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九曲문화의 대명사 화양(華陽)구곡

Geotopia 2015. 7. 23. 07:34

▶ 구곡(九曲)문화와 성리학

 

  조선은 성리학(性理學, 性命義理之學)의 나라였다. 통치 이념으로 받아들여졌던 고려말 당시는 부패와 권력 집중으로 고려가 망국을 향해 치닫던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성리학은 기존 질서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내는데 매우 유용한 이념체계였다. 성리학은 불교와 도교 등을 '실질이 없는 공허한 교설'로 정의하고 이단으로 치부했기 때문에 불교와 풍수 등을 통치 이념으로 삼았던 고려왕조를 배격하는데 효과적인 이념체계였던 것이다.

  성리학은 공자와 맹자의 사상을 재해석하여 가족 공동체와 국가 공동체를 규제하는 규범으로 삼았는데 특히「대학(大學)」에 나오는 팔조목인 격물(格物)·치지(致知)·성의(誠意)·정심(正心)·수신(修身)·제가(齊家)·치국(治國)·평천하(平天下)를 개인의 수양과 국가의 통치를 위한 행위 규범으로 삼았다. 이러한 성리학의 특성은 조선 개국 과정에서 왕과 신하의 적절한 권력 분할로 안정적인 왕도정치를 구현하는 데 활용되었다. 성리학적 소양은 새로운 국가를 만들어 가고자 했던 사대부들이 갖추어야 할 필수적인 요소가 되었다.

  그러나 사대부의 숫자가 늘어나면서 권력 다툼이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었던 조선 중기 이후가 되면 성리학은 명분과 의리라는 본래의 사상이 덫으로 작용하여 권력 다툼의 도구로 전락한다. 하지만 이때도 역시 성리학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었다.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공맹(孔孟)의 도(道)'가 가장 명확한 근거가 되었기 때문이다. 불교와 도교를 '공허한 교설'로 정의했던 성리학이 현실을 외면한 '탁상공론'에 빠져 스스로 '명분'만을 따지는 '교설'이 되기 시작한 것이다. 따라서 긍정적, 부정적 측면과 무관하게 성리학은 조선시대 내내 대부분의 사대부들의 삶을 규제할 수 밖에 었었다. 

  이러한 사회적 환경을 배경으로 등장한 것이 '九曲문화'이다. 구곡은 주자(朱熹, 1130-1200)의 무이구곡(武夷九曲)에서 유래하였다. 성리학을 집대성한 주자는 고향인 푸젠성(福建省) 우이샨 계곡의 아홉구비(九曲)를 골라 이름을 지어 놓고 시를 읊으며 학문을 닦았다. 조선의 수많은 사대부들이 이를 본 따 자신 만의 구곡을 정하여 '구곡가(九曲歌)'를 지어 불렀다. 우이샨(武夷山)은 성리학의 발원지격이며 조선 사대부들에게 주자는 삶과 학문을 따라하고 싶은 신과 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무이구곡은 1곡부터 차례로 승진동(), 옥녀봉(), 선기암(), 금계암(), 철적정(), 선장봉(), 석당사(), 고루암(), 신촌시(市)로 주자가 직접 이름을 붙이고 시를 읊었다. 각각의 '곡'이 단지 경승지인지, 아니면 학문적 발달 단계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인지는 의견이 갈린다고 한다. 

 

九曲문화의 대명사 화양(華陽)구곡

 

  화양동(華陽洞)은 우암 송시열이 구곡의 이름을 짓고(정확하게 말하면 수제자였던 수암 권상하에게 짓도록 했다고 함) 머물렀던 곳으로 우리나라 구곡의 대표격이라 할 만하다. 경치가 우선 뛰어난데다 그의 근거지였던 회덕에서 멀지 않고, 또한 기호 서인의 텃밭이었던 충청도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우암은 이곳에 머물렀을 것이다. 대명(明) 의리론으로 평생을 살았던 우암에게 '華陽(빛나는 태양)'은 매우 친숙한 어감이었을 것 같다.

  구곡은 하류에서 상류로 올라가면서 1곡부터 9곡까지 이름을 붙이는데 화양구곡은 제1곡 경천벽(擎天壁), 제2곡 운영담(雲影潭), 제3곡 읍궁암(泣弓巖), 제4곡 금사담(金沙潭), 제5곡 첨성대(瞻星臺), 제6곡 능운대(凌雲臺), 제7곡 와룡암(臥龍巖), 제8곡 학소대(鶴巢臺), 제9곡 파곶(巴串)이다.

 

  제1곡 경천벽은 '하늘을 떠받치는 벽'이라는 의미이다. 사대부로서 학문에 뜻을 두었다는 것은 '하늘을 떠받치는 사람'이 되어 보고자 하는 뜻을 품는 것이다. 제1곡은 그러니까 학문에 입문하는 선비의 자세나 의지를 표현한 것일 것이다.

 

  제2곡 운영담은 '구름이 비치는 깊은 못'이다. 학문에 뜻을 두고 입문을 하였으나 그 끝이 보이지 않고 뜬 구름을 잡는 것 같은 방황의 시기로 해석해 볼 수 있겠다.

 

<하천의 공격사면에 발달한 하식애(河蝕崖)와 소(沼). 깊은 소가 운영담이다>

 

  제3곡 읍궁암은 효종의 기일에 좌절된 북벌의 꿈을 그리며 우암이 이 바위에 올라 울었다(泣)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한다. 원래 '읍궁(泣弓)'은 중국 태평성대의 상징인 요순시절의 주인공인 순(舜)임금이 세상을 떠난 후 신하들이 '죽은 임금의 활을 잡고 울었다'는 고사에서 기원한 말이다.

  우암은 효종에게서 순임금을 느꼈을 수도 있다. 우암은 효종이 대군(봉림대군)이었던 시절 그의 사부였으며 북벌론으로 효종과 매우 깊은 유대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암은 대명(明)의리론으로 평생을 살았던 인물이다. 그가 찬(撰)한 비문들이 충청도 일대에 상당히 많은데 모두 연대를 명나라 마지막 황제 의종의 연호인 숭정(崇禎)을 사용하고 있는 것에서 그의 중국관을 알 수 있다. 그런 우암에게 북벌론을 펼쳤던 효종은 순임금과 다름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읍궁'은 뜻을 펼치지 못하는 선비의 아픔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읍궁암의 뒷쪽으로 화양서원이 자리를 잡았다>

<화양서원 앞의 묘정비>

 

  4곡 금사담은 '금빛 모래가 반짝 거리는 못'이다. 우암은 바로 이곳에 글을 읽는 집을 짓고 '암서재(巖棲齋)'라는 이름을 붙였다. 어느 정도 학문이 숙성한 단계에 이른 선비의 모습을 닮았다.

 

<금사담과 암서재. 퇴적사면에 금모래가 쌓여 있고 암서재는 반대편 공격사면의 암반 위에 세웠다. 화강암반을 흐르는 물소리는 잡소리를 제거하여 글을 읽는데 도움을 준다>

 

  5곡은 첨성대이다. 첨성대는 별을 우러르는 곳이다. 비로소 학문이 자신 만의 세계를 갖는 단계로 들어갔음을 의미한다.

 

<풍화되지 않은 화강암이 토르(Tor) 형태로 지표에 노출되어 있다)

 

 

  6곡 능운대는 '구름을 능가하는 바위'이다. 실제 모습을 보면 과장이 다소 섞여있기는 하지만 능운대는 학문이 더욱 완숙하여 일정한 경지에 이르렀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해 볼 수 있다.

 

<구름을 능가할 높이는 아니지만 거대한 화강암 토르여서 눈길을 끈다>

 

 

  7곡은 와룡암이다. '누워있는 용'이란 완성은 되었으나 아직 승천을 하지는 못한 용이다. 학문이 거의 완숙한 단계에 이르렀지만 그 뜻을 완벽하게 펴지는 못한 단계로 해석해 볼 수 있겠다.

 

<절리면을 따라 돌개구멍이 발달하고 있다. 지금은 물이 닿지 않지만 과거 물이 흐르던 곳이었음을 알 수 있다>

 

  8곡은 학소대이다. 학은 고고함의 상징이며 곧잘 꼿꼿한 선비의 표상으로 일컬어진다. 학이 깃든 곳이니, 곧 완숙한 경지에 이른 고고한 선비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학소대도 공격사면에 발달한 절벽이다. 화강암이지만 바위가 각이 져 있다>

 

  9곡은 파천, 또는 파곶이다. 너럭바위에 용 비늘 모양의 하식지형이 나타나는 절경이 펼쳐지는 곳이 이곳이다. '파(巴)'는 '꼬리', 또는 '큰 뱀'을 뜻한다. 비늘을 남기고 승천한 용의 자취가 남아 있는 곳으로 해석해볼 수 있겠다. 즉, 학문으로 최고의 경지에 이른 선비의 모습을 상징하는 곳이다.

 

<용비늘 모양의 포트홀(돌개구멍)과 나마(가마솥바위)가 발달한 파곶>

 

 

  구곡은 얼핏 생각하면 '명당'으로 읽힐 수도 있지만 풍수적 개념과는 무관한 전형적인 성리학적 개념이다. 조선의 사대부들은 '풍수'를 '잡설'로 치부하고 배격하였다(물론 후대로 가면서 풍수가 도참적 사상으로 사대부들 사이에 크게 유행을 했지만). 대표적인 예가 수도인 한성부의 입지이다. 풍수지리로 곧잘 해석되는 한성부의 입지는 사실은 당시 대표적 성리학자였던 정도전의 주장에 따라 결정된 전형적인 성리학적 입지이다. 그러니까 구곡은 학문과 심신을 도야하는 데 유리한 장소로서 풍수적 명당 개념과는 거리가 있다.

 

  화양구곡은 조선시대 한 시기를 풍미했던 우암 송시열에 의해 장소의 의미와 권위가 부여된 우리나라 구곡의 대명사이다. 우암의 적통이었던 수암 권상하와 그 계보를 이은 강문팔학사(남당 한원진, 외암 이간, 병계 윤봉구, 봉암 채지홍, 화암 이이근, 관봉 현상벽, 매봉 최징후, 추담 성만징), 그 중에서도 남당 한원진으로 이어지는 기호학파의 산실이기도 했다. 우암의 대명의리론은 수암을 거쳐 남당의 인물성이론(人物性異論)으로 계승되었으며 이는 척사와 항일의 이론적 배경으로 전개되었다. 오늘날까지도 이러한 지역 특색은 충청도, 특히 남당의 근거지였던 내포 일대에 면면히 살아 있는데 그 역사적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바로 우암의 화양구곡에 그 뿌리가 닿아 있음을 알 수 있다.

 

☞ 화강암 지형의 전시장 선유계곡, 화양계곡(Ⅱ)  http://blog.daum.net/lovegeo/67806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