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과 사람들/삶과 지리

호남평야에도 큰 산이 있다

Geotopia 2016. 4. 7. 07:54

  내 친구 최영은 김제 사람이다.

  누구라도 한 번만 들으면  절대로 잊을 수가 없는 '위대한 이름'을 가지고 있는 그는, 고향도 그 '유명한' 호남평야 한 가운데이다. 김제시 진봉면, 주위를 둘러보면 산이라고는 거의 보이지 않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지평선을 볼 수 있는 곳, 호남평야의 한 가운데가 바로 그의 고향 김제시 진봉면 가실리 정동마을이다. 가실리 정동마을은 너른 들판 한 가운데 야트막한 구릉지 위에 자리를 잡았다. 주변보다 높으니 구릉이라고 해야겠지만 사실 해발고도가 10m 정도 밖에 되지 않는 곳으로 평지나 다름이 없다.

<호남평야의 김제시 진봉면 일대>
<김제시 진봉면 가실리 정동마을 주변  *원도:국토지리정보원>

  국내 최대의 너른 평야에서 난 최영의 어부인은 충청도 금산 사람이다. 금산군 군북면 두두리 음지마을. 두두리는 해발 180m를 넘는 고지대에 자리를 잡고 있는 마을로 사방을 둘러봐도 첩첩산중, 산 밖에 보이지 않는 마을이다. 주변을 400m~600m를 넘나드는 산들이 둘러싸고 있는 작은 산간 분지여서 평지가 거의 없다. 한반도 땅의 서쪽에 있기 망정이지 동쪽이었으면 설악산, 오대산이 '형님!' 하고 무릎을 꿇었을 것이다. 산지 사이를 흐르는 하천(조정천) 주변에 좁은 평지가 있기는 하지만 군북면 소재지가 있는 가장 넓은 곳도 폭이 1km 남짓이다.

<충남 금산군 군북면 두두리 음지마을 주변  *원도:국토지리정보원>

  처음으로 둘이서 함께 김제 고향에 가는 길이었단다. 당연히 호남평야 한 가운데를 지나갔겠지? 

  "저기는 왜 농사를 안 지어요?"

  어부인께서 차창 밖을 가리키면서 묻더란다.

  "응? 어디?, 아~ 저기 저 산?" 

  "산이라니요. 저게 무슨 산이에요. 밭을 만들고도 남을 땅인데…"

  금산, 그 중에서도 군북면이라면 그 정도의 땅은 당연히 농사를 지어야 한다. 충청남도 최고봉인 서대산(978.1m) 남쪽 자락을 차지하고 있는 군북면에서는 그것이 당연하고 현명한 선택이다.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닭이봉(508m), 철마산(464m), 국사봉(667.5m), 방화봉(555m) 등 굵직한 산들은 마을과의 표고차가 300m~500m를 넘나든다. 산이라면 이 정도는 되어야지 해발 30m도 채 안 되는 언덕배기가 산이라니 당치도 않다. 

  하지만 그런 당치도 않는 언덕배기가 호남평야에서는 어엿한 산으로 대접을 받는다.

  가실리 정동마을 동남쪽에 성덕사라는 작은 절이 있는데 그 뒷산이 이 일대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하지만 가장 높은 곳이라고 해봤자 해발고도가 27m에 불과하다. 서대산 줄기를 바라보면서 자란 어부인의 눈으로 보면 하품이 나올 지경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산은 '성덕산'이라는 어엿한 이름을 가지고 있다. 한자로는 山, 즉 '성스럽고 덕이 있는 산'이니 이름으로 따지면 대단한 권위를 가진 산이라 할 만 하다. 마을과의 표고차가 10m 남짓이지만 그 꼭대기에 올라서면 사방팔방이 다 보여서 서대산이 울고 갈 전망을 자랑한다. 그래서 일찍이 백제시대에 이 산 둘레에 성(성덕산성)을 쌓았었다고 한다. 그리고 어엿하게 진봉면과 성덕면을 가르는 지형적 경계이기도 하다. 옛날 어떤 유명한 지관이 '어진 사람이 많이 날 산'이라고 했다는 얘기도 전한다. 이런 사실들을 통해 보면 이 산이 그저 이름만 산이 아닌 실제로 '대단한' 산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산'은 그러니까 절대적 기준이 아니라 상대적 기준으로 정의되는 것이다. 꼭 높아야만 산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2천m 이상의 고봉이 즐비한 개마고원에서는 2천m를 넘나드는 봉우리 중에 이름이 없는 것이 수두룩하다. 반대로 해발 10m가 못되는 저지대인 호남평야에서는 27m만 되어도 '큰 산'이 되는 것이다. 호남평야의 끝인 만경강변 진봉산은 해발 72m로 성덕산의 세 배에 육박하는 '엄청나게' 높은 산이다.

<만경강변 심포리 진봉산에서 바라본 진봉면 일대. 진봉산은 호남평야의 서북쪽 끝에 있는 해발 72m의 '높~은' 산이다>

  그러니 이 부부는 둘 다 큰 산의 정기를 받고 태어난 것이다. 호남평야 정동마을에서 태어난 최영은 어진 사람이다. 어느 도사님 말씀처럼 성덕산 정기를 받아서 그렇다. 호남평야 너른 들의 정기는 덤이다. 그의 어부인은 높은 산과 깊은 계곡을 닮아 현명하고 속이 깊다. 충청남도 최고봉 서대산과 국사봉 정기를 받아서 그렇다. 높이는 많은 차이가 나지만 둘 다 '큰 산'이기는 마찬가지이니 큰 산의 정기를 받고 태어난 부부가 분명하다.

 사족 한 마디

  최영 고향 마을의 산들은 어부인 말씀처럼 실제로 나무를 잘라내고 땅을 일구면 농사를 짓고도 남을 땅이다. 경사도 완만하고 높이도 높지 않기 때문에. 그런데 엉뚱하게도 듬성듬성 어설프게 소나무가 자라고 있는 것이다. 이 얼마나 아까운 땅인가! 그런데 굳이 그걸 개간하지 않고 남겨놓은 이유는 무엇일까?

  답은 '묘지와 경계'이다.

  개간 과정에서 사람들이 경지와 경지 사이의 경계 부분을 마지막까지 남겨 놓은 것이다. 일종의 '경지 완충지대'라고 할까? 듬성듬성 서 있는 몇 그루의 나무들이 "나 산이거든~" 하고 외치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또 하나, 묘지 공간이다. 산에 매장을 하는 우리의 전통 관습 때문에 마을이 있으면 반드시 산이 있어야만 한다. 대부분의 우리나라 마을들은 배산임수형이기 때문에 묘지 공간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호남평야 한 가운데에 있는 마을은 사정이 다르다. 농사짓는 것이 가능한 땅을 몽땅 경지로 바꿔 놓으면 조상은 어디에 모신단 말인가! 결국 약간이라도 높은 곳을 묘지 자리로 남겨둔 것이다.

김제시 진봉면 호남평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