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암면의 지리적 특징
예산 신암면 일대도 하천의 합류지점 안쪽에 발달한 구릉지대로 삽교읍 이리와 지리적 조건이 아주 비슷하다. 하지만 신암면은 삽교천 하류 지역으로 하구와 가까워서 배가 드나들 수 있었다는 점에서 이리보다 훨씬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이곳은 삽교천과 무한천이 합류하는 지점으로 금북정맥의 백월산에서 갈라진 산줄기가 오서산에서 북쪽으로 뻗어 내려 봉수산을 거쳐 오가면 일대를 지나 신암면 신종리 일대에서 끝을 맺는다. 이 산줄기의 끝 부분(용궁리, 종경리, 오산리 등)에는 경주김씨 김정희 가문을 비롯하여 순흥안씨, 신천강씨, 광산김씨, 영산신씨 등 유력한 가문이 세거하였다.
이들 가문들이 입향한 이유는 여러가지지만 공통적으로 한성, 또는 경기도에 연고를 두고 있었던 가문으로 양쪽을 오가면서 마을을 이루었다. 즉, 경기도와 인접하여 수도권과 연결에 유리한 위치였기 때문에 한양 사대부들이 이 일대를 경제적 기반, 또는 피세지로 활용하였다.
하천 연안에 너른 범람원이 발달하고 있지만 조선시대 당시의 치수 수준으로는 너른 범람원을 모두 안정된 경지로 만들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물이 풍부할 뿐만 아니라, 지형의 기복이 작고 평평하여 개간에 유리하였으므로 좁은 공간 범위에 많은 가문들이 밀집하여 정착할 수 있었다.
▣ 입향 이전
영산신씨는 고려 인종 이후 11세까지 고려왕조의 관료로 세력을 떨쳤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도 개국공신(12세 유정), 형조판서(13세 인손), 개성부유수(14세 석조), 좌익공신(세조 옹립) 및 호조참판(14세 계조) 등 당상관에 올랐던 명문가였다. 두 차례에 걸쳐 공신에 책록되었으므로 토지와 노비를 사급받아 세습함으로써 경제적 기반이 튼튼한 가문이었다. 오산리에 처음으로 입향한 신후담은 음직으로 현감에 올랐으며, 종담의 빠른 승진이 문제가 되었다는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전한다. 12세부터 14세까지는 파주와 양주에 묻혔는데 이 가문이 조선초 한성부 인근에 근거를 두고 있었던 훈구 가문이었음을 알 수 있다.
▣ 최초 입향: 15C후반
14세 계조는 네 아들을 두었는데 차남인 후담(厚聃)이 처음으로 오산리와 인연을 맺었다. 가문이 번성하면서 거주지를 확대한 것으로 볼 수 있는데 계조의 네 아들들은 각각 나주(복담), 예산(후담), 상주(서담), 양근(종담)에 각각 터를 잡았다.
후담은 내포 지역의 현감(결성현감, 또는 아산현감)으로 오산리와 인연을 맺었는데 완전히 이주하여 정착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추측의 근거는 후담의 아들 의정(16세)과 의정의 장남 진(17세)의 묘가 파주 탄현에 있기 때문이다. 즉, 최초 입향조인 후담이 살아있을 무렵에는 경기와 내포를 오가며 살았을 것으로 보인다. 후손들은 '명당을 찾아 복거하게 되었다'고 전해 내려온다고 하는데 신암면 일대는 가장 높은 곳이 해발 93.9m(용산)이며 하천과 인접한 저습지가 많아 전형적인 명당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 시기는 대략 15세기 후반인데,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후담이 결성현감으로 재직한 때는 1487년(성종18년)이다.
후담의 아들 의정은 종담의 아들로 후사가 없었던 후담의 양자로 입적되었다. 오산리에는 입향조 후담의 묘 옆에 종담의 단비(壇碑)가 서 있는데 종담이 오산리에 세거하는 후손들의 실질적 조상이기 때문이다. 15세기는 사람이 양산되면서 권력 투쟁이 심해지고 정치적 세력 기반으로서 종족 의식이 강화되던 시기였다.
▣ 본격적 입향: 16C 중반
오산리에 본격적으로 세거하기 시작한 인물은 후담의 손자인 17세 신흠으로 정착한 시기는 대략 16세기 중반이다. 후담이 오산리와 처음 인연을 맺은지 100여 년이 지난 시기이다. 이 시기는 훈구, 사림의 구분이 사라지고 동서 분당이 시작되던 시기로 정치적 배경으로서 종족 촌락이 활발하게 만들어지던 시기와 일치한다. 신흠은 관직을 갖고 있지 않았으므로(세보에는 용양위좌부장(종6)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기록에서 확인이 되지는 않는다) 낙향 형태로 오산리에 정착했는데, 관직이 없었음에도 15세 후담 이후로 확보한 가문 소유의 토지를 경제적 기반으로 어렵지 않게 정착할 수 있었다. 이후로 18세기 초까지 관료를 배출하며 가문을 유지하였다. 그러나 고관을 배출하지 못해 중앙 정계에 진출하지는 못했고 점차 토착화하였다.
▣ 2차 입향: 17세기 초-당쟁기
정치 정세가 보다 복잡해졌던 17세기 초에 2차 입향이 이뤄졌다. 1603년(선조36년)에 18세 신종원이 '당쟁을 피해' 내려왔다고 하는데 신종원은 신흠의 조카이다. 숙부인 신흠 일가가 이미 입향하여 정착한 후 수 십 년이 지난 후였으므로 신종원은 상대적으로 어렵지 않게 정착할 수 있었을 것이다.
종원의 아버지 신진은 신의정의 장남(신흠의 맏형)으로 한성부에 살았다. 신종원 역시 52세에 오산리에 입향하기 전까지는 한성부에 살았고 연천현감으로 입신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신종원이 명나라 사신 접대를 소홀하게 하여 나국(拿鞠)되었다는 내용이 적혀있다. 이 일이 일어난 때는 1600년(선조33)으로 이 사건이 신종원의 낙향과 관련이 깊음을 알 수 있다. 1600년은 북인의 집권 시기로 서인, 또는 남인과의 정치적 갈등이 심했다.
▣ 신계영: 가문을 중흥시킨 인물
종족촌락은 정치적으로 현달한 인물이 나오면 더욱 발달하는 경향이 있다. 오산리 영산신씨 가문에서는 19세 신계영(1577~1669)이 가문을 중흥시킨 인물이다. 전주부윤(종2품)을 지냈고, 오산리로 낙향한 만년에는 판중추부사(종1품)로 제수되었으며, 정헌(靖憲)의 시호를 받았다.
신계영은 부친(신종원)을 따라 오산리에 입향하였는데 그의 나이 27세 때였다. 그로부터 16년이나 지난 1619년(광해군11년), 나이 43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처음 입사하였다. 매우 늦게 입사하였으나 93세까지 장수하면서 오랫 동안 관직 생활을 하였다. 그는 장수하여 생전에 고손까지 봤는데 묘지 행장을 증손 수화가 지을 정도였다. 계영이 직계 후손은 2대까지 독자여서 마을 규모가 늘어나는 데 큰 영향을 주지 못했으나, 정치적, 경제적 위상이 높아 방계 후손들이 번성하는 데 튼튼한 배경이 되었다. [輿地圖書](18세기 중반)에는 오산리 가구 수가 42호(남62, 여104)로 기록되어 있다.
▣ 정치적 중도
신종원은 '당쟁을 피해서' 낙향했다고 후손들에게 전해 내려온다. 연천현감으로 있다가 치죄를 당하였고, 그것이 낙향의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본다면 종원은 당시 집권 세력과 친밀한 관계가 아니었을 가능성이 크다. 당시 집권 세력은 동인계(북인)이었다. 신계영이 집안의 북인계 인사를 꾸짖었다는 일화가 신계영의 행장에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신계영은 서인에게 북인이 몰락한 인조반정 이후 품계가 강등(通訓大夫(정3품)에서 中直大夫(종3품))된 사실이 교지에서 확인된다. 따라서 서인계 인물로 보기도 어렵다. 기호 사림의 맹주였던 송시열(1607~1689)과는 입사 후 같은 시대를 살았으나 특별한 교류가 있었던 흔적을 찾을 수가 없다. 그러나 인조반정 이후 이어진 서인 정권에서 승진을 거듭하며 순탄하게 관직 생활을 마쳤다.
▣ 거주지 확대
마을이 커지면서 거주지 확대가 불가피해지면서 공간 확산이 일어난다. 신계영의 증손자 신수화(22세)는 무한천 건너편(예산읍 관작리 일대)을 개간하였다. 임진왜란 이후에는 입안절수(立案折受)로 토지를 개간하여 소유하는 것이 허용되었으므로 합법적으로 경지를 확대할 수 있었다. 이러한 토지 확대는 정치 권력과 경제력이 갖춘 경우에 절대 유리했으므로 영산신씨 가문이 마을 앞 무한천 연안을 장악하기가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23세에 이르면 더욱 거주지가 확대되어 차령산지 산록의 대술면 송석리에 최언, 최선, 최량, 최민 등 4형제가 이주하여 정착한다. 이곳에는 신종원과 신계영의 묘가 있다. 신종원의 묘는 유명한 명당으로 알려져 있는데 형가들은 이곳을 학정혈(鶴頂穴)이라고 한다.
▣ 한양 본가와 예산 별저를 함께 유지: 내포 사대부가의 전형
신계영은 한양과 오산리를 오가며 생활했고 만년에는 오산리에 정착하였지만 후손들은 오랫 동안 한양과 예산을 오가면서 생활하였다. [사마방목]에 따르면 수화(22세), 최량(23세), 경유(25세) 등 후손들의 출신지가 모두 한양(京)으로 표시되어 있다. 경유(1742~1828)가 살던 때를 보면 이 가문이 적어도 18세기 말~19세기 초반까지 한양과 예산을 오가며 생활했음을 알 수 있다.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한양에 사는 사대부로서 이곳에 전답과 집을 마련해 근본으로 삼지 않는 집이 없다(京城世家無不置田宅於道內以爲根本之地)'고 하였는데 오산리가 이를 잘 증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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