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학창시절에 경상도로 답사를 간 적이 있었다. 대학에 입학하기 전에는 한 번도 경상도 땅을 밟아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나로서는 경상도라는 곳을 난생 처음 간 셈이었다. 경북 울진 어디쯤이었던 것 같다. 저녁으로 백반을 먹었는데 음식이 어찌나 짜고 맛이 없는지 도저히 먹을 수가 없었다. 웬만한 음식은 무리 없이 먹는 나의 음식 적응력이 무력화되는 순간이었으니 같이 갔던 동료들, 특히 여학생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지역에 따라 음식 맛이 차이가 나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또 그 음식점이 유난히 맛이 없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2박3일 일정 내내 별 차이가 없었다. 전국 공통의 맛일 거라는 생각에 자장면을 점심 메뉴로 골라 보기도 했지만 뾰족한 수가 되지 못했다. 그 이후로 나는 ‘경상도 음식은 맛이 없다’고 '낙인'을 찍고 이후에도 경상도에 갈 때는 크게 음식 맛을 기대하지 않는 습관이 생겼다.
1990년대 초반에 부산의 친지를 방문하게 되었다. 멀리서 손님이 왔다고 광안리 어디쯤에 있는 횟집으로 안내를 했다. 충청도에서는 먹어 본 적이 없는 방어회를 주문하고 잔뜩 침을 삼키고 있었다. 그런데 대뜸 회가 나왔다. 상추, 마늘, 쌈장 등도 물론 같이 나왔지만 소위 '스케다시 つき
그것으로 끝이었다. 얻어 먹는 주제에 '다 나왔냐'고 물어보기도 미안해서 그냥 기다렸는데 그걸로 끝이었다. 역시, 경상도 음식은 크게 기대할 것이 없다는 생각을 굳히는 계기가 되었다.
몇 년 더 지난 1990년대 후반에 식구들과 함께 경상북도를 여행하게 되었다. 가기 전에 인터넷에서 미리 음식점을 찾아 보았다. 인터넷이 활성화되기 시작했던 때였으므로 경상도 음식에 대한 '불신'이 있었던 나에게는 나름 의미가 있는 적응 방식이었다. 미리 찾아본 음식점을 찾아갔다. 안동이었는데 건물을 정갈하게 단장을 한 음식점에서는 겉모양에 걸맞게 역시 정갈한 음식이 나왔다. 충청도에 비해 반찬의 가짓 수는 많지 않았지만 음식 맛이 그렇게 낯설지는 않았다. 예전의 고정관념을 조금은 수정해야 했다.
그리고 몇 년 후, 그러니까 2000년대 초반에 다시 안동을 가게 되었다. 점심 때가 되어 음식점을 찾던 중 길 옆에 자동차가 많이 서있는 집이 있기에 그냥 들어갔다. 손님이 많다는 것은 어느 정도 맛이 검증되었다는 증거일 수 있으므로…. 특이하게 민물고기인 향어를 넣은 회덮밥이 메뉴에 있었다. 오랫동안 바닷가에 살았던 나에게는 좀 생소한 느낌이었지만 회덮밥을 좋아하는지라 주문을 했다. 주인 아주머니가 내 말투를 듣더니 어디서 왔느냐고 물었다. 충청도라고 했더니 자기는 논산이 고향이라고, 말투가 아무래도 그쪽인 것 같아 물어보았단다(아무리 표준말 비슷하게 포장을 해도 고향 사람은 고향 사람을 알아보기 마련이다). 어쨌든 아무래도 내륙 지방이니까 이런 음식도 있으려니 하면서 물론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런데, 첫 숟갈을 뜨면서 드는 느낌은 ‘이상하다’였다. 맛이 좋았기 때문에. 김치를 비롯한 다른 반찬도 마찬가지로 모두 입맛에 잘 맞았다. 주인이 충청도 사람이라서 내 입맛에 맞는 것일까? 하지만 꽤 손님이 많이 든다는 것은 이 지역 사람들의 입맛에도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는 뜻일 것이다.
이후로는 경상도에 가서 음식맛 때문에 크게 실망을 한 기억이 없다. 자갈치에 가면 푸짐한 스케다시가 나온다. 얼마 전에는 아내와 울산에 갔다가 정말 '배가 터지기 직전'까지 맛난 백반을 먹어 본 적도 있다. 쌈밥을 주문했는데 전라도식 떡갈비에, 가짓 수가 많아 상 밖으로 밀려 나오는 반찬에, 나중엔 주인 아주머니가 특별히 북한식 가자미 식혜까지 써비스로 내주었다. 오죽하면 얼마 후 친구들과 울산을 답사하면서 그 집으로 안내를 했을까?
<스물 두 가지 반찬을 자랑하는 울산의 떡갈비 쌈밥>
<지나가다가 우연히 들어가서 맛있게 먹고 온 창원의 추어탕>
점차 음식 맛이 평준화되어 가고 있다는 뜻이다. 음식 맛의 지역차를 유발했던 요인들이 약해지거나 사라져 가기 때문이다. 그 요인에는 자연환경, 정보의 유통, 상업화 등이 있다.
전통 음식은 기후, 특히 기온을 반영한다. 우리나라의 여름철은 고온다습하여 음식이 상하기 쉽다. 시원한 우물물 말고는 특별히 보관할 수 있는 수단이 없었으므로 염장법(鹽藏法)이 발달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젓갈류는 남부지방으로 갈수록 발달한다. 여름철이 더운 영남 내륙 지방의 음식이 짠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사정이 많이 달라졌다. 지역에 따른 저장 환경의 차이는 냉장고 만든 제조회사에 따라 차이가 날 뿐이다.
게다가 지역간의 인구 및 정보의 이동이 매우 활발하다. 다른 지역의 음식에 대한 정보가 넘쳐난다. 거기에 큰 공헌을 한 것은 소비자들이다. 전국의 이곳저곳을 다녀본 여행객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쏟아내는 음식 품평은 맛을 평준화 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대형 음식점들을 중심으로 외식 산업이 크게 발달한 것도 중요한 배경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결과적으로 음식 맛의 지역간 차별성이 많이 약화되어가고 있다. 가옥 구조나 옷차림, 사투리 등의 문화요소와 마찬가지로 음식 문화도 비슷해져가고 있는 것이다. ‘지역성의 탐구’가 지리학의 주요한 목적이라면 지리학의 주제가 사라져가고 있는 셈이다. '지역성'이란 '특정 지역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특성'이라고 정의할 때 그것이 사라진다면 지리학의 존립 자체가 위협을 받는 것 아닐까?
지역의 특성은 원래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이다. 인구 및 정보, 물자의 이동이 점차 활발해지면서 그 변화가 더욱 빨라지고 많아지고 있을 뿐이다. 이것 또한 지역의 새로운 특색이다. 음식 맛의 차이가 줄어들지라도 자세히 관찰해 보면 재료라든가, 음식점의 분위기라든가, 상차림 등의 차별성은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 여전히 유지되고 있는 차별성에 더하여 과거에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특징들이 생겨나기도 한다. 예를 들면 지역 사람들의 입맛이 변한다거나 특정 지역의 특산 음식이 엉뚱한 지역에 등장한다거나 하는 식이다.
따라서 ‘지리’는 여전히 할 일이 있는, 어쩌면 더 많아지고 있는, 그래서 재미있는 학문이다.
☞ 맛의 평준화-울산 쌈밥과 언양 불고기 : http://blog.daum.net/lovegeo/67804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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