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아산의 지리환경/역사지리

3개 군현 통합: 온양군, 아산현, 신창현

Geotopia 2016. 5. 16. 08:20

▶ 온양군, 아산현, 신창현 


  아산시는 조선 시대 3개 군현이었던 지역이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통합되어 만들어졌다. 조선 세종 이후 郡의 지위를 유지했던 온양군은 지금의 아산 시내와 배방읍, 탕정면, 송악면 일대에 해당하며 치소는 '구 온양'으로 불리는 읍내동에 있었다. 신창현은 신창면, 도고면, 선장면에 해당하며 치소는 순천향 대학교 북쪽, 학성산 동남쪽 기슭에 있었다. 아산현은 영인면, 인주면, 음봉면, 둔포면에 해당하며 치소는 영인면 소재지인 아산리에 자리잡고 있었다.


▶ 온양이 컸을까, 아산이 컸을까?


  세 개의 군현 중에 온양은 조선시대 내내 郡의 지위(수령인 군수의 품계가 종4품)를 유지했는데 세종이 온양온천에 행차하여 온천을 즐긴 이후로 궁(溫宮)을 짓고 역대 왕들이 온천 휴양을 즐겼기 때문이다. 신창과 아산은 縣(수령인 현감의 품계가 종6품/ 일부 큰 현은 종5품관인 현령을 두었으나 충청도에서 현령이 수령인 현은 문의현 하나 뿐으로 아산과 신창은 현감이 수령이었다)이었지만 온양 못지 않은 중심지였다. 그 이유는 충청수영에서 호남대로로 연결되는 수영로(水營路) 상에 있었고, 특히 아산현은 아산만 연안의 여러 포구들을 관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지방 행정 단위의 크기는 인구 규모를 기준으로 정하는 오늘날과는 달리 군사적 중요성, 중앙 정부와의 관계, 공납과 조세 등 다양한 기준이 적용되었기 때문에 郡이었던 온양이 縣이었던 신창과 아산에 비해 규모가 큰 행정구역이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온궁이 있던 온양이 중앙정부와의 관계에서 상당히 중요한 위치였다면 신창이나 아산은 교통로 상으로 더 중요한 위치였다. 3개 군현이 통합될 때 그 이름이 온양이 아닌 아산으로 정해진 것을 볼 때 아산현이 근대적 기준에서 더 중요한 위치였을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3개 군현 중에 가장 인구가 많았던 곳은 아산현이었다. 온양(당시 온수현)은 3백43호에 인구가 1,516명이었던데 비해 아산현은 4백82호에 인구가 1,822명으로 온양에 비해 인구가 더 많았다. 특히 군인의 숫자가 온양에 비해 월등하게 많았는데 온양이 시위군 21명, 선군 96명이었던 것에 비해 아산은 시위군 17명, 진군 55명, 선군이 250명이었다.



<대동여지도 아산 일대. 조선시대 온양군, 아산현, 신창현>



▶ 아산현: 중심이 이동하지 않은 縣, 한때는 아산군청이 있었다.


  아산의 3개 군현 가운데 아산현은 여전히 과거 관아가 있던 곳이 면 소재지로서 중심성을 유지하고 있다. 지금은 면 단위 중심지로서 조선시대에 비해 세력이 매우 약화된 상태이긴 하지만 중심지가 이동하지는 않았다. 아산현은 신창현에서 고분다리를 넘어 호남로로 이어지는 주요 도로에서 약간 서쪽으로 떨어져 있다. 즉, 고분다리-요로원-둔포로 이어지는 길이 더 빠른 길이었으므로 아마도 도로 교통량은 아산현을 거치는 길보다 더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아산현은 貢津을 비롯하여 백석포, 둔포 등 아산만 연안의 포구와 연결되는 곳이어서 지리적으로 의미가 큰 곳이었다. 1914년 3개 군현이 통합될 때 그 이름이 郡이었던 온양의 이름을 따르지 않고 縣이었던 아산의 이름을 따른 것을 볼 때 아산현의 중심성이 컸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이때 아산군이 되면서 군청이 아산현 치소(지금의 영인면 아산리)에 자리를 잡았던 사실을 통해서도 그러한 추측을 할 수 있다.


<영인산에서 바라본 영인면 소재지. 과거 아산현 치소가 있었던 곳이다>


▶ 아산의 기원, 어금니바위


  영인산 동쪽 기슭 서원리에는 '어금니바위'라는 커다란 바위가 있다. '牙山'이라는 지명이 이 바위에서 왔다고 하는 설이 있는데 그에 걸맞게 매우 덩치가 큰 바위 덩어리이다. 어금니바위는 수암사라는 절을 감싸고 있는 산줄기의 한 부분을 이루고 있다. 영인산은 전형적인 화강암산지지만 어금니바위는 화강암이 아니다. 화강암과 편마암의 경계 지대 부근에 위치하고 있는데 화강암도 아니고 편마암도 아닌 중생대 백악기에 관입한 맥암이다. 석영류가 많이 보이는 화성암으로 겉모양은 화강암에 비해 거칠다. 화산암과 심성암의 중간 조직을 지니는 암석으로 암석 사이에 마그마가 흘러 들어가 굳어져 줄기처럼 형성된다.


<어금니바위>


▶ 온양군: 1910년대 이후 온양온천을 중심으로 시가지 형성


  곡교천의 양쪽에는 넓은 화강암 침식지를 기반으로 범람원이 발달한다. 범람원은 농경지로 활용되고 있으며 하천의 남쪽 범람원 외곽 구릉지대에 온양 시가지가 자리를 잡았다. 온양 시가지는 전체적으로 야트막한 구릉지대로 곡교천 범람원에 비해 약간 높다. 시내 한가운데를 관통하는 온천천을 비롯하여 동쪽에 온양천과 서쪽의 오목천이 구릉지를 가르며 흐르는데 하천 연안은 대부분 충적지를 이루고 있다(☞ 지질도 https://t1.daumcdn.net/cfile/blog/2307394557371E121C).

  아산의 중심 시가지는 그러니까 곡교천의 남쪽에 자리를 잡고 있는데 이는 도시가 산의 북쪽 자락에 자리를 잡았다는 뜻이다. 전통적인 입지 양상과는 다른 것인데 어떤 이유로 이런 자리가 중심지로 성장을 하게 된 것일까?

  조선시대의 온양군 치소는 흔히 '구 온양'으로 알려진 읍내동에 있었다. 지금도 관아 건물과 향교 등 일부 유적이 남아있다. 읍내동이라는 이름에서도 그곳이 과거 행정 치소가 있었던 곳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지금의 아산시 중심가에서 남쪽으로 작은 산(연산) 하나를 넘어야 한다. 

  특이한 점은 관아 건물의 서쪽에 향교가 있다는 점이다. 온양군 치소가 연산의 남쪽에 있어 남향을 하고 있으므로 동헌의 오른쪽에 있는 것인데 이는 좌묘우사(左廟右社)의 원칙에 위배되는 배치이다. 어떤 연유로 이런 배치를 하게 된 것인지는 정확히 알 수가 없다.

  1914년 3개 군현이 통합되어 아산군이 될 때 군청이 아산현 치소가 있던 영인면 아산리로 이전함으로써 온양은 '구온양'이 되었다. 그러나 그 이전부터 이미 온양군의 중심지는 이동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바로 온양온천 때문이었다. 1905년 경부선 철도가 운행되기 시작하였고 1909년부터 전국적으로 철도를 보조하기 위한 도로(신작로)가 부설되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천안과 온양을 연결하는 신작로가 1910년에 완성되었다. 온천의 나라 일본에서 건너온 일본인들에게 온천이 드문 한반도는 낯선 땅이었을 것이다. 그런 그들이 당시 가장 대표적인 온천이었던 온양온천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당연했다. 서울과 온양온천을 연결하는 가장 빠른 길은 경부선이 통과하는 천안과 온양온천을 연결하는 방법이었다. 새 길은 당연히 온양온천으로 연결되었는데 이 길은 행정치소가 있는 곳과는 상당히 떨어진 길이었다. 그 결과 새로운 시가지가 새 도로와 온양온천 주변에 형성되기 시작하였는데 이것이 지금의 아산 중심가의 출발이었다. 즉, 지금의 중심지에 시가지가 발달하기 시작한 것은 1910년대 이후이다. 1922년에 충남선(지금의 장항선)이 천안과 온양을 연결하게 되면서 시가지의 발달이 더욱 가속화되었다. 충남선을 부설한 경남철도주식회사가 온천을 상업적으로 개발하기 시작한 것도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그 결과 같은 해 영인면 아산리에서 온양면 온천리로 군청이 이전하였다.


▶ 여기서 잠깐! 내포 사람들이 천안을 거쳐 서울에 가기 시작한 때는? http://blog.daum.net/lovegeo/6780766


<영인산에서 바라본 아산시 중심부>


▶ 신창현: 철도가 부설되면서 중심이 이동한 읍치


  신창현 읍치는 학성산 동쪽 기슭에 있었는데 그래서 신창초등학교 일대의 마을 이름이 지금도 읍내리이다. 하지만 신창면 소재지는 이곳에서 직선거리로 3km 정도 북쪽에 있는 오목리이다. 오목리에 신창면사무소가 들어서게 된 것은 언제, 어떤 연유에서 였을까?

  신창면 소재지가 오목리로 옮겨진 것은 1922년이다. 천안에서 시작된 충남선(장항선)은 1922년에 예산역까지 구간이 개통되었는데 오목역도 이때 설치되었다. 1914년 지형도를 보면 오목리보다는 읍내리 일대에 시가지가 더 크게 형성되어 있다. 즉, 1910년대까지 신창면의 중심지는 옛 신창현 읍치를 중심으로 발달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신창면에서 중심 이동이 일어난 계기는 1922년 철도 건설이었다. 그 이후 신창면의 중심지는 오목리 일대였는데 순천향대학교가 읍내리에 자리를 잡고 새로운 중심지로 부상하기 전까지 신창면의 중심지 역할을 유지했다.


<1914년 지형도. *1914년 당시에는 철도가 없었으나 1925년에 추가되었다>


  그런데 철도가 신창현 읍치를 통과하지 않고 구읍치에서 멀리 떨어진 오목리로 통과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일제는 의도적으로 기존 중심지를 피해서 역을 설치하기도 했다. 기존의 중심지를 개발하는데는 비용, 주민의 반달 등 여러 장애 요소가 있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읍내리 대신 오목리로 철도가 통과하게 된 것은 이런 이유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우선 기술적으로 지형을 극복하기 쉬운 노선을 골랐기 때문이다. 읍내리에서 예산쪽으로 가려면 높은 고개를 두 개 정도 넘어야 한다. 또한 당시 열차가 대중 교통으로는 가장 중요한 교통수단이었기 때문에 가능하면 여러 작은 중심지들을 통과하는 노선을 만들었다.


▶ 장구포, 신포, 중방포 : 오목역 주변의 포구들


  또 한 가지 중요한 이유는 포구와 연결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河港은 당시 중요한 교통 요충지였다. 1920년대 당시 내포 최대의 상업 중심지는 예산읍이었는데 예산은 아산만을 통하여 대일 교역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였던 인천과 연결되었기 때문이다. 즉, 예산은 인천에서 공산품을 배로 가져와서 내포 일대에 공급하고 내포 일대에서 모은 농산물들을 인천을 통해 일본으로 반출하는 식민지형 교역에 유리한 위치였다. 

  오목리도 이와 유사한 입지였다. 곡교천의 가항 종점인 곡교리 아래쪽에는 장구포, 신포, 중방포 등 여러 개의 포구들이 발달하고 있었다. 이들 포구와 철도를 결합시키는 것이 당시에는 매우 효율적이었는데 오목역이 가장 적당한 위치였다. 오목역을 지나면 예산쪽으로 학성역과 선장역이 연속되었는데 선장역도 오목역과 입지가 비슷했다. 선장역은 삽교천의 여러 하항들, 특히 도고천의 하항이었던 장포와 삽교천 본류의 하항인 선장포를 연결하는 역할을 했다.



<영인산에서 바라본 신창면 소재지(오목리) 일대. 사진의 저수지 앞쪽으로 길게 늘어선 마을이 오목리이다>


<아산환경과학관 전망대에서 바라본 신창면 소재지 일대와 곡교천 하류. 사진 왼쪽의 아파트 단지는 신창면 남성리이며 남성리 오른쪽으로 오목리가 있다>


  하항이 철도와 도로에 밀려 점차 기능을 상실해 가면서 오목리의 상대적 위치는 하락하였지만 지금까지 행정 중심지로서 역할은 계속하고 있다. 1955년에 신창역으로 역 이름이 변경되었고 지금도 면사무소가 오목리에 있다. 하지만 중심 도로인 21번 국도가 읍내리를 통과하는데다 1960년대 이후 전국적인 현상이었던 이촌향도 현상은 오목리의 중심성에 타격을 주었다. 특히 순천향대학교가 새로운 중심지를 만드는 핵의 역할을 하면서 읍내리 일대가 성장하고 있으며 2007년 장항선 노선이 직선화되어 역이 행목리로 이전하는 등 오목리의 중심성을 위협하는 일들이 이어지고 있다.


<폐쇄된 옛날 신창역>


<신창역 앞 구 중심가. 문닫은 장어 요리집이 옛날의 영화를 말해주는 듯 하다>


<상류쪽에서 바라본 선장면 소재지(군덕리)>

<선장포는 이처럼 공격사면에 자리잡아 수심이 깊었다. 선장포에서 상류쪽을 바라본 장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