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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안이씨 종족촌락 외암리

Geotopia 2014. 4. 27. 00:58

  雪華山 남록에 자리잡은 禮安李氏 종족촌락 외암리. 아산만과 인접한 근기권(近畿圈) 종족촌락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마을이다. 예안이씨는 全義李氏에서 갈라져 나온 분파로 시조 이도(李棹)10세손인 익()이 예안이씨의 시조이다. 한자표기는 '外岩'인데, 조선후기의 호구총수에는 '巍巖', 온양읍지에는 '嵬岩'등으로 표기되어 있으며 '外岩'이라는 표기는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1911, 조선총독부)에서 처음 확인된다.

 

<마을의 주산인 설화산에 바라본 외암리. 설화산의 남서록에 자리를 잡고 있다>

 

  巍巖 李柬(1677~1727)의 호에서 마을 이름이 유래하였다는 설도 있으나 대부분 호를 마을 이름에서 따오는 것이 관례인 것에 비춰볼 때 반대로 이간이 호를 이전부터 불려왔던 외암이라는 마을 이름에서 따 왔다고 보는 것이 옳다. 실제로 1723(경종3)에 이간이 쓴 巍巖記에는 이미 이전부터 '외암'이 마을 이름으로 사용되고 있었음이 기록되어 있다.

 

<마을 입구에 있는 이간의 신도비. 종2품 이상을 지낸 고관들에게 신도비를 내리므로 이간의 신도비는 원칙적으로 정통은 아니다. 후손들이 비문을 지어 세운 묘갈인데도 비의 이름은 신도비로 되어 있고 그 크기도 조선시대 나라에서 내렸던 신도비에 비해 훨씬 크다>

 

<외암 신도비 건너편에는 안동권씨 정려가 있다. 정려는 대표적인 종족촌락 경관요소이다>

 

<마을로 들어가려면 개울을 건너야 한다. 이 하천은 삽교천의 상류인 외암천으로 광덕산과 설화산에서 발원한다> 

 

<외암리에서 먹을 수 있는 청국장. 반찬이 담백하고 토속적이다>

 

 <전통 가옥을 그대로 음식점으로 활용하고 있다>

 

<돌기와 지붕과 처마 밑에 쌓아 놓은 장작더미. 난방을 전통적 방법으로 하는 곳도 있다>

 

<마늘이 자라는 마을 안의 텃밭>

 

<돌담 너머로 겹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돌담을 비집고 나온 개나리는 돌담 너머의 뿌리쪽이 그리운지 담에 몸을 바짝 붙였다>

 

<마을의 돌담과 초가>

 

  조선 명종 때 8세손 이사종(李嗣宗)이 처음 입향하였는데 아들이 없던 平澤陳氏 陳漢平의 맏사위로서 마을에 터를 잡았다. 진한평의 묘는 지금까지 예안이씨가 외조봉사를 하고 있는데 지금도 진참봉 봉제사를 위한 토지가 12마지기나 된다. 일설에 의하면 입향조는 7세손 李挻(李撚)이라고 하지만 이연의 묘를 이사종이 이장하였다고 巍巖記에 기록되어 있다. 세보에 의하면 입향 이전의 거주지는 수원이었고 그 이전에는 한성에 살았으며 이사종이 別業을 지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세거 이전에는 수원과 외암리를 오가며 생활했었음을 알 수 있다.

  예안이씨 정착 이전에는 姜氏睦氏가 살았다고 전해지지만 두 성씨의 자취는 남아 있지 않으며 외암기에 의하면 예안이씨와 함께 파평윤씨, 의령남씨, 평산신씨 등이 한동안 함께 살았고 이간(1677~1727)이 살았던 시기에 이르러 예안이씨가 마을의 주인이 되었다고 한다.

  입향 이후 특별하게 현달한 인물이 없었으나 이사종의 5세손인 이간이 文名을 날리고 入仕를 함으로써 종족촌락의 체계를 갖추었다. 이간은 천거로 翊衛(世子翊衛司 소속의 정5품직)에 이르렀으며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이후 후손 중에서 생원, 진사 11(司馬榜目등재자)이 배출되었고, 이성렬(고종2(1865) 출생. 고종25(1888) 문과 급제, 참찬(2)), 이정렬(고종5(1868)~고종28(1891) 참판(2). 할머니가 명성황후의 이모) 등 현달한 관료가 나왔다. 이사병(1714~1782)과 이간의 손자인 이건주(1747~1819)가 학행으로 천거되었다.

 

<문관석이 있는 무덤은 참판의 무덤인데 문관석의 키가 작고 무덤 앞에는 머리에 뿔이 달린 석상이 한 쌍 더 있다. 이런 형식은 조선시대의 일반적인 형식이 아닌 조선 후기 형식임을 알 수 있다>

 

  이간은 관료로서 보다는 사상가로서 더 명성이 높은데 南塘 韓元震과 함께 湖洛論爭을 이끈 인물이기 때문이다. 송시열의 뒤를 이은 기호학파의 적통 권상하의 제자로 성만징, 이이곤, 채지홍, 최징후, 한원진, 현상벽 등과 함께 강문팔학사로 일컬어졌다. 人物性同異論爭으로 불리는 호락논쟁은 한원진(人物性異論)과 이간(人物性同論)이 논쟁을 주도하였다. 이간의 주장은 주로 洛下(서울, 경기 일대) 사람들이 따랐으므로 洛論으로 불렸다.

 

<종갓집 옆에 있는 외암 이간 사당>

 

<마을의 서쪽 우백호에 해당하는 작은 산줄기에 이간의 묘가 있다>

 

  마을에는 이간의 사당, 신도비, 묘소와 종가, 참판댁(이정렬고가) 등 전형적인 종족촌락 경관이 분포한다. 이간의 묘는 마을의 서쪽에 있는데 무덤의 크기는 이간의 명성에 걸맞게 매우 크지만 고관을 지내지 않았기 때문에 묘에 문관석이나 묘갈이 없다. 이간의 묘가 있는 곳은 마을의 우백호에 해당하는 작은 산줄기인데 산세가 약하기 때문에 일부러 숲을 조성하여 지세를 보했다.

 

<이간의 묘가 있는 마을 서쪽 숲>

 

  3(石多, 言多, 班多)의 마을로 불리기도 하였다고 하는데 실제로 돌이 많아 마을에 돌담이 많다. 주산인 설화산에 블록필드가 발달하여 사면에 많은 암설들이 분포한다.

 

<마을에 돌이 많다. 밭에서 나온 돌을 모아 놓은 모습>

 

<설화산의 블록필드>

 

<외암리 전경  2014.12.6>