전에는 모두 바다였다.

  또한 중생대 백악기 이후 오랜 침식으로 평탄화된 지형이다. 이 일대는 모두 백악기 화강암으로 이루어져 있다. 심성암인 화강암이 지표에 드러나 있다는 것은 오랜 시간 침식을 받았다는 뜻이다. 예당평야 일대가 모두 중생대 화강암(쥬라기~백악기) 지대인데 특이하게 화암사 일대는 주변과는 약간 다른 화강암이 분포한다. 미문상(微文狀, granophyric) 화강암인데 북북서-남남동 방향으로 독특하게 관입한 모양을 하고 있다.

  용산 일대에 드러나 있는 미문상화강암은 주변의 흑운모화강암에 비해 풍화가 덜 진전되어 나타난 결과이다. 미문상화강암은 상대적으로 입자가 작아서 주변의 흑운모화강암 보다 심층풍화 속도가 느리다. 생성 연대가 비슷하지만 미문상화강암이 상대적으로 높은 산지를 이루면서 바위 덩어리가 드러나 있는 이유이다.

 

예산군 일대 지질도 *지질자원연구원
용산 일대의 미문상화강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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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강암의 조암광물(rock-forming minerals)과 가수분해

화강암을 이루는 다양한 종류의 조암광물은 석영, 운모류, 장석류 등이 대표적이다. 이 가운데 일부 운모류와 장석류는 물과 반응하여 가수분해되기 때문에 화강암의 풍화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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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왕가 권력의 상징

 

  왕가는 어느 시대, 어느 국가이던 권력의 상징이다. 왕족이라는 명성뿐만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막강한 경제력을 갖고 있었으므로 강력한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경국대전]에 기록된 직전 분등에 따른 토지 사급 면적을 보면 왕가는 일반 관료와는 비교되지 않는 넓은 땅을 직전으로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조선전기 관료 직전 분등(18등급) *[경국대전]

  월성위 김한신(1720~1758)은 1732년 영조의 차녀 화순옹주와 혼인하면서 예산 오석산 일대를 하사받았다. 경국대전에는 공주나 옹주에게 사급한 토지가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품계로 보면 옹주 부마는 종2품관에 해당하였다. 부마에게 내리도록 정해진 토지 외에도 왕이 사사로이 땅과 노비를 사급할 수 있었는데 영조가 화순옹주를 남달리 아꼈다고 하니 아마도 더 많은 땅과 노비를 내렸을 것이다. 사급된 땅이 넓다보니 그 안에 화암사(華巖寺)라는 절이 포함되었다. 규모가 큰 절은 아니었지만 삼국시대에 세워졌다고 전해진다. 오랜 세월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왕가의 권력 앞에서는 아무런 저항을 할 수가 없었던 듯하다. 절과 토지가 모두 경주김씨 가문에 속하여 세습되었다. 김한신의 증손자인 추사 김정희가 절집 현판을 쓰고 주변 바위에 글귀를 새겨 넣을 수 있었던 것은 가문이 소유한 절이었기 때문이다. 왕가의 권력은 천 년 고찰도 사유화할 수 있을 정도였던 것이다.

  또한 왕가의 권력은 양반 귀족도 압도할 수 있었다. 당시 이 일대는 이미 신천강씨, 순흥안씨, 영산신씨, 광산김씨 등 여러 가문들이 정착하여 세거하고 있었다. 여러 대에 걸쳐 살고 있던 양반 가문이 있었음에도 이 일대를 사패지로 장악했다는 것만으로도 왕가의 권력을 짐작할 수 있다. 

 

화강암 절벽 앞에서 바라본 화암사 뒷모습
신암면 일대의 종족촌락

▣ 조선 후기 종족 촌락

 

  김한신이 이곳을 사패지로 하사를 받은 시기는 18세기 중반인데 이 즈음에는 이미 전국적으로 종족촌락이 일반화되어 있었다. 촌락이 들어서기에 적당한 곳은 이미 세력있는 명문가가 장악을 한 상태였으므로 새롭게 마을을 이루기 위해서는 입지 조건이 상대적으로 좋지 않은 곳을 고를 수 밖에 없었다. 번성한 종족촌락은 대부분 중상류 계곡 주변에 들어서 있는 반면에 하류의 저습지 주변은 새롭게 만들어진 마을이 많은 것은 바로 이러한 권력관계를 반영한 것이다. 새말, 신촌(新村), 신리(新里) 등의 이름을 갖는 마을들이 전국적으로 꽤 많은데 대부분 하류 저습지 주변에 있다.

  이 일대는 한양 사대부들의 입장에서 볼 때 '꽤 좋은 곳'이었다. 수려한 경치를 자랑하는 곳은 아니었지만 너른 들을 앞에 두고 있어서 경제적 기반이 튼튼했다. 결정적으로 한양과 뱃길로 연결이 되어 한양 사대부의 별장지로는 전국에서도 손꼽히는 곳이었다. 앞서 썼듯이 이 일대는 조선 전기부터 입향한 여러 가문들이 세거를 하고 있었는데 바로 이러한 조건들이 일찍부터 한양 사대부들을 유인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주김씨家는 너른 땅을 장악하고 이곳을 차지하였다. 이는 조선 후기 상황에서 매우 드문 사례다. 좋은 입지는 권력과 비례하는 경향이 있었으므로 어지간해서는 새로운 가문이 기존의 가문을 이기고 공간을 장악하는 것이 어려웠다. 경주김씨家의 정착은 두 말할 필요도 없이 왕가의 권력이 결정적인 배경이 되었다. 왕가의 절대 권력은 양반가를 압도했음을 알 수 있다.

  김한신은 후사 없이 39세에 요절하여 조카 김이주가 양자로 대를 이었다. 김이주의 생부는 김한정(金漢禎)으로 김한신의 친형이다. 김이주는 노영, 노성, 노경 세 아들을 두었는데 김정희는 3남 노경의 장남이다. 장자 승계를 원칙으로 했던 종법 체계로 볼 때 김정희는 김한신의 장자 혈통이 아니므로 그 유산을 물려받을 수 없었다. 그런데 김정희의 큰아버지 노영이 후사가 없어 김정희가 양자로 장자를 이어받았다. 15세기 후반에 강화되기 시작한 종법 체계가 이 즈음에는 일반적으로 통용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실학자 조차도 떨쳐 버리지 못한 사대주의

 

  천축국고선생댁, 시경, 소봉래 등 김정희가 바위에 남겨놓은 글귀들은 소동파를 숭배하고, 중국의 경승지를 높이 우러러 지은 이름이다. 중국에서 만난 완원을 사모하여 '완당'이라는 호를 즐겨 썼다거나 세한도에 중국 가옥을 그려 넣은 것 등 김정희의 행적에서는 중국을 우러러 봤던 행동들이 숨김없이 드러난다.

  '천축국고선생댁'은 김정희가 중국에 가서 만나 스승으로 모셨던 옹방강의 집에 걸려있는 대련(聯, 중국에서 문과 집 입구 양쪽에 거는 대구(對句)를 쓴 것) 글귀에서 따온 것이다. '想見東坡舊居士. 儼然天竺古先生(동파를생각하니 석가가 틀림없구나)'라는 의미로 소동파와 석가를 동격으로 표현한 것이다. 소동파 흠모와 함께 조선 사대부의 숭유억불 사상을 엿볼 수 있다. 절집에 이런 표현을 했다는 것은 어쩌면 모욕일 수도 있지만 화암사는 사대부 가문이 소유한 절이었으므로 가능했을 것이다.

  '詩境'은 '시흥을 불러 일으키는 지경'이라는 의미인데 옹방강에게 받은 탁본 글귀를 새겨 넣은 것으로 자신이 쓴 것이 아니라 남송의 시인 육우의 글씨이다.

  '小蓬萊'는 도교 삼신상 중 하나인 봉래산에서 따왔는데 앞에 '小'를 붙여 스스로를 낮추고  있다. 

  일설에는 추사(秋史)라는 호도 그의 스승 박제가가 연경에서 만나 교류한 강덕량이라는 선비의 자(字)였던 것과 관련이 있다고 한다.

 

화암사 뒷뜰 미문상화강암에 새겨진 '천축고선생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