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과 사람들/삶과 지리

공간개념 발달의 차이는 어디에서 올까?

Geotopia 2015. 9. 5. 11:05

  어느날 이런 제안을 해 봤다.

  "우리나라 백지도 채우기 내기 한 번 할까?"

 

  우리나라의 특정 시·군을 지도에 표시하고 특징을 묻는 문제가 수능에 자꾸 나오면서 이런 '놀이'를 생각해 낼 수 밖에 없었다. 한 때는 '지명을 외우는 것은 지리가 아니다'라는 것이 지리학도들 간의 참명제였는데 어느 순간 수학능력시험이 그 금도를 넘어버렸다. 지명과 지리적 위치는 여행이나 답사 과정에서 알아가는 것이 원칙이겠지만 우리 교육 현실에서는 꿈 같은 이야기일 뿐이다. 따로 시간을 내어 외우기도 의외로 힘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험에 나오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나는 생각하지만 그 이야기는 일단 다음으로 미루자.

 

<행정구역으로 구분한 백지도에 지명을 채워본다>

 

  "에이~, 하나마나 선생님이 이기시죠…"

  "그러니까 여러분들은 모두 연합해서 하고 나는 혼자 하는거야, 어때? 나도 많이 안 가본 지역은 맨날 헷갈려"

  "그럼 저희는 돌아가면서 채우고, 두 번씩 기회를 주세요"

  "좋아!"

  "그리고 다른 친구가 채우고 있을 동안에는 지도를 마음대로 볼 수 있게 해 주세요"

  "음~, 좀 불공정 계약 같기는 하지만, 좋아. 지는 팀이 아이스크림 사기!"

 

  각 반마다 한국지리를 선택한 사람이 열 명 안쪽이다. 무려 10개나 되는 사회탐구 과목 가운데 달랑 두 개만 골라서 시험을 치게 한 이후로 나타난 인문계 3학년 교실 풍경이다. 그러니까 학생팀은 한국지리를 선택한 모든 사람이 한 팀이다.

 

  결과는?

  물론 나의 승리다. 하지만 아이들은 '내기'가 걸리니까 나름 긴장도 하고 열심히 빈칸을 채운다. 나의 음모(?)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것이다.

 

<선수는 열심히 빈 칸을 채우고…>

 

<대기 중인 선수들은 열심히 외운다>

 

  다음 날 옆 반에 수업을 들어갔더니 소문을 듣고는 이번엔 아이들이 제안을 한다. 나로선 무조건 '땡큐!'다.

 

  "근데 나를 절대로 이길 수가 없어"

  "왜요? 열심히 하면 이길 수도 있지 않을까요?"

  "어제 옆 반에서는 내가 저쪽 경상도(아무래도 지리적으로 먼 경상도는 지리적 위치 개념이 솔직히 좀 헷갈린다ㅠㅠ) 군위군이 생각이 안 나서 틀렸거든. 성주와 고령을 바꿔썼고. 근데 오늘 다시 하면 나는 무조건 다 맞힐거야. 그러니까 너희들이 최고로 잘한다고 해도 나랑 비기는 것 밖에 안 되잖아"

  "음~ 그럼 비기면 우리가 이기는 걸로 해 주세요"

  "좋아!"

 

  결과는?

  여전히 나의 승리다. 두 바퀴도 더 돌고, 컨닝(^^)도 하고, 시간을 연장해도 어쩔 수가 없다. 하지만 이번엔 틀린 곳이 여섯 곳 뿐이다. 이 정도면 내 음모는 거의 관철이 된 것이다.

 

  내친 김에 남학생 반에서도 대결을 제안해봤다. 여학생반과 교류가 없어서 사전 정보가 없는 것이 분명한 듯한데 이번엔 한층 유리한 조건을 제시한다. 아이스크림에 대한 열망이 여학생에 비해 훨씬 강한 탓이다.

 

  "저희가 30개 이내로 틀리면 이긴 것으로 해주세요"

  "150여 개 중에서 30개면 너무하잖니?, 그럼 10개로 하자"

  "좋아요!"

 

  자신만만한 것이 어째 좀 불안(?)하다. 녀석들은 각각 지역을 분담하더니(이건 여학생반도 비슷한 전략이었다) 열심히 외우기 시작한다. 15분을 달라고 했기 때문에 그렇게 하도록 했다. 그리고 나서는 교탁에 둥그렇게 둘러서더니 대표선수 한 사람이 지명을 써 나간다. 여학생반은 한 사람씩 돌려가면서 지명을 쓰고 나머지 사람들은 자기 자리에서 지도를 외우는 전략을 구사했는데 이 팀은 나머지 사람들이 지도를 외우는 시간을 포기하는 대신에 함께 모여서 지명을 써나가는 전략을 구사한 것이다. 결과는?

  3개만을 틀렸다. 나의 패배다. 교내지리올림피아드 대상을 탄 수민이라는 지리적 위치 지식이 특별히 많은 녀석이 있었던 것도 변수 가운데 하나였지만 전체적으로 위치와 지명을 연결시키는 능력이 괜찮은 편이다.

 

  위험한(?) 일반화 논리가 고개를 든다.

  '남성이 여성에 비해 공간개념이 발달한다'

  정기 고사에서 학업 성취도는 여학생반이 좀 더 높았는데 남학생들이 지명찾기는 훨씬 잘 했으니 그런 일반화를 하고 싶은 것이다.

 

  다음 날 다른 남학생반에서도 게임을 해봤다. 지리 박사 순혁이를 비롯한 매니아들이 여럿인 우리반이다. 이번에도 질 것만 같다.

  그런데…

  의외로 내가 이겼다. 엥! 이건 뭐임? 역시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였던 것이다.

  그런데 우리 반은 게임 규칙에서 옵션을 거의 걸지 않았다. 다른 반에서 했던 규칙을 내가 제시했고 학생들은 그대로 받아들였을 뿐이다. 

 

<남학생반에서는 연합작전을 구사한다>

<동영상>

 

  문과 여섯 반 가운데 마지막으로 한 반이 남았다. 여학생반이다. 이길 욕심으로 게임 규칙에 대한 요구 조건이 상당하다. 앞 반의 사례를 말했더니 이 반도 연합작전을 하겠단다. 그런데 아직까지는 없었던 조건이 등장한다. 찬스를 달란다. 그러니까 연합작전으로 지명을 채우다가 막혔을 때 선수 한 사람이 지도를 볼 수 있는 시간을 달라는 것이다. 역시 불공정 거래가 분명하지만 이것도 오케이다. 대신에 이번엔 틀릴 수 있는 한도가 5개이다. 각자 지역을 분담하여 지명을 외운 다음 게임을 시작했다. 긴장감이 보통이 아니다.

  하지만 못 채운 것이 다섯 개를 훨씬 넘는다. 당연히 찬스를 쓰겠단다. 이때부터 룰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찬스를 맡은 지아가 지도를 보면서 계속 누설(?)을 하는 것이다(규칙에 보고 나서 쓰는 것은 허용되지만 보면서 통신을 하는 것은 안 되도록 했었다). 그래도 못 채운 것이 다섯 개를 넘는다. 이번엔 지윤이가 아예 지도를 꺼내 들고 찾기 시작한다. 규칙을 외쳐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 아이스크림 좀비에 물린 이상 막을 도리가 없다.

  결과는?

  당연히 나의 패배다ㅠㅠ

 

<긴장감이 팽팽하다>

 

 

  전체 성적은?

  승패가 반반이다. 그리고 남녀 비율도 똑같다.

 

  '여성에 비해 남성이 공간개념이 발달한다'는 정의는 적어도 이번 게임에서는 맞지 않았다. 공간개념 발달에 대한 설화고등학교 식의 정의를 내려본다.

 

  '공간개념은 성별의 차이 보다는 게임 옵션의 차이에 따라 발달 수준이 달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