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답사 일정
09:00 출발(홍주문화원) – 09:30 목은 영당(삽교읍 이리) – 삽교천 제방 따라 하류로 이동- 10:30 구만포(고덕면 구만리) – 11:00 신리성지(당진시 합덕읍 신리) – 12:00 하평포구(신암면 하평리) – 12:30 여사울 성지(신암면 신종리) - 13:30 점심(신례원) - 15:00 영산신씨 종족촌락(신암면 오산리) – 15:30 화암사(신암면 용궁리) - 16:30 마무리(화암사)
▣ 목은 이색 영당(影堂)
* 삽교읍 이리 419-1(다락로 103-10)
◆ 영당 내력 1520년 5대손 좌의정 이유청(李惟淸, 목은의 2남 이종학 후손)이 화상에게 2본을 모사하토록 하여 하나는 본인이 봉안하고, 하나는 4대손 한원군 이장윤(韓原君 李長潤, 목은의 3남 이종선 후손, 이유청의 9촌(3당숙))이 봉안 하였다가 1592년 임진왜란 때 7대손 이식(李埴, 鵝洲君, 이장윤의 증손)이 덕산(德山)으로 옮겨 모시게 되었다. 1600년 한음 이덕형과 오성 이항복 두 사람의 소청으로 선조가 윤허하여 목은의 8대손(한양군 이흥준)이 덕산 루산(樓山)에 영당을 건립하고 영정을 봉안하였다. 1654년에 2본을 모사하여 원본은 한산 문헌서원으로 옮기고, 모사본 중 하나는 루산영당에, 다른 하나는 서울 수송영당(壽松影堂)에 봉안하였다. ◆ 영당과 관련된 인척 관계 이덕형은 영당이 세워질 당시 영의정이었던 이산해(李山海, 목은 7대손, 1539~1609)의 사위이다. 이산해는 이흥준의 재당숙(7촌)이므로 이덕형(1561~1613)의 아내(이산해의 2녀)와는 항렬상 8촌간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점은 이흥준의 아들 이흡은 서인으로 유배 생활 끝에 1606년에 사망하였다. 이흡은 1591년 송강 정철을 중심으로 하는 서인이 몰락할 때 유배를 당했고, 1601~1606 옥구로 다시 유배를 당했다가 풀려난 이듬해에 사망했다. 1591년 당시 상대 당파는 동인으로 정철을 유배시킨 핵심 인물이 바로 영의정 이산해이다. 후에 이산해는 서인 처벌에 강경한 입장이었던 북인의 영수로 활동하였으며 선조(재위 1567~1608) 조에서 세번이나 영의정(1590~1592/ 1599/ 1600~1602)을 지냈다. 선조가 죽었을 때(1608)는 院相(왕이 정상적인 국정 수행이 어려울 때 임시로 국정을 의논하던 관직)으로 국정을 주도하였다. 이산해는 이흡의 9촌조부(재종조)이다. |
▣ 이리 내력과 당시 정치 정세
입향조는 이흥준이며 입향 시기는 16세기 후반 경으로 추정된다. 사화를 피하여 은거, 정착하였고 이리 일대를 개간했다고 전해진다. 이흥준의 아들 이흡이 정치적 어려움을 겪게 된 때가 1591년이므로 대략 이 시기에 입향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흡은 정여립 모반사건 때 정인홍을 논핵하여 1591년 파직되었다. 정여립 모반 사건으로 터진 기축옥사(1589)로 동인계가 대거 몰락하였으나 1591년에는 세자 책봉 문제로 정철을 중심으로 하는 서인(광해군 지지)이 몰락했다. 이흡은 기축옥사 당시 사헌부 장령으로서 동인의 중심 인물이었던 정인홍을 논핵한 일로 삭직되었다. 정인홍은 후에 이산해와 함께 대북의 핵심 인물이 되었다.
목은 영정이 덕산으로 옮겨진 시기도 1592년이다. 이 시기는 서인과 동인(남인, 북인)의 당쟁이 심했고,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혼란스러웠던 때이다. 서인과 남인은 전반적으로 정치적 수세기에 있었다.
영당이 세워졌던 1600년 즈음에는 정치 정세가 좀더 복잡하다. 정유재란(1597~1598)이 막 끝이 난 상태였으며, 당시 집권층은 동인(남인, 북인) 계열이었다. 영당 건립을 주청했던 이덕형은 그해 지중추부사을 거쳐 좌의정, 도원수를 겸하는 등 요직에 있었다. 이덕형은 남인으로 분류된다. 한편 이산해는 그해 1월1일에 영의정이 되었다. 바로 사직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다가 4월1일 유생들의 상소 건으로 파직되었다가 바로 복직되었고, 4월28일 사직 상소가 받아들여졌다. 5월에 다시 영의정으로 복직하여 6월에 아성부원군(鵝城府院君)에 봉군되어 1602년 사임할 때까지 영의정을 유지하였다. 이산해에게는 매우 파란만장한 한 해였지만 영의정으로서 최고 권력자의 자리에 있었다. 이후로도 대북의 영수로서 권력의 중심에 있었다.
이흡은 1590년 헌납으로서 정여립 모반 사건 관련자 최영경을 재국문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사건이 1602년에 다시 불거져 옥구로 유배를 당하여 죽기 직전까지 유배 생활을 하였다.
▣ 서인 가문 영당을 동인이 주청한 까닭은?
목은 영당이 마을이 만들어진 중요한 원인일 가능성이 크지만 당시 권력 관계를 살펴보면 잘 납득이 되지 않는 면이 있다. 이흥준의 정치적 경향성은 자세히 알려진 것이 없지만 그의 아들 이흡은 서인계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영당 건립을 주청한 이덕형은 남인계 인물이다. 8촌 처남-매부 간이었던 이흥준-이덕형이 어떤 관계였는지 역시 알려진 것이 없다. 분명한 것은 이덕형의 장인이었던 이산해가 당시 권력의 핵심이었고 이흡과 정확히 반대 편에 서 있었다는 점이다.
정치적으로 반대 입장에 서 있었으나 사사롭게는 한 집안으로서 내부적 교류가 있었을 가능성과, 정치적 탄압에 대한 일종의 배려로 영당 건립을 선물했을 가능성 등을 추정해 본다.
▣ 한산이씨 가계도
▣ 이리와 봉림리의 관계
이흥준이 먼저 입향을 했고 뒤에 영당이 세워졌다. 그런데 이흥준의 아버지인 이식이 임진왜란을 피해 덕산에 영정을 모셨다고 전하는 것으로 보아 이전부터 덕산에 연고가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덕산에 있는 한산이씨 종족촌락은 두 곳으로 봉산면 봉림리, 사석리와 삽교읍 이리, 목리 일대이다. 봉림리에 맨처음 입향한 인물은 이흡으로 알려져 있으며 입향 시기는 두 마을이 거의 비슷하나 이리가 약간 앞섰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거의 비슷한 시기에 부친 이흥준이 삽교 이리에 정착하고, 아들인 이흡은 봉림리에 정착했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깔끔하지가 않다. 따라서 덕산에 본격적으로 정착하기 이전부터 한산이씨家는 이리, 봉림리 일대에 연고를 가지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이훙준의 묘가 봉산면 봉림리에 있는 것을 보면 이런 추측에 무게가 실린다.
그런데
봉림리는 이흥준의 손자인 이의배(1576(선조9)~1637(인조15))가 병자호란 때 순국하여 충신 정례와 충장공 시호를 받음으로써 가문이 크게 현양되었다.
▣ 이리의 지리적 특징: 개간에 유리한 구릉
이리는 저지대지만 생태지대로 보면 산기슭이다. 용봉산-수암산에서 이어지는 산줄기가 이리를 지나 동무산에서 끝을 맺는데 이곳은 삽교천 본류와 덕산천이 합류하는 지점이다. 하천과 해발고도 차이는 많지 않지만 산록이므로 주거지는 수해에 상대적으로 안전하며 하천에 가까워서 경지를 일구기에 유리한 위치이다. 한양군 이흥준이 이리에 정착했을 때 들판을 개간했다고 전해지는 것은 일리가 있는 설이다. 마을 북쪽에 있는 봉우리(해발 74m)를 기점으로 해발 30~70m의 언덕이 동남쪽으로 원호 모양을 뻗어 남쪽 끝에는 동무산(38.1m)과 작은 봉우리가 삽교천 본류에 붙어 있다. 모두 낮고 높낮이 차이가 적어 개간할 수 있는 땅이었다. 또한 이 구릉대 주변은 하천 연안의 낮은 저지대로 특히 마을의 동쪽은 덕산천과 삽교천 본류가 합류하는 지점의 안쪽으로 펼쳐져 있는 너른 평지여서 개간이 쉬운 땅이었다. 또한 하천 주변으로 범람원이 발달하여 토질이 기름지다. 지금은 덕산천이 마을 동쪽에 바짝 붙어서 흘러 가고 있는데 1950년대에 하천 유로를 바꿨기 때문이다. 마을 주민의 증언에 따르면 1957년에 큰 홍수가 나서 지금의 하천쪽으로 물이 넘쳐서 큰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온동네 사람들이 함께 나서서 새 물길을 만들었다고 한다. 원래 덕산천은 이리 동쪽 들판을 가로질러 동쪽으로 길게 뻗어 흐르고 있었다.
▣ 樓山: 해발 74m 짜리 산
동무산의 높이는 해발 38.1m이다. 해발 38.1m의 언덕에 '산' 이름을 준 것은 파격적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산은 '주변보다 높은 곳'을 뜻하는 상대적 개념이다. 호남평야, 김해평야 등 평야지대에는 이와 비슷한 산들이 꽤 많다.
그런데 '루산 영당'으로 기록에 전하는 루산은 지금 지명이 사라졌다. 동여도(東輿圖, 1856?~1861?, 김정호?)에는 루산이 표시되어 있는데 덕산천 북쪽에 표시되어 있다. 동무산이라는 지명도 찾아볼 수 없는데 다만 삽교천 연안에 '도구산(道九山)이라는 산이 표시되어 있는데 어감으로 보면 지금의 '동무산'에 가깝다.
이러한 자료들을 통해 추정해 보면 루산은 이리 북쪽에 있는 해발 74m 짜리 봉우리였을 가능성이 크다. 모양이 우뚝 솟은 '누각(樓)'을 닮았고 '루리 영당'은 이 산의 남쪽 기슭에 있기 때문이다. 루산(樓山)이라는 지명은 지금은 남아있지 않지만 하천 건너편에 옛 이름을 딴 공장(루산 유기질비료)이 있는 것이 재미있다. 하천으로 루산과 떨어져 있는 지금과는 달리 과거에 이곳은 루산 자락이 뻗어 내려온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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