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지리/음식문화

아디스아바바의 분나 마프라트

Geotopia 2020. 2. 3. 09:12

▣ 아디스아바바 공항에는 이르가체페가 없다

 

 

  아프리카의 허브공항 중 하나인 에티오피아의 아디스아바바 공항에서 케냐 나이로비행으로 환승했다. 항공 스케쥴이 마구 바뀐다는 소문대로 환승 비행기가 2시간이나 지연 출발하는 바람에 시간 여유가 많이 생겼다. 여기저기 공항을 기웃거려 보았다. 환승 공간은 그다지 넓지는 않아서 둘러보는 데 많은 시간이 필요치 않다. 지연으로 생긴 시간이 전혀 쓸모가 없을 지경이다.  그래도 다행스러운 것은 '에티오피아스러운' 장면을 만난 것이다. 면세점마다 커피가 쌓여있다.

  그런데,

  커피 이름이 낯설다.

  'Hadero', 'Abyssinia', 'Black lion', 'Wild coffee'… 기대했던 'Yirga Chefe, Sidamo, Harar…' 등등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

 

 

[아디스아바바 공항 면세점의 커피]

 

▣ 커피의 고향에서 아메리카노라니…

 

 

[공항에 있는 카페와 카페 메뉴]

 

  면세점 한쪽에 커피숍이 있다. 'Haro Coffe'라는 간판이 걸려있는 이집에서는 혹시 '고향커피'를 맛볼 수 있을까 해서 메뉴판을 들여다봤더니 실망스럽게도 커피는 단 세 종류뿐이다. 'Americano, Ice coffee, Espresso'. 커피값은 2달러다. 에티오피아에서 아메리카노라니…

  아예 마셔볼 생각을 접고 돌아섰는데 시간이 '남아 돌아서' 나중에 다시 가보게 되었다.

  결과는?

  안 갔더라면 큰일날 뻔했다!

 

▣ 모르고 마신 전통 에티오피아식 커피

 

  테이크아웃을 주로 하는 가게인데 옆에 둘러 앉아 커피를 마실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전통문양으로 양각을 한 조그만 문갑이 테이블이고 주변에 의자가 규칙없이 놓여있다. 문갑 앞에는 에티오피아스러운 옷을 입은 여인이 앉아서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흰색에 목, 손목 등에 무늬를 넣은 이 옷은 '네텔라(Netela)'라는 전통 옷이라고 한다. 본 매장에서 일하는 직원들은 '흔한 카페' 분위기라면 문갑 앞 여인은 '전통 찻집' 분위기다. 

  문갑에는 여러 개의 커피 잔이 놓여 있는데 커피 잔부터 다르다. 손잡이가 없는 잔인데 보통 커피잔에 비해서는 작고 에스프레소 잔보다는 크다. 전통 커피잔 이름은 '시니(Cini)'라고 한다.

 

 

[전통 커피 도구들]

 

  문갑 옆에는 자그마한 숯화로가 두 개 놓여있는데 그중 하나에는 주전자가 올려져 있다. 아라비안나이트에 나올 것처럼 생긴 주전자는 손때와 커피때가 묻어서 고색창연한 느낌이 나는데 보기에는 마치 나무로 만든 것 같다. '제베나(Jebena)'라고 하는 토기 주전자로 목이 잘록하고 길다. 고원지대인 에티오피아에서 끓는 점을 높여줘 깊은 맛을 낼 수 있게 해주고 향 손실도 막아준다고 한다.

  소가죽으로 만든 의자는 반들반들 사람 때가 묻어서 그것만으로도 일단 분위기가 업된다. 등받이가 없고 키가 작아서 앉으면 아기자기한 느낌을 준다.

 

▣ 분나 마프라트(Bunna Maffrate): 귀한 손님에게 내는 '커피 요리'

 

  먼저 에피타이저로 팝콘을 내놓는다. 팝콘은 특별하지 않고 익숙한 맛이지만 에티오피아에서는 '펀디샤'라고 한다. 빵(다보)을 내놓기도 한다고 한다.

  팝콘을 주워먹고 있는 동안 여인은 조용히 향같은 것을 그릇에서 꺼내서 숯불에 넣는다. 이내 뽀얀 연기가 피어오르는데 독특하고 향기가 좋다. 여인은 '에탄(Etan)'이라고 했는데 사전에도 안 나오는 이것은 송진이나 유칼리툽스 잎으로 만든 향이라고 한다.

 

 

 

 

 

[송진과 유칼리툽스로 만든 향]

 

 

 

 

[화로에서 피어오르는 향]

 

  처음 환승게이트에 들어왔을 때 면세점 매장 일대에 연기가 자욱한 느낌이었는데 바로 이것 때문이었다. 여기저기서 향을 피우거나 혹은 콩을 볶는 모양이다. 말린 소똥을 태우는 인도의 뿌자 의식이 떠오르는데 아마 다른 공항이라면 화재경보기가 울렸을지도 모른다. 밀폐된 공간에서, 그것도 공항에서 연기라니, 다른 나라라면 큰 난리가 날 수도 있는 일이지만 에티오피아에서는 아무렇지 않게 이루어지고 있다. 에티오피아에서 자욱한 연기는 위험 신호가 아니라 '환대'의 의미이다.

 

 

 

[숯 화로]

 

 

 

 

[숯화로에 올려진 제베나]

 

 

  이어서 주전자를 들어 커피를 잔에 따른다. 커피를 만드는 과정이 생략되었는데 원래 분나 마프라트는 커피 껍질을 벗겨내는 것부터 시작한다고 한다.

 

 

 

[제베나의 커피를 시니에 따른다]

 

♣ 분나 마프라트

 -행운을 뜻하는 케테마(녹색풀)를 바닥에 깐다.

 -체리 상태로 말린 원두를 절구에 찧어 껍질을 벗긴다. 이때 과육과 파치먼트(딱딱한 겉껍질)가 벗겨진다.

   *에티오피아의 농민들은 커피를 통째로 말리는 전통 방식(건식)을 고집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절구에 찧은 커피를 물에 담가 깨끗하게 씻는다.

 -씻은 원두를 숯불에 볶는다.

 -제베나에 물을 데우면서 커피를 절구에 찧는다.

 -끓는 물에 찧은 커피를 넣고 끓어 넘치지 않게 더 끓인다.

 -세 잔을 대접하는 것이 예의이다.

   *첫번째는 우애의 잔 아볼(Abol),

   *두번째는 평화의 잔 후에레타냐(Hyeletanya),

   *세번째는 축복의 잔 베레카(Bereka)

 -기호에 따라 설탕, 소금, 생강, 버터 등을 넣어서 마신다.

 

 

▣ 진한 맛!

 

  진하다!

  에스프레소 만큼은 아니지만 일단 진한 맛이 매력적이다. 드립 커피에서 느낄 수 없는 텁텁한 맛도 약간 난다. 새콤한 산미가 그 사이에 배어있다. 탕약처럼 진하게 우려낸 커피에 살짝 얹힌 산미라니! 옛날 이슬람 수피들이 먹었을 것 같은 맛이다. 아주 마음에 든다. 강한 바디감에 은은한 신맛은 내가 아주 좋아하는 맛이다. 드립을 해서는 이런 맛을 절대로 만들 수가 없다. 신맛은 훨씬 강하게 만들 수 있지만 마치 한약 다린 것 같은 진한 바디감은 드립법으로는 나오지 않는다. 소가죽 의자에 앉아 마시는 맛도 색다르다. 리필도 기꺼이 해주는(원래 석 잔을 주는 것이 예의이므로 당연한 일이지만 그때는 몰랐다) 진한 에티오피아 커피, 오늘의 수확이다.

 

 

 

▣ 커피 끓이는 여인 프리덤

 

  커피 끓이는 여인은 이름이 프리덤이라고 한다. 말없는 미소로 사진도 마다하지 않고 찍혀준다. '드립'하는지, '끓이는'지 물었더니 '끓인다(boil)'고 하는데 1리터 물에 커피 컵으로 한 컵의 볶은 원두를 넣고 끓인다고 한다. 얼마 동안 끓여야 하는지는 미처 묻지 못했다.

 

 

 [네텔라를 입은 프리덤]

 

  어떤 원두를 쓰는지를 물었더니 그냥 'wild coffee'라고 답한다. 서로 영어가 짧아서 그렇기도 하지만 'Yirga chefe'나 'Sidamo'를 예로 들어도 못 알아듣는 것으로 보아 우리나라식 스페셜티 커피 개념이 없는 것 같다. 그래서 커피가 생산된 곳을 물었더니 '카파(Kaffa)'라고 한다. 귀가 번쩍 뜨인다.

  'Kaffa'는 오로미아(Oromia)와 남부 국가와 민족(Southern Nations, Nationalities, and People's Region)주로 분할되어 지금은 사라진 이름이다. 하지만 지금도 에티오피아 사람들은 관습적으로 옛 이름을 쓰는 모양이다. 짐마(Jimma)라는 도시가 과거 카파의 주도였고 지금도 이 지역의 중심지이며 커피로 유명하다. 이 일대가 바로 커피의 고향이다.

 

☞ Yirga Chefe, 커피의 고향: http://blog.daum.net/lovegeo/6781029

 

  '아메리카노'라는 이름만 보고 지나쳤더라면 어쩔뻔 했을까? 그러니까 이곳에서 '아메리카노'는 에스프레소에 물을 타서 만드는 미국식 아메리카노라기보다는 '에티오피아 전통 커피'라는 뜻으로 쓰이고 있는 것 같다. 남의 동네에 가면 미리 판단하지 말고 무엇이든 일단은 경험하고 볼 일이다.

 

▣ 에티오피아 와일드 커피

 

 

[에티오피아 와일드 커피(오른쪽/왼쪽은 우간다 키게치)는 이름처럼 와일드하다. 크기와 볶아진 정도가 변화무쌍하다. 하지만 맛은 매우 매력적이다]

 

▣  분나 마프라트 흉내내기

 

 

[물이 많이 들어갔고 너무 온도가 높아 팔팔 끓었다]

 

 

[에티오피아식은 아니지만 끓인 후 필터로 걸렀다]

 

 

[농도가 낮지만 텁텁한 모양이다. 맛도 텁텁하기는 하지만 모양에 비해 진하고 미세한 산미가 난다. 드립한 것보다는 맛이 덜하지만 나름 매력적인 맛이 난다. 좀더 굵게 갈고, 물 농도를 조절하고, 불을 조금만 약하게 하면 괜찮은 맛이 나올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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