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기&여행기&답사자료/거문도

여수, 거문도[Ⅱ]

Geotopia 2016. 9. 4. 17:50

▶ 답사일 : 2016. 8.18(목) ~8.19(금)


▶ 일정  

  *18일: 천안아산역 출발(07:45) - 여수엑스포역 도착(10:11) - 여수연안여객선터미널 도착(10:30) - 승선표 매표(12:40) - 점심 식사(13:00) - 여수항 출발(13:40 - (나로도- 손죽도-초도-거문도 서도 경유) - 거문항 도착(고도,16:00) -  동도 방파제(16:25) - 거문대교(16:40) - 서도분교장(16:50) - 이끼미(이금포)해안(17:00) - 저녁식사(장촌, 17:50) - 1박(고도 거문리)   *[Ⅱ]편 내용은 빨간 글씨 부분임


  *19일: 거문등대(07:15) - 거문중학교(09:00) - 인어공원 전망대(10:50) - 녹산등대(11:30) - 점심(고도, 12:50) - 고도답사 - 거문항 출발(16:30) - 여수연안여객터미널 도착(18:20) - 여천 진남시장(군산수산횟집, 18:50) - 여수엑스포역 출발(23:20) - 천안역 도착(03:11)

 

 

▶ 거문도에는 택시가 두 대뿐

 

  껑충한 키에 개량한복을 입은 갑인이가 긴 팔을 흔드는데, 근데 옆에 한 사람이 더 있다. 


  "인사해, 우리 교무부장님" 

 

  갑인이가 소개를 하는데 순간 헷갈린다. 나 모르는 사이에 교감됐나? 초임때부터 섬에 있었으니 점수로 보면 충분하기는 할텐데…

  교무부장님 차가 대기하고 있다. 갑인이 고등학교 후배라서 선배님 횡포에 꼼짝 못하고 코가 꾄 것이다. 나중에 알고보니 차가 없었으면 큰 일 날뻔 했다. 우선 거문도에 택시라고는 단 두 대 뿐이다. 그래서 전화를 걸면 바로 달려오는 것이 아니라 이삼십분 기다려야 하는 것이 보통이다. 방금 여객터미널에서 두 대가 출발했다면 그 차가 되돌아올 때까지 기다려야 하니까 삼사십분도 예사라고 한다. 이튿날 인어공원전망대에서 만난 사람은 3박4일을 걸어서 여행중이라고 했다. 크지 않은 섬이지만 걷는다면 당연히 그렇게 걸리겠다.

  더구나 날씨까지 엄청 덥다. 그러니 이 더운 날 차가 없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갑인이가 여러가지 고민을 했구나! 참나~ 또 한번 갑인스럽다.

 

▶ 가장 작은 섬에 가장 많은 사람이 산다

 

  방금 도착했으니 어디가 어딘지 전혀 알 수가 없는 상태로 차에 올랐다. 동도로 간다고 한다. 거문도는 세 개의 섬으로 되어 있는데 동도와 서도, 그리고 그 가운데에 있는 고도이다. 그래서 거문도의 옛 이름이 삼도(三島)이다. 동도와 서도가 북북서-남남동 방향으로 양 날개처럼 뻗어 있고 양 날개의 거의 남쪽 끝부분에 고도가 끼어있는 형상이다. 刑家들은 동도와 서도는 용이고 고도는 여의주라 하여 매우 기가 센 곳이라고 주장한다.

    인구와 시설이 집중하고 있는 섬은 고도인데 세 개 섬 가운데 크기가 가장 작다. 원래는 서도에 가장 많은 사람이 살았었는데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인구가 늘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특히 1908년 면사무소를 서도 장촌에서 고도 거문리로 옮기면서 중심 이동이 본격화되었다.

  세 섬 가운데 가장 작은 고도가 거문도의 중심이 된 연원은 영국군이 거문도를 점령(1885~1887)했을 당시 고도가 그들의 주둔지가 되었던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영국군이 고도에 항구를 건설하고 군영을 설치하면서 주민들의 왕래가 늘어났다. 그들이 철수한 후에는 고도에 巨文鎭이 설치되었고 항구가 이용되기 시작했다.

 

고도 거문리(삼호교 오른쪽 마을). 거문등대로 가는 수월산(128m)자락에서 바라본 장면. 삼호교 왼쪽은 서도 덕촌이다

 

▶ 거문도는 그다지 오래된 이름이 아니다

 

  '거문도'라는 이름이 쓰이기 시작한 시기는 명확하지 않은데 그다지 오래되지는 않은 것이 분명하다. 거문도의 옛 이름은 '삼도(三島)'이다. 세 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그런 이름이 붙었을 것이다. '삼도'라는 이름이 19세기 후반까지 쓰였음을 고지도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1872년에 만들어진 지방지도에는 삼도가 자세히 표시되어 있는데 이 지도에는 유촌, 장촌, 죽전, 덕흥 등의 마을 이름이 표시되어 있다. 음으로 볼 때 죽전은 오늘날의 죽촌, 덕흥은 덕촌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거문리가 있는 고도에는 어떤 마을도 표시되어 있지 않다. 1895년에 만들어진 '청구요람'에도 '삼도'가 수록되어 있다. 그러니까 19세기 후반까지 거문도라는 이름이 공식적으로 쓰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마을 이름에서도 거문도라는 이름의 역사를 추정할 수 있다. 동도와 서도에 있는 마을 이름들은 모두 한 글자로 되어 있고 뒤에 촌(村)이 붙는다. 서도의 덕촌, 장촌, 동도의 죽촌 등이다. 전통적으로 거문도 사람들은 마을 이름을 그런 식으로 지었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거문도의 중심지는 고도의 거문리이다. '거문'리는 다른 마을들 처럼 한 글자 이름도 아니고, 또 뒤에 村이 붙지 않는다. '거문'이라는 이름이 村이 붙은 여타 마을 이름에 비해 오래되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1872 지방지도(흥양현)에 표시된 삼도. '거문'이란 이름이 없다.

 

  '거문도'라는 이름과 관련하여 가장 잘 알려진 이야기는 청나라 해군제독 딩루창(丁汝昌, 1836~1895)이 거문도 사람들과 필담을 나누다가 주민들이 한문에 능한 것을 보고 '巨文'島라 부르게 되었다는 설이다. 딩루창이 처음 조선에 왔던 때는 1882년이다. 임오군란이 터져 중전민씨 외척 일파가 실각하면서 청나라에 지원을 요청함으로써 조선에 왔다. 

  그가 거문도에 온 것은 그로부터 3년 후인 1885년이다. 영국군이 거문도를 점거하자 이에 항의하기 위해 중국 대표로 거문도에 왔다. '거문'이라는 이름이 딩루창에서 비롯된 것인지는 정확히 확인할 수 없지만 '거문도'라는 이름이 공식적으로 쓰이기 시작한 시기는 그리 오래되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 대동여지도에 거문도가 빠진 이유는?

 

대동여지도에는 거문도(삼도)가 표시되어 있지 않다.

 

  거문도라는 이름이 쓰이기 전 이름인 '삼도'는 <대동여지도(1961)>에는 표시가 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대동여지도>의 기초가 된 지도라고 할 수 있는 <청구도(1834)>에는 삼도가 표시되어 있다. 목판으로 판각하는 과정에서 누락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청구도(1834)에는 삼도(지도 맨 아래)가 표시되어 있다.

 

▶ 2015년, 마침내 三島가 하나가 되었다

 

  삼호교를 건너 덕촌, 장촌을 지나 거문대교를 건너면 동도다. 거문대교는 2015년에 개통되었는데 서도와 동도 둘 사이의 거리가 가장 가까운 곳인 북쪽 해협을 연결하였다. 20여년 전인 1991년 서도와 고도를 연결하는 삼호교가 완공되면서 동도는 더욱 고립되는 신세가 되었다. 그로부터 무려 24년이 지나서 서도와 동도를 연결하는 다리가 놓임으로써 거문도의 세 섬이 비로소 모두 연결되었다.

 

<거문대교에서 바라본 녹산등대와 인어공원>

 

<서도쪽으로 기울고 있는 석양>

 

  동도는 오랫동안 고립되어 고도나 서도에 비해 낙후된 마을이었지만 근래에 들어서 가두리 양식이 활성화되면서 양식의 중심지가 되었다. 동도 죽촌마을 앞에는 맑은 물을 배경으로 가두리 양식장이 편안하게 펼쳐져 있다.

 

<동도 죽촌마을 앞의 양식장들. 사진 가운데 방파제 너머로 고도가 보인다>

 

▶ 진퇴양난: 물을 막아 항구를 만들었더니 환경이…

 

  아담한 마을인 유촌과 죽촌을 지나 찻길로 끝까지 가니 아주 기다란 방파제가 나타난다. 서도와 고도 사이의 해협을 거의 막을 만큼 긴 방파제다. 처음 봤지만 이건 해협을 거의 차단한 방파제라서 해양 환경에 크게 영향을 미쳤을 것 같다. 나중에 들으니 실제로 해양환경이 많이 바뀌었단다.

  옛날에는 서도와 동도 사이 해협이 큰 어장이었단다. 섬 밖 먼 바다로 나갈 것도 없이 갈치며 고등어며 그냥 바로 앞에서 잡혔다고 한다. 가까운 바다지만 좁은 해협이어서 물살이 빠르고 깊어서 외해와 다름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세 개 섬의 중앙부는 한 때 수심이 60m에 이르는 깊은 바닷 속 호수가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방파제가 만들어지면서 물살이 약해지고 그 결과 퇴적물이 점점 쌓여서 지금은 깊은 호수가 거의 메워진 상태라고 한다.

  그 결과 지금은 해협에서는 고기가 거의 잡히지 않아서 밖으로 나갈 수밖에 없다고 한다. 좋은 항구를 만들기 위해서는 방파제가 불가피하지만 거대한 방파제는 해양환경의 변화를 반드시 수반한다. 거문도는 지형이 독특해서 특히 그 변화가 클 것이다. 일반적으로 만의 입구에 방파제를 쌓는 것에 비해 거문도는 해협을 막았기 때문이다. 진퇴양난이다. 막을 수도 없고, 허물수도 없는…

 

<방파제에서 바라본 동도(왼쪽)와 고도. 해협의 끝 부분의 방향은 동남쪽이다>

 

<동도 방파제에서 북북서 방향으로 거문대교가 보인다. 동도와 서도가 만들어낸 해협의 북쪽 끝부분이다>

 

 

▶ 거문도에는 100년이 넘은 학교가 있다
 

  믿어지지 않는 사실이다. 이 조그마한 섬에 백년이 넘은 학교가 있다니! 하지만 사실이다.

  1905년 서도 장촌 출신 김상순이라는 사람이 낙영(樂英)학교를 세웠다. 그는 일찌기 일본에 유학을 하고 군 장교 생활을 하다가 을사늑약을 맞았다. 일제의 침탈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은 교육뿐이라고 생각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이 학교를 세운 것이다. 낙영학교는 광주·전남 지역에서 세 번째로 세워진 근대 교육 기관으로 상당히 큰 의미를 갖는 역사적 장소이다.

  일제 강점기였던 1938년에 공립학교(심상소학교)가 되었고 1941년 서도국민학교로 이름을 바꿔 많은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하지만 1999년 학생 수가 감소하여 거문초등학교 서도분교장이 되었다. 지금은 3학급 15명의 학생이 재학중인데 고도의 본교(10명)보다 학생 수가 더 많다. 학교 통합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고 하는데 서도분교장은 거문도 차원뿐만이 아니라 전국적 차원에서 볼 때도 역사적으로 상당히 의미가 있는 곳으로 보인다. 어떤 형태로는 그 의미를 살려야 할 것 같다.

 

<거문초등학교 서도분교장>

 

<2005년 세워진 100주년 기념탑>

 

<배보다 배꼽이 더 큰 기념비. 김상순을 기리기 위한 것인지 아니면 기부자를 빛내고자 하는 것인지 혼란스럽다. 우리나라에서는 너무나 익숙한 풍경이다>  

 

 

  거문도에서 근대 교육을 받은 사람이 나오고, 그로 인해 일찍부터 근대교육기관이 세워진 것은 거문도의 위치와 무관하지 않다. 지리적으로 일본에 가깝기 때문이다. 김상순뿐만이 아니라 그 이후로도 많은 사람이 일본에 유학하여 공부를 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일찍부터 많은 지식인들이 배출되었는데 일제 강점기에는 독립운동에, 해방 공간에서는 좌익활동에 뛰어든 지식인이 많았다.

 

▶ 이끼미에 담긴 장소성

 

  장촌의 해협쪽(동도와 서도가 만들어낸 해협) 해안은 수심이 깊어 항구가 발달하는 반면에 반대쪽(서북쪽)에는 백사장이 발달하고 있다. 해협쪽으로는 방파제를 만들고 해안을 따라 길게 축대를 쌓아 도로를 만들었다. 당연히 마을도 길과 항구를 따라 동도를 마주보는 해협쪽(동남쪽)에 발달한다. 서북쪽은 깊은 만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에 이끼미라는 이쁜 이름을 가진 아담하고 아름다운 백사장이 발달한다.

   지표상의 모든 지점은 사람에 따라 다르게 인식이 될 수 있다. 장소성(Placeness)이라고 정의할 수 있는 이러한 특징은 거문도에도 예외없이 나타난다. 

  장촌 출신에 서도초등학교 출신인 갑인이는 마을과 학교에 대한 추억이 많다. 특히 이끼미에서 물장구를 치면서 놀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고 한다. 추억이 가득 담긴 아름다운 장소다. 고운 모래로 되어 있고 마을에서 가까운 이끼미는 아이들의 놀이터로는 안성맞춤이다. 이끼미는 '재미있고 아름다운 곳'이다.

  그런데 이끼미에서 녹산등대쪽으로 조금 떨어진, 인어상 아래쪽에 몽돌백사장이 있다. 이곳은 가면 안 되는 '출입 금지구역'이었다고 한다. 이곳은 이끼미에 비해 훨씬 외해로 노출되어 파도가 강한 곳이다. 강한 파도는 그만큼 에너지도 크기 때문에 훨씬 위험한 곳이었을 것이다. 부모들의 입장에서는 갖은 이유로 자식들이 위험한 곳을 못가게 하려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실제로 비극도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곳은 '위험한 곳'이라는 장소성을 부여받게 되었다.

  거리가 그다지 많이 떨어져 있지 않은데도 '재미있는 놀이터'와 '위험한 곳'이라는 상반된 장소성이 만들어졌고 이러한 장소성은 특별한 계기가 없는 한 세대를 이어 그대로 유지되는 경향이 있다. 지금도 장촌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이러한 장소성이 유지되고 있다.

  많은 여행자료에는 이곳이 '이금포'로 나온다. 갑인이는 이끼미가 근거가 불명확한 한자 이름 이금포로 통용되는 것을 못내 아쉬워한다. 이러한 생각도 장소성과 관련이 있다. 아름다운 추억을 간직한 그 장소가 옛 이름을 간직하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이름도 장소성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이끼미해수욕장.  굳이 아름다운 우리말 이름을 두고 한자말로 바꿀 필요가 없을텐데 나 역시 아쉽다 >

 

 

 

 

<변성암으로 보이는 이끼미해수욕장 주변의 암반>

 

<녹산등대에서 바라본 이끼미(사진 가운데 쑥 들어간 부분)와 위험한 몽돌해수욕장(사진 왼쪽 해안). 엄청 더운 날이어서 녹산등대에서 바라봤을 때 뛰어들고 싶은 유혹이 생겼다. 빨리 오라는 갑인이 전화를 받지 않았다면 실제로 뛰어들 참이었다. 그 위험한 장소로…>

 

▶ 장촌에서 맛 본 거문도식 저녁식사: 어떤 음식점에서도 맛 볼 수 없는 거문도 음식들

 

<장촌에서 맛 본 거문도 음식. 감동의 연속!>

 

☞ 거문도 밥상 http://blog.daum.net/lovegeo/6780818

 

▶ 장촌의 밤 풍경 : 돌담길과 서도항 불빛

 

  장촌의 밤 풍경은 낮보다 더욱 아름답다. 거문대교의 장식 불빛과 동도의 가로등이 멀리 뒷배경으로 보이고 아담한 항구를 밝히는 가로등 불빛이 정겹다. 비린내 가득한 항구가 아니고 그냥 깔끔한 항구다. 아마도 수산물을 내리고, 거래하는 곳이 아니라서 그런 것 같다. 동네 아낙들이 벤치에 모여 앉아 시원한 밤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으로 피서를 하고 있다. 

 

<장촌 서도항. 뒤에 보이는 섬이 동도다>

 

<장촌의 골목길. 예전에는 두툼한 돌담이 쌓여 있어서 마을에 급한 전달사항이 있으면 담 위를 뛰어 다니며 크게 외쳐(욋소리) 알렸다고 한다> 

 

<돌담이 많이 허물어졌지만 아직도 일부는 남아있다. 뒷쪽으로 거문대교가 보인다>

 

▶ 거문도의 중심가 거문리에서

 

  갑인이가 거문도에 왔으니 거문리 거리는 꼭 한 번 걸어봐야 한단다. 거문도의 CBD이므로. 영국군 기지가 있던 곳은 전망이 좋은 산중턱인데 지금은 거문초등학교가 자리를 잡고 있다. 그 아래에 면사무소, 파출소 등 관공서가 자리를 잡았다. 해안을 따라 음식점, 민박, 슈퍼가 있고 북쪽 끝 부분에 거문도 여객선터미널이 있다. 터미널 주변에도 여러 시설들이 몰려있다.

 

 

 

  시간이 늦어서 가게들이 문을 닫았다. 아직 열 시가 안 된 시각이므로 도시의 중심가라면 한창일 때지만 거문도는 그렇지 않다. 불빛을 찾아가다 보니 아직 문을 닫지 않은 슈퍼가 있다. 쌀부터 상비약까지 팔 수 있는 것은 다 파는 'Super' 맞다. 거문도 특산 쑥 막걸리도 있었는데 이건 나중에 아래 사진을 보고 알았다.

 

 

<수퍼에서 맥주를 사오는 내 친구. 나이를 먹었어도 여전히 술이 쎄다>

 

  '포켓몬고'를 하려고 거문도에 온 사람은 많지 않아 보인다. 물론 주말이라면 사정이 다를 수도 있지만 '혹시 배표를 못 구하면 어쩌나' 했던 내 걱정은 기우였다. 발걸음을 하기가 사실상 만만치 않은 곳이라서 구름같이 몰려오지는 않는 것 같지만 그래도 꽤 많은 사람들이 포켓몬고 때문에 거문도를 찾는 것은 분명한 것 같다. KT에서 붙여놓은 안내판이 그 증거다. '게임보다 더 중요한건 고객님의 안전입니다'라고 써있는 안내판이 면사무소 안내 표지판 아래에 붙어있다.

  그게 어떻게 하는 게임인지 해보지는 않았지만 기왕에 거문도에 오는 김에 맛이라도 보려고 했더니 미리 컴퓨터에서 앱을 받아서 설치를 했어야 한다고 한다. 굳이 하려고 하면 못할 것도 없겠지만 그렇게 정성이 뻗치지는 않았다.

 

 

<포켓몬고 사용자들에게 안전사고를 조심하라는 안내판>

 

▶ 거문리 방담: 영국이 거문도에 온 이유, 왜 거문도가 여수시?, 통신망의 중심지 거문도

 

  시원한 바닷가 평상에 앉아서 맥주와 함께 이야기를 나눴다. 이렇게 단 둘이 앉아 본 것이 얼마만인지 계산이 안 될 지경이지만 엊그제 만난 것만 같다. 머리를 뒤로 쓸어넘기는 동작하며, 연달아 피워대는 담배하며, 그 담배 덕분에 가끔씩 목소리를 가다듬는 소리하며, 갑인이는 거의 변한 것이 없다. 얼굴이 약간 늙었겠지만 내 눈에 예나제나 똑같다.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그 머리 속은 분명히 변했다. 고향에 대한 애정에서 출발한 해양문화에 대한 끝을 알 수 없는 지식이 그것이다.

  오면서 읽었던 40쪽 짜리에 대해 몇 가지 질문을 했다.

 

  첫 번째 의문은 러시아의 남하를 막기 위해 영국군이 왜 이곳에 주둔을 했느냐는 것이다. 내 생각에 거문도는 동해쪽이 아니라 남해에 있어서 러시아의 남하를 견제하기에 적절한 위치가 아닐 것 같았다. 울릉도나 독도라면 모를까. 거문도가 제주도와 본토의 중간에 있어서 징검다리처럼 전략적으로 중요한 위치일 수는 있겠지만 그것은 러시아보다는 일본 등 남쪽에서 올라오는 세력의 입장에서 볼 때 그렇다. 

  이 의문을 갑인이는 시원하게 풀어줬다.

  러시아의 남하는 그 목적지가 일본이나 태평양 한가운데가 아니었다고 한다. 동중국해를 거쳐 동남아, 멀리는 유럽까지 겨냥한 것이 러시아 남하의 목적지였다. 듣고보니 과연 그렇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대답의 꼬리를 문다. 그렇다면 대한해협을 지나는 것이 가장 빠를텐데 왜 굳이 남해쪽으로 돌아가는 노선을 예상했을까? 이 문제도 갑인이는 가볍게 해결해준다. 답은 석탄이었다. 당시 연료였던 석탄을 중간에 공급 받아야 했으므로 석탄을 공급받을 수가 없으면 긴 항해가 어려웠다. 실제로 러시아군이 거문도에 상륙하여 석탄창고를 설치하려고 주민과 교섭했었다고 한다. 이러한 정보들을 잘 알고 있던 영국이 거문도를 점령함으로써 러시아를 견제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래서 배워야 한다. 혼자서는 아무리 생각에 생각을 거듭해도 끝내 깨닫지 못하는 것이 수두룩하다. 생각의 물꼬를 살짝만 터줘도 사고가 크게 확장되는 경우 역시 그만큼 수두룩하다. 가르치는 사람이 필요한 이유다.

 

  두번째 의문은 거문도가 여수시에 속하는 이유이다. 거문도는 조선시대까지 흥양(지금의 고흥)현에 속했다. 고흥이 육지 중에 거문도와 가장 가까운 지역이기 때문이다. 섬까지 포함하면 완도군이 가장 가깝다. 한때 거문도가 완도 청산도의 청산진 관할이었다는 사실을 이번에 새롭게 알게 되었는데 지도를 보니 완도군의 청산도와 상당히 가깝다.

  이 문제 역시 갑인이가 간단히 해결해줬다.

  경전선철도와 남해고속도로가 개통되기 전에는 뱃길이 남해안 지역을 연결하는 주요 통로였다. 특히 부산-여수를 왕복하는 여객선이 있어서 해로를 통한 남해안 지역 연결의 중추 역할을 했었다. 목포, 완도, 고흥, 보성 등 여수보다 더 서쪽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부산에 가기 위해서는 여수까지 와서 부산행 여객선을 탔다. 그래서 여수는 상당히 중요한 위치였다. 자연스럽게 주변의 섬과 여수를 연결하는 항로가 발달하였고 거문도도 여수와(1896년에 돌산군에 속하게 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여수군에 편입) 연결이 되게 되었다. 지리적으로는 고흥이 더 가깝지만 거문도가 여수에 속하게 된 사연이다.

  통영의 김밥아줌마들이 부산-여수 여객선이 통영에 들어오면 작은 전마선을 타고 여객선 승객들에게 김밥을 팔았다고 한다. 그 유명한 충무김밥 이야기(☞ 전설의 충무김밥  http://blog.daum.net/lovegeo/6779975)인데 이런 역사도 부산-여수 여객선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거문도 출신인 갑인이가 여수 사람이 된 것이나 사촌형님네가 부산에 사셨던 역사가 한줄기로 꿰어진다. 부산에는 지금도 거문도 사람들이 제법 있다고 한다.

 

  세번째 의문은 일제가 부설했다는 해저케이블이 왜 거문도를 지났는가 하는 점이다. 일제는 중국(다롄)과 일본을 연결하기 위한 해저 케이블을 설치했다. 얼핏 생각에 일본과 중국을 연결하는 케이블이라면 더 서쪽, 예를 들면 흑산도 같은 섬을 통과해야 가장 거리가 가깝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이 문제는 (지리학도로서 좀 부끄럽지만) 지도를 보면 간단히 해결이 되는데 거문도의 위치가 정확하게 내 머리 속에 입력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해저케이블은 큐슈의 사세보에서 출발했는데 사세보와 중국(다롄)을 연결하려면 거문도를 통과하는 것이 빠른 길이다. 유인도로는 남해안에서 가장 남쪽에 있는 섬이 거문도이기 때문이다. 영국이 이곳을 전략적 요충으로 파악했던 이유를 새삼 이해할 수 있다.

  알고보니 거문도는 오랫동안 통신망의 요충지였다. 일찌기 영국군은 중국 상하이와 거문도를 연결하는 해저케이블을 부설했었다. 일본과 중국을 연결하는 해저케이블이 그 뒤를 이었고, 또한 한반도 침탈을 위해 제주-거문도, 거문도-고흥, 거문도-순천 등을 연결하는 해저케이블을 부설하였다. 국내외를 연결하는 해저케이블이 거문도를 통과하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라 거문도의 위치 특성 때문에 필연적으로 벌어질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지금도 고도의 거문리에 그 흔적이 남아있다.

 

▶ 양쪽에 신호등이 있는 다리 삼호교

 

  고도와 서도를 연결하는 삼호교는 1차선이다. 1991년에 건설되었는데 기술적인 한계였는지, 아니면 예산의 문제였는지 모르지만 안타깝게도 그렇게 되었다. 더구나 다리가 둥근 아치형이기 때문에 한쪽 입구에서 반대쪽 입구가 눈으로 보이질 않는다. 차가 다리에 들어섰다가 반대쪽에서 오는 차를 만나면 낭패를 본다. 그래서 다리의 양쪽 입구에 신호등이 설치되어 있다. 다리 안에 차가 있으면 빨간 불이 들어오기 때문에 진입을 하면 안된다. 울릉도의 해안 터널 입구에 설치됐던 신호등과 같다. 울릉도는 워낙 해안의 경사가 급해서 2차선의 터널을 만들기 어려운 곳이 많다. 하지만 이곳은 다리인데 기왕 놓는 데 왜 그렇게 놓았을까? 1991년이면 기술 수준 때문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 같은데… 

 

<고도에서 바라본 삼호교. 아치형의 멋진 다리인데 1차선이다>

 

[Ⅲ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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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거문도[Ⅲ]  (0) 2016.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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