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과 사람들/삶과 지리

막걸리 심부름 하는 환갑 노인 : 농촌 노령화

Geotopia 2016. 3. 11. 22:22

  ◈ 풍경 하나 - 막걸리 심부름 하는 환갑 노인            


충남 홍성의 시골에 사시는 나의 작은아버지는 십 수 년 전 노인회 입회 자격이 생기는 60세가 되어 마을 노인회에 들어가셨다. 마을 노인회에 들어가자마자 바로 노인회 총무를 맡았는데 그 노인회 총무라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결국 노인회의 온갖 일들을 도맡아하는 심부름꾼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마을 노인회관의 아랫목에는 최소한 일흔에서 여든 살은 잡수신 형님들이 줄줄이 앉아 계시므로 환갑 쯤은 노인네 축에 끼지도 못하는 것이다. ‘노인들 나이가 60이나 80이나 그게 그거 아닌가?’ 하는 젊은 사람들의 생각은 잘못 되어도 한참 잘못된 것이다. 생각해 보라. 80세 노인이 한창 팔팔했던 스무 살 적에 갓난아기였던 사람이 60세가 아닌가? 그러니 환갑 노인네가 ‘형아들’ 막걸리 심부름하는 것이 농촌 노인회관의 당연한 질서일 수밖에 없다.


◈ 풍경 둘 - 나는 젊은이


오래 전 보령 시내에 살았던 나는 큰 맘 먹고 시 외곽에 있는 주포면으로 이사를 단행하였다. 이사하기 전에 이사할 마을에 많이 가보기는 했지만 토박이가 아니어서 아는 분들이 없었다. 하지만 이사 가던 날 이웃에 사시는 분들이 여럿 오셔서 이삿짐 나르는 것을 거들어 주셨다. 젊은 사람이 이사를 와서 좋다는 말씀도 하셨다. 처음 만난 사이였지만 넉넉한 웃음으로 맞아 주는 모습에 ‘이사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그런데 이날 오셨던 분들은 모두 나보다 나이가 한참이나 위인 어르신들이어서 송구스러운 생각이 많이 들었다. 그 때 내 나이가 우리 나이로 서른 일곱이었다.

이사한 후 점차 동네 분들이 눈에 익어 갔지만 나보다 나이가 적은 사람은 없어 보였다. 3년 정도 살다보니 6개월에 한번씩 돌려가며 하도록 되어 있다는 동네 반장 차례가 되었다. 우리 반에 속한 가구가 서른 네 가구였는데 세금고지서, 신문 등을 돌리기 위해 가끔씩 아침 일찍 동네 한 바퀴를 돌곤 했다. 이 때 확실히 우리 반에 속한 동네 분들을 모두 알게 되었는데 예상했던 대로 세대주는 모두 연세가 많은 분들이었다. 나보다 나이가 적은 사람이 딱 한 명 있기는 했는데 그는 부모님과 함께 살면서 시내 직장에 다니는 미혼의 청년이었다.  


◈ 풍경 셋 - 60대 젊은이 

           

그곳에 살던 어느 해인가는 집 앞에 있는 논에 벼농사를 짓게 되었다. 앞 집 할아버지댁 논이었는데 70연세의 할아버지께서 힘에 부쳐서 논농사를 못 짓게 되는 바람에 얼결에 빌려서 짓게 되었던 것이다.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긴 했으나 사실상 농사를 주관하여 지어본 적이 없었고 그나마 농사를 떠난 지가 여러 해였으므로 그야말로 대충 피농사나 다름없는 농사를 짓게 되었다. 그렇지만 땅이 좋았던지, 운이 좋았던지 별로 손을 대지 않았음에도 그냥저냥 벼가 자라서 여름이 되면서 이삭이 나오고, 가을이 되면서 누렇게 익어가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운은 거기가 끝이었다. 잘 익어가던 벼가 그해에 갑자기 불어 닥친 태풍 덕분에 몽땅 쓰러지고 만 것이다. 땅이 좋아서 너무 무성하게 자란 것이 오히려 화근이었다. 물구덩이에 쓰러진 벼를 일으켜 세워줘야 했지만 아침에 출근해서 밤에 돌아오는 생활 속에서 벼가 쓰러진 채 오랫동안 방치되고 말았다. 급기야는 벼이삭에서 싹이 나오고 일부는 꺼멓게 썩어 들어가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별 다른 대책이 없이 바라만보며 출퇴근을 거듭하는 얼치기 농사꾼인 나보다 오히려 이웃의 프로 농부들이 큰 걱정거리를 만났음을 나중에 알았다.

어느 날 퇴근하다보니 논에 벼가 하나도 없는 것이 아닌가? 어둑어둑했기 때문에 다시 한번 자세히 살펴보았지만 네 배미 논에 벼가 하나도 없이 감쪽같이 사라진 것이었다. 가끔 길 옆에 말리려고 널어 놓은 벼를 밤중에 몽땅 쓸어가는 몹쓸 도둑이 있다는 소리는 들었지만 베지도 않은 벼를 통째로 베어가는 도둑이 있다는 소리는 듣지 못했으므로 무척 황당했다. 그런데 집에 돌아와 보니 볏가마가 가지런히 한 켠에 쌓여있었다. 보다 못한 이웃의 어르신께서 조금 한가한 틈을 이용해서 콤바인을 끌고 논에 들어가 벼를 베어 놓으신 것이었다. 평생을 애지중지 자식 키우듯 농사를 지어오신 동네 어르신들 눈에는 그 썩어가는 벼가 ‘남의 논’의 벼로 보이질 않았던 것이다. 동네에서는 젊은 축에 들었던 그 분의 연세가 60이 넘었었으니 말할 수 없이 고마우면서도 그 죄송함이란…. 어쨌든 그 해는 약간 맛이 간(?) 쌀 덕분에 떡은 실컷 해 먹었다.    

◈ 풍경 넷 - 구두 신고 달렸으면 2등은 했을 텐데… 

           

이사 간 지 4년째 되던 해의 일이다. 동네 초등학교 가을 운동회 날이었다. 우리 작은 아이가 다니고 있는 학교였으므로 점심시간 만이라도 잠깐 들여다 보려고 짬을 내어 학교에 갔다. 예전만 생각하고 시끌벅적한 풍경을 상상하면서 학교에 도착해보니 분위기가 몹시 썰렁하다. 예전 같으면 운동장 밖에서부터 온갖 장사치들이 진을 치고 있었을 테고, 학교 안에서는 그늘이 좋고 전망이 좋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작은 다툼도 일어났을 테지만 이날의 풍경은 자리 다툼은 커녕 교정의 나무 그늘 아래 듬성듬성 자리를 펴고 앉은 학부모들의 모습과 넓은 운동장이 애처로울 만큼 적은 수의 학생들이 전부였다. 운동장 가에 진을 치고 앉아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할머니들이거나 아줌마들이다. 예전 같으면 동네 젊은이들이 떼로 몰려다니며 심지어는 한바탕 싸움까지 벌어지는 풍경이 심심치 않게 연출되었지만 이 날은 젊은 남자들을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초등학교이니 학부모인 아버지들이라도 있으련만 아마도 아버지들은 나처럼 잠깐 다녀가는 것이 대부분인 듯싶었다.

맛난 점심을 먹고 일어서려는 참이었다. 아들 녀석이 달려오더니 마을 대표로 달리기를 하란다. 양복에 구두를 신어서 안 된다고 일단은 둘러댔지만 사실 나는 어려서부터 달리기를 잘 못했기 때문에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처지였다. 초등학교 6년 내내 운동회에서 3등 안에 단 한번도 못 들어 본 실력이었으니 예나 제나 항상 달리기라면 겁부터 난다. 하지만 동네 아줌마까지 달려와서는 ‘선수가 없으니 못 뛰어도 뛰어야 한다’는 데에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어정쩡한 자세로 운동장에 나가 섰는데 팀이 고작 세 팀 뿐이다. 마을들이 작아서 인근 마을들을 통폐합하여 팀을 구성하였던 것이었다. 어쨌든 출발선에 서서 다른 두 선수를 살펴보니 다행스럽게도(?) 나이가 나와 비슷하거나 좀 많아 보였다. 옆 동네도 사정이 마찬가지일터이니 당연한 현상이었다. 신호와 함께 마치 뒤에서 누가 잡아당기기라도 하는 듯 안 떨어지는 다리를 억지로 떼어 놓으며 한바퀴를 뛰었다. 그런데 천만 다행스럽게도 2등을 했다. 나로서는 엄청나게 선전을 한 것이다.

이듬해에 또 운동회에 가게 되었다. 지난해의 경험이 있었던지라 이번에는 내심 준비를 조금 하고 갔다. 반바지에 축구화를 차에 싣고 간 것이다. 점심을 먹고 있자니 예상대로 또 학생들이 뛰어왔다. 폼나게(?) 축구화에 반바지를 입고 몸도 풀고 기세 좋게 출발선에 섰다. 하지만 작년과는 상대가 좀 달랐다. 작년 그 선수들은 어디가고 나보다 약간 젊어 보이는 선수들이 옆에 서있어서 조금 긴장이 되었다. 그래도 작년에 2등은 했으니까 올해도 그 정도는 하겠지…, 게다가 구두 대신 축구화를 신었으니 잘하면 1등을 넘볼 수도 있지 않을까?

하지만 결과는 처참한 꼴찌였다. 뭐라고 마땅히 핑계를 댈 수도 없고 아들 앞에서 정말 창피하고 미안했다. 젊은이가 없는 마을에 사는 죄라고 자위하는 수밖에…

그래도 아들이 위로를 해준다. “아빠 작년처럼 구두신고 뛰었으면 2등은 했을 텐데…”


◈ 풍경 다섯 - 일흔 살은 되어야 잔소리를 할 수 있다.


몇 해 전에 고향 동네에 초상이 나서 문상을 가게 되었다. 예전 같으면 발인 하루 전부터 동네 사람들 한 무리가 산소 쓸 자리에 올라가 막걸리 깨나 마시면서 땅을 팠겠지만 지금은 대부분 굴삭기를 이용해서 당일 날 산(山) 일을 한다. 아예 산 일을 전문으로 하는 소형 굴삭기가 있어서 초상이 나면 의례히 연락이 되어 출동하곤 했다. 시간과 노동력을 절약할 수 있고 모양도 곧잘 내었다. 일할 젊은이는 없고 노령화는 자꾸 심해지니 기계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굴삭기가 아무리 능률적으로 일을 한다고 해도 세밀한 작업에는 사람 손이 필요하다. 누군가가 삽을 이용해서 수작업을 해주어야 하는 순서가 되었는데 삽을 들고 나서는 이가 나의 3년 선배되는 형님이다. 옛날 같으면 옆에서 팔짱끼고 서서 ‘잘했느니 잘못되었느니’ 잔소리나 할 나이인 오십대에 삽질이라니… 나는 멀리서 온 손님이라는 이유로 노역(?)에서 면제되었지만 옆에 서있자니 미안한 생각이 들어 슬그머니 자리를 피했다. 그러고 보니 나보다 나이가 어린 축에 드는 사람이라고는 거의 없는데 그나마 모두 나같이 손님처럼 온 치들이었다. 동네에 사는 분들은 모두 삽질을 하는 형님보다 연세가 위인 분들 뿐이었다. 모든 일을 진두지휘하시는 이장님이 그 때 연세 70이 넘는 나의 친구 아버님이셨다. 이제 농촌에서는 손에서 삽을 놓고 아랫사람들에게 이런저런 잔소리라도 하려면 70세는 되어야 하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