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아산의 지리환경/산지(천안)

聖居山-성인이 사는 산

Geotopia 2015. 5. 3. 23:19

  '聖居山',
  '성인이 사는 산'이라고 해석이 될 것 같다. 천주교 전래 이전부터 이렇게 불렸던 이 산에 천주교도들이 자리를 잡았다는 것은 우연치고는 참 재미있는 우연이다. 해발 579m의 이 산은 천안시 북면, 성거읍, 목천면의 경계를 이루고 있다. 칠현산에서 갈라진 금북 정맥이 첫번째 용틀임을 하는 자리로서 맥이 남쪽으로 이어져 태조산, 차령을 넘어 아산, 공주, 예산, 청양, 보령을 거쳐 서천에 이른다. 한 줄기는 서쪽으로 갈라져 아산만으로 이어진다. 또한 성거산은 정상을 중심으로 서북쪽은 안성천 수계가 동쪽은 금강 수계가, 그리고 남서쪽은 삽교천 수계가 갈라져 나가는 분수계를 이룬다(정확한 분수계는 성거산이 아니고 성거산 남쪽 2km지점에 있는 만일고개이다).

 

<성거산 주변 산계와 수계  *원도: 한국지질자원연구원>

 

<편마암 암괴가 드러나 있는 정상 부근. 정상은 군기지가 설치되어 있어 접근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이렇게 우회로가 만들어졌다>

  성거산은 주변의 화강암 지대와는 다른 경기편마암 복합체의 연속선상에 위치한 전형적인 편마암 산지이다. 경기 편마암 복합체는 화성암으로 산성인 화강암과는 달리 영양염을 풍부하게 함유하고 있다. 따라서 산지 자체와 주변의 평야지대에 영양염을 풍부하게 공급하기 때문에 산지의 식생이 풍부하고 주변 농경지가 비옥하다. 성거산에서도 이러한 특징들을 발견할 수 있다. 곱게 풍화된 토양층이 넓게 분포하며 산성에 강한 소나무보다는 활엽수림이 많이 우거져있다. 능선을 따라 어른 키보다 훨씬 크게 자란 진달래가 꽃망울을 매달고 있는 모습도 성거산의 특징적인 모습이다. 활엽수들이 떨어뜨린 낙엽이 발목 높이까지 뒤덮여 있고 이들은 적당한 온도와 수분의 공급을 받으면 분해되어 또다시 풍부한 유기물을 땅에 돌려주는 순환구조를 이루고 있다.

 

<낙엽으로 덮인 능선 위에 키가 큰 산철쭉이 자란다>

 

  성지를 조성해 놓은 곳에는 옮겨다 심은 소나무가 눈에 띄는데, 소나무가 많은 우리나라 산지를 떠올려보면 매우 특이한 모습이 아닐 수 없다. 마을에서 출발하는 계곡은 웬만한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계속 물을 흘려보내기 때문에 예전에는 계곡 주변을 일구어 논으로 쓰기도 하였다. 식생이 풍부한 산지가 홍수와 가뭄의 충격을 완화해 주는 것은 당연한 상식이다.

 

<보수성이 좋은 토양을 기반으로 식생이 발달하여 능선 가까운 고지대에도 작은 저수지를 만들 수 있다>

 

<능선 절개지에 노출된 편마암>

 

   이러한 자연환경 조건이 탄압기의 교우촌 형성에 주요한 역할을 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즉, 적당한 고립성과 함께 소규모 인구를 부양할 수 있는 토질 조건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골짜기를 따라 자리를 잡은 가옥과 함께 계곡 주변에 일궈진 논들이 이를 잘 보여주고 있으며, 최상류 지역임에도 작으나마 연못이 만들어져 있는 것도 이러한 환경조건을 반영한 것이다.

   또한 지금은 마을의 규모가 축소되어 남아있는 집이 몇 집에 불과하지만 마을이 번성했던 무렵에는 많은 집들이 산기슭에 자리 잡고 있었다. 사진 속의 울타리는 산기슭에 흑염소를 방목하기 위하여 둘러놓은 것이다. 이 울타리 속에는 돌들이 여기저기 무더기를 이루고 있는 과거 집터, 혹은 텃밭의 흔적들을 발견할 수 있다.

 

<염소 방목장>

 

<납안리에서 순교성지 방향으로 올라가다 보면 이렇게 버려진 논이 있다>

 

<거의 산 정상 가까운 곳이지만 수분이 풍부하여 버드나무가 자란다>

<성거산 북동록에 자리 잡은 납안리. 하천 주변은 논으로 쓰였다>

 


<순교성지에서 내려다 본 납안리. 천주교 교우촌이 있었다>

 

  내포(內浦)라 불리는 가야산 일대의 충남 서부지역은 중국과의 접근성이 좋고 한양과 가까워 초기 천주교 포교의 중심지가 되었다. 특히, 조선왕조의 천주교 탄압 정책이 본격화되면서 수도권으로의 접근이 어려웠던 상황에서 내포는 포교의 교두보로서 적합한 위치였다. 합덕, 아산(공세리) 등지의 오래된 성당들은 이를 잘 말해주고 있으며 당진 우강이 고향인 김대건 신부나 내포의 사도로 일컬어졌던 이존창의 탄생지가 예산 신암이었던 것 등도 초기 천주교 포교에 있어서 내포지역의 중요성을 말해주는 증거들이다.

   아산만으로 들어온 천주교는 주로 뱃길과 산길을 따라 가야산 주변으로 퍼져나갔다. 홍성, 해미 등 가야산에서 가까운 지역뿐만 아니라 보령, 멀리는 부여 홍산에 이르는 초기 순교지의 분포는 대략 당시의 천주교의 영향권과 일치한다. 삽교천을 따라 진행된 이러한 전파 방향과 함께 아산만을 기점으로 하는 초기 천주교 전파 방향의 또 한 갈래는 안성천 유역이다.

   탄압이 심해지면서 천주교도들은 몸을 숨길만한 장소를 찾게 되는데, 외부와는 떨어져 있으되 내부적 생산력을 가진 공간이 필요하게 되었다. 차령산지를 따라 이러한 은둔에 유리한 장소들이 꽤 많이 분포하였지만 천주교도들이 주로 선택한 곳은 가까이는 안성천 상류 지역, 즉 성거산, 서운산 등이었으며, 이들은 진천, 음성 등을 거쳐 새재를 넘어 영남에까지 이르기도 하였다. 아산만에서 더 가까운 예산, 아산 등지의 차령산지 주변은 이미 조선시대 중기 이후 많은 사대부 가문들이 차지한 상태였기 때문이기도 하였을 것이다.

   우리민족에게 '산'은 '최후의 보루'와 같은 역할을 하였다. 대표적인 예로 각 고을마다 무수히 흩어져 있는 산성들은 외적과의 전투에서 수세에 몰렸을 때 결사항전을 위해 마련한 자리였다. 정치적 도피자나 난민들이 숨어들었던 곳도 역시 산이었다. 하지만 모든 산들이 다 사람들을 품어주었던 것은 아니다. 웬만큼은 평지가 있어서 농토와 집자리를 마련할 수 있어야 할 것이고, 좁은 땅에서 높은 생산성을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토질도 좋아야 할 것이다. 만약, 정치적 , 사회적 원인으로 숨어든 사람의 경우라면 지리적 고립성도 갖추어진 곳이라야 할 것이다. 성거산은 이러한 조건을 잘 갖춘 산이었다.

 

<성거산에서 바라본 두정동, 업성동 일대>

 

<성거산에서 바라본 성거, 입장 일대>

 

<성거산에서 바라본 천안 시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