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과 사람들/삶과 지리

지명이 주는 오해-눈이 많이 오지 않는 雪川

Geotopia 2016. 3. 8. 22:36

  영화 '국가대표'에 '설천고등학교'가 나온다. 영화 속의 스키점프 국가대표들인 흥철, 칠구, 재복이 나온 학교이다. 칠구의 동생인 후보선수 봉구는 설천중학교에 다닌다. 눈과 관련이 있는 스키를 소재로 한 영화니까 눈'설(雪)' 자를 넣은 '雪川'이라는 이름의 학교를 만들어냈음직 하지만 '설천중학교'와 '설천고등학교'는 허구가 아니고 실제로 있는 학교이다(영화 '국가대표'는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설천고등학교가 있는 무주군 설천면에는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스키장이 있다. 그러니까 '雪川'이라는 지명은 '눈이 많이 오는 지역'이기 때문에 붙여졌을 것이고 그러한 자연환경이 스키점프 국가대표를 많이 배출하는 배경이 되었을 것이다.



<설천면 심곡리 덕유산 북록의 무주리조트>


  하지만 사실은?

  설천면은 그 이름에 걸맞지 않게 의외로 겨울 강수가 많지 않다. 이름 값을 전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설천면은 남쪽으로 덕유산(1,614m)에서 시작하여 북쪽으로 민주지산(1,242m)에 이르는데, 덕유산·민주지산이라는 굴지의 산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높은 산지로 둘러싸인 전형적인 내륙 산악지역이다. 다른 지역에 비해 특별히 눈이 많이 올 수 있는 조건을 갖고 있지 못하다. 설천면 뿐만이 아니라 무주군 전체를 봐도 겨울 강수가 그다지 많은 편은 아니다. 


 

<무주군 강수량  *출처: 무주군 통계연보>


  우리는 여태 '雪川'이라는 지명에게 은근히 호도를 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누구라도 '눈 雪' 字를 쓴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라고 믿는다. '옛날부터 눈이 얼마나 많이 내렸으면 '雪川'이라는 이름을 썼을까?' 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잠깐 '雪川'의 유래를 알아보고 갈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백제시대에 이 일대는 적천현이었으며 신라 치하에 있을 때는 무산현에 속하였다. 통일신라와 고려시대에는 단천현과 주계현으로 개칭되었다. 조선시대에는 무풍면과 주계현이 통합되어 풍서면이 되었다. '설천'이라는 이름은 일제강점기인 1914년도 행정구역 개편으로 처음 등장하였다. 당시 풍서면과 횡천면 그리고 신풍면 3개 면을 통합하여 설천면이 된 것이다. 실망스럽게도 '雪川'이라는 이름은 역사적으로 오래되지 않았을 뿐만이 아니라 설천이라는 지명이 등장하기 전 어떤 지명을 살펴봐도 '눈(雪)'과 아무런 관련성이 없는 이름임을 알 수 있다.

  더욱 '어이없는' 사실은 '눈'이 아니라 '물이 맑아서' 붙은 이름이라는 것이다.

  즉, 면소재지인 '소천(所川)리'는 하천의 물이 눈처럼 맑다 하여 '설천'으로도 불렸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설천'은 우리가 기대했던 것처럼 '눈이 많이 오는 지역'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이름이라는 얘기가 된다.


  이와 같은 지명의 역사를 알지 못하면 지명에서 지리정보나 역사적 사실을 알아내는 것이 무의미해진다. 무의미한 정도가 아니라 자칫하면 잘못된 정보를 도출할 수도 있다. '설천'을 '눈이 많이 오는 곳'으로 오해 하는 것 처럼. 그렇게 된 원인으로는 역사적으로 여러 차례에 걸친 지명 변경 과정이 있었지만 일제 강점기(1914)에 단행된 행정구역 통폐합이 결정적인 원인이었다. 일제는 지명의 지리적, 역사적 의미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행정구역을 통폐합 하듯이 이름도 통폐합을 하거나 변경하고 말았다.

  '설천'에는 눈이 많이 오지 않는다. 다만 산이 높고 북사면이어서 내린 눈이 잘 녹지 않는 곳이기는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